..................... 작고 동그랗고 단단한 흙 알갱이가 식물의 뿌리를 살린다. 작고 둥글게 맺힌 한 방울의 물이 뿌리를 적셔 살리고 꽃을 피운다. 시인이 시 '흙의 건축 2'에서 썼듯이 "흙은 제 몸의 물기를 모두 짜서 작은 식물에게 먹였던 것"이다. 흙은 식물의 실뿌리들을 껴안아 천천히 그러나 노련하게 식물을 살려내고, 살아 있게 한다. 그러나 흙은 식물을 살리고 스미고 피우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식물의 일부가 되어 잊히게 함으로써 건축을 완성한다.
자연인 흙과 또 다른 자연인 식물과의 관계는 서로 혜택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지 않다. 오히려 식물은 흙으로부터 시혜를 받는다. 자신을 헐어 다른, 산 것을 무성케 하는 것이 흙의 건축학이다. 흙은 자신의 기운과 활력을 흙 아닌 것을 위해 사용한다. 흙은 생명의 어머니이다.(140924) - 문태준<시인>
........... 입동 지나며 영하로 떨어졌어도 음력으로는 아직 시월. 시월은 상달이다. 추수 후 마을에서는 소를 잡고 돼지를 삶으며 감사의 제를 올리곤 했다. 집집도 가을 고사를 정성껏 지내고 시루떡을 돌렸다. 그때마다 달빛이 휘영청, 능선을 넘어가는 철새들의 울음소리를 고샅에 시리게 떨구곤 했다. 가랑잎을 쓸고 가는 바람 속에 부엉이 울음이 꽤 으스스했지만, 개울 건너 외딴집까지 고사떡을 돌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시월 보름 하늘을 건너가는 기러기 떼가 있다. 올려다보는 우리도 오금 저린 길인데, 그들은 보름달 속에 그림을 그리며 유유히 건너간다. 그런데 그때는 귀뚜라미조차 울음을 그쳐야 한다. '하느님께서/바늘귀를/꿰시는 중'이니 말이다. 땀땀이 박음질하듯 날아가는, 그것도 '보름달/커다란 복판을/질러가는' 기러기 떼의 순간! 우주가 배경인 절묘한 수묵화 한 폭이다. 그쯤이면 지상의 불도 다 꺼야 하리. 특히 시월 상달 보름에는. 오직 기러기 울음 묻은 달빛만 만천하에 출렁이도록!(131114) - 정수자<시조시인>
내 작은 시 그대의 위로가 되었으면 어깨를 눕히는 가을 깊은 산 아래 말갛게 울리는 물방울 소리로 다가간다면
숲 속은 한순간에 낙엽으로 무너지고 밤나무 긴 가지로 길처럼 뻗은 나날 반가운 편지를 보낼까 망설이곤 했지
............... 책과 더불어 등불을 댕기는 가을은 지난날 얘기다. 산과 들의 찬란한 잔치판에 여러 축제까지 보태니 독서는커녕 진득하게 들앉기도 어렵다. 와중에 오랜만의 시집 베스트셀러 소식이 반갑다. 대중에 대한 노골적 호소가 아닌 젊은 시인의 첫 시집이라 더 각별하다. 시 읽는 사람이 아직도 많은가 싶겠지만 도처의 독자들 반응을 만나보면 시 사랑은 여전하다.
그렇게 '내 작은 시'도 누군가의 '위로가 되었으면'…. '말갛게 울리는 물방울' 운율로 그대의 '어깨를 눕히는' 가을을 그려본다. 단풍처럼 물들어 시 속으로 무너진다면 그보다 좋을 순 없을 것. '편지를 보낼까' 망설임 딛고 가는 시집 편지가 더 반갑겠다. 쓸모없음으로 쓸모를 깨우는 시라니, 세상 앞에 서면 더 '작은' 시집으로 초대해도 귀히 받겠다. 연애편지며 주머니 속에서 귀 닳던 시집들의 한때가 불현듯 젖어드는 가을도 한가운데...(151023) - 정수자<시조시인>
기우는 꽃빛 받아 가실하는 바람 속에 오래 참은 약속처럼 잘 익은 가을산에 뜨겁게 묻어둔 말이 등성이에 환하다
잡힐 듯 내달리는 저만치 시간을 따라 열일곱 혹은 열여덟, 볼이 붉던 그 시절에 한번쯤 맡았음직한 그 내음이 묻어난다
계절을 건너와서 깃을 치는 단풍처럼 내 허물도 벗어놓고 들국화에 들어볼까 달큼한 속살의 향내가 다시 나를 달군다
................. 깊어가는 가을 따라 산도 들도 잘 익어간다. 가을빛의 향연처럼 찬란한 단풍 가운데 감국(甘菊)도 제 빛을 조촐히 얹고 있다. '가을의 향기'로 불릴 만큼 향기 짙은 감국은 지천으로 피어 가을 고샅을 오래 비추던 친근한 꽃이다. 그래선지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며 '군자의 꽃'으로 기려온 국화의 하나건만 감국은 똑 시골 소녀나 촌부 같은 느낌이다.
'오래 참은 약속처럼' 환히 핀 감국들. '뜨겁게 묻어둔 말'로 '볼이 붉던 그 시절'을 데려온다. 베갯속 넣는다고 꽃을 따던 날도 있었던가. 항아리에 꽂으면 집안이 온통 노란 향기로 그윽했다. 들꽃은 거기 있어 들꽃이라고 이젠 함부로 데려오지 않지만 말이다. 바람도 가실(가을걷이)하는 날, 하루 잘 익으러 감국에게 간다. - 정수자<시조시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때가 있다. 가을에는,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술 취해 전봇대에 대고 오줌 내갈기다가 씨팔씨팔 욕이 팔랑이며 입에 달라붙을 때에도 전깃줄은 모르는 척, 아프다 꼬리 잘린 뱀처럼 참을 수 없어 수많은 길 방향 없이 떠돌 때에도 아프다 아프다 모르는 척,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이란 게 있어서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 네가 없어도 나는 전깃줄 끝의 저린 고통을 받아 오늘도 모르는 척, 밥을 끓이고 불을 밝힌다 가끔 새벽녘 바람이 불면 우우웅… 작은 울음소리 들리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인연은 모르는 척.
..............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현대시동인상, 이육사문학상 신인상 수상.
새벽에 창을 사납게 두드리던 비도 그치고 이른 아침, 햇살이 미친 듯 뛰어내린다 온몸이 다 젖은 회화나무가 나를 내려다본다 물끄러미 서서 조금씩 몸을 흔든다 간밤의 어둠과 바람 소리는 제 몸에 다 쟁였는지 언제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느냐는 듯이 잎사귀에 맺힌 물방울들을 떨쳐 낸다 내 마음보다 훨씬 먼저 화답이라도 하듯이 햇살이 따스하게 그 온몸을 감싸 안는다
나도 저 의젓한 회화나무처럼 언제 무슨 일이 있어도 제자리에 서 있고 싶다 비바람이 아무리 흔들어 대도, 눈보라쳐도 모든 어둠과 그림자를 안으로 쟁이며 오직 제자리에서 환한 아침을 맞고 싶다
........... 새로운 아침이 우리들의 앞에 있다. 궂은비와 돌풍은 지나갔다. 어둠과 구름과 무거운 그림자는 지나갔다. 갓 딴 사과보다 싱싱한 햇살이 쏟아지고, 새들이 건반의 맑고 높은음으로 노래하는 아침이다. 시인은 회화나무와 함께 아침을 맞는다. 회화나무는 우람하고 의젓하다. 사람의 길은 '하루에도 몇 번 흐렸다 개였다'하지만, 회화나무는 세상의 '이 미망의 길을/ 그윽하게 내려다보는 성자 같다.'
점잖고 당당한 회화나무처럼 제자리에서 살기 어렵다. 제자리에서 살기 어려운 까닭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그 마음을 잘 쓰며 살아야겠다. 회화나무처럼 세상과 따스하게 화답하면서. -문태준 <시인>
산이 온 종일 흰구름 우러러 사는것 처럼 그렇게 소리 없이 살 일이다 여울이 온종일 산그늘 드리워 사는것 처럼 그렇게 무심히 살 일이다 꽃이 피면 무엇 하리요 꽃이 지면 또 무엇하리요 오늘도 산문에 기대어 하염없이 먼길을 바래는 사람아 산이 온종일 흰 구름 우러르듯이 그렇게 속절 없이 살 일이다 물이 온종일 산그늘 드리우듯이 그렇게 속절없이 살 일이다.
측근이라는 말 참 정겨워 측근, 측근, 하다 보면 무슨 큰 백이나 지닌 듯 턱없이 배짱 두둑해지고 까닭 없이 측은지심 생겨나기도 한다 내 측근에는 누가, 누가 있나 나는 누구, 누구의 측근인가 사는 동안 측근만큼 든든한 게 어디 있으랴 그러나 다정(多情)도 병이 되는 양 측근이 화 부르고 독 낳기도 하니 사람아, 사람아, 꽃과 나비 나무와 새 비와 바람과 눈 그리고 하늘과 구름과 음악과 시(詩)를 평생의 측근으로 두어 살면 어떻겠는가
.............................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은 측량하기 어렵다. 어느 때에는 한 뼘의 거리도 까마득하고, 어느 때에는 천 리도 한달음에 달려갈 정도로 가깝다.
염불할 때 손으로 돌리는 염주가 여기 있다. 한 줄로 꿴 염주라도 탱탱하고 둥글둥글한 염주알은 각각 다르다. 생김생김도, 빛깔도 각각 다르다. 이 다름을 거리로 잰다면 막막할 뿐이다. 그러나 줄이 툭 끊어져 꿰어 있던 염주알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하더라도 각각의 염주알이 모감주나무 열매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 같음을 거리로 잰다면 지척(咫尺)이다.
오늘은 꽃바구니를 본다. 꽃바구니에는 여러 종류 여러 송이 꽃이 있다. 색색의 꽃들이 모여 화사한 생기와 화음(和音)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도 그처럼 이 세계에 있다. - 문태준<시인>
.................. 사람은 물론 식물, 동물도 자기 좋아하는 건 귀신같이 안다. 그리고 좋아해 주면 무언가를 반드시 돌려준다. 채소나 분재는 알뜰살뜰 가꾸면 잎들을 반들거리며 반긴다. 고양이나 개에게 따듯한 눈빛을 보내면 살랑살랑 따른다. 아기도 예뻐해 주면 좋아라 생글생글 웃음 다발을 건네준다. 텔레비전에서 보니 다친 새를 정성 들여 치료하고 길렀더니 새가 주인 어깨에 앉아 어디든 따라다녔다.
사람 관계도 좋아하기다. 좋아하면 좋아한다. 꽃들도 그러하네. 사람과 같네.
'예쁘다 해주니 향기를 내밀었다.' 사랑의 대가다.
꽃 철이다. 봄이 꽃들과 함께 왔다. 손잡고 왔다. 매화, 산수유 꽃들은 벌써 제 색깔과 향기를 받쳐 들고 사람들을 맞는다. 예쁜 계절이다. 복사꽃, 살구꽃과 온갖 꽃이 고운 꽃잎들을 들고 찾아올 것이다. 만나러 가야겠다. 찌든 마음에 위로와 향기를 얹어줄 것이니. - 박두순<동시작가>
.................... 꽃이 찬란한 것은 늙지 않기 때문이다. 필 때 다 써버리기 때문이란다. 꽃의 피 속에는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고, 말과 분별이 없기 때문이란다. 눈부신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찬란한 착란이다. '나의 노년은 피어나는 꽃입니다. 몸은 이지러지고 있지만 마음은 차오르고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문장이다. 늘, 지금을 탕진하는 것들은 황홀한 향기를 내뿜는다. 태양이 저물 때도 황홀한 이유다. 꽃 중의 꽃이라는 모란과 장미가 봄의 황혼을 향기롭게 하는 이유다.
모란이 지고 말았다, 이제 장미도 질 것이다. 늦게 핀 꽃이든 늦게까지 피어 있는 꽃이든 지금 탕진할 것이 남아 있다면, '다 써 버릴' 게 아직도 남아있다면, 당신은 여전히 그냥 한 꽃이다! 그러니, 피어 있을 때 꺾으라. 내일을 기다리지 말고 생의 장미를 오늘 꺾으라!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지금 장미를 따라'! - 정끝별<시인.이화여대 교수>
안동 살 땐 친한 친구가 툭하면 서울 가는 것 같더만 서울 와서 살아보니 그 친구 자주 안 오네
서울 와 살아보니 서울 친구들도 다 이해가 가네 내 안동 살 땐 어쩌다 서울 오면 술자리 시작하기 바쁘게 빠져나가던 그 친구들 그렇게 야속해 보이더니만 서울 살아보니 나도 술자리 시작하기 무섭게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보네
안동 어디 사과꽃 피면 술 마시자던 그 약속 올봄도 글렀네 사과꽃 내렸다는 소식만 날아드는 봄밤
.................. 안동에 살던 시인이 서울에 올라와 살면서 느끼는 소회가 남다르다. 안동에 살 땐 서울 친구들의 인심이 박해 보여서 섭섭하고 또 언짢더니 막상 서울에 와 살아보니 이해가 가더라는 것이다. 처해 있는 그 입장(立場)이 충분히 이해가 되어서 서운한 마음이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서울에 와 살아보니 빨리하도록 재촉하게 되고, 공대(恭待)하지 않고, 다정함이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봄밤 다 지나가기 전에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얼굴 보고 살 일이다. 봄 다 지나가고 사과꽃 다 내리기 전에 그동안의 일에 대해 말을 나누자. 서로에게 너무 늦지 않게, 무정하지 않게 곁을 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 문태준<시인>
........................... 꽃이 피어 세계가 한층 밝다. 온갖 꽃이 피어 이 세계가 화단 같다. 어떤 꽃은 일찍 피고, 또 어떤 꽃은 늦게 핀다. 그러나 각각의 그 꽃핌이 화단을 채색하고, 화단의 봄을 완성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꽃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그에게 있는 아름다운 침묵이다"고 썼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신은 큰 왕국에는 싫증을 내지만, 작은 꽃에게는 결코 싫증을 내지 않는다"고 썼다. 꽃 핀 것 조용히 바라보자. 하던 일 멈추고 오 분만 꽃을 바라보자. 우리들 가슴에도 그 빛깔과 그 향기로 벚꽃이 만개할 것이다. 꽃을 바라보는 순간에 우리들도 한 송이 벚꽃처럼, 목련처럼 근사해질 것이다.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다가올 미래를 미리 염려하지도 말자. 꽃만 바라보자. 꽃 보면 문득 그리운 사람 있으려니 꽃 피었다고 전화해 안부를 묻기도 하자. - 문태준<시인>
.......... 산에는 새로 나온 잎의 푸른빛이 짙다. 산사의 처마 끝에는 풍경을 달아 놓았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면서 풍경은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맑고 은은하다. 그 소리는 흰 사기그릇에서 나는 소리 같다. 그 소리는 살이 빠지고 몸이 말랐다. 욕정을 버렸으며 탁하지 않다. 마음을 허공처럼 비웠다. 헛된 말을 하지 않고 화려함을 버렸다. 깨끗한 달 같다.
그러므로 풍경 소리는 단조롭지만 거듭해서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끝까지 첫 마음 그대로다. 푸릇푸릇한 새날의 아침을 맞는 기분이다. '괴롭고 헛된, 허위와 허상에 매인 불량한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진실하여 마음이 흡족하게 살고 싶다'라고 쓴 시인의 문장을 이 시와 함께 읽는다 - 문태준<시인>
...................... 산은 꿈쩍도 않을 것 같은데 그 육중한 산이 지나간다고 썼다. 수면에 비친 산은 구름처럼 흐르고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무튼 산은 산객(山客) 혹은 산인(山人)처럼 물가에 앉아 세파를 씻어내려는 듯 귀를 씻는다.
귀를 씻은 후에 상반신을 아래로 굽혀 바닥에 대고 맑게 솟은 물을 마신다. 입안에서는 싱그러운 산의 냄새가 난다. 산에서 흘러나오는 향기는 어떤 것일까. 시인은 산을 '저 큰/ 비어 있는 사람'이라고 썼으니 산에서 흘러나오는 향기는 아마도 덜 욕심 부리고, 덜 분별하는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시인이 다른 시편에서 '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뿐'이라고 쓴 것처럼 봄 산에 들거든 생각과 말을 좀 줄여도 좋겠다. - 문태준<시인>
문득 들렀습니다 산 그림자 붉은 저녁 당신의 오래된 집도 꽃등을 달았더군요 어디쯤 걸어오실까 연신 바람은 보채고
서쪽 하늘 끝으로 무심히 흘러가는 잔약한 산새들을 보듬는 운판 소리 먼 길은 소리를 좇아 더듬어 갑니다
몇 소절 슬픔 뒤로 생각도 끊어지고 꽃잎은 너덜겅 위로 시나브로 떨어져서 저 붉은 이승의 한때 잠시 흔들리는
...................... 봄은 짧다. 아니 짧게 느껴지는 걸까. 인생의 봄처럼, 잠깐 스친 사랑처럼. 어쩌면 꽃철이라 더 그런지도 모른다. 봄꽃이 쉬 지듯, 빨리 떠난 아쉬움이 크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실 봄은 짧기도 하고, 점점 짧아지기도 한다. 온난화 속 꽃샘, 잎샘이 오락가락하다 여름이 들이닥치니 봄을 잃는 느낌이다.
그런 봄날, '산 그림자 붉은 저녁'에 문득 들른 '당신의 집'은 애틋한 수채화다. 바람만 연신 보채니 꽃등을 달아놓은 당신은 어디로 간 걸까. 무심히 '운판 소리' 뒤나 좇는 허한 그림자. 혹여 당신도 나를 찾아 나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어디쯤에서 엇갈렸는지…. 잠시 흔들리는 '이승의 한때'가 먼 산의 꽃구름같이 아슴아슴하다.
봄을 누리기도 전에 떠나보낸 어린 영혼들, 온천지가 다시 붉게 우는 봄날이다. - 정수자<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