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국향기
이남순
기우는 꽃빛 받아 가실하는 바람 속에
오래 참은 약속처럼 잘 익은 가을산에
뜨겁게 묻어둔 말이 등성이에 환하다
잡힐 듯 내달리는 저만치 시간을 따라
열일곱 혹은 열여덟, 볼이 붉던 그 시절에
한번쯤 맡았음직한 그 내음이 묻어난다
계절을 건너와서 깃을 치는 단풍처럼
내 허물도 벗어놓고 들국화에 들어볼까
달큼한 속살의 향내가 다시 나를 달군다
.................
깊어가는 가을 따라 산도 들도 잘 익어간다.
가을빛의 향연처럼 찬란한 단풍 가운데 감국(甘菊)도 제 빛을 조촐히 얹고 있다.
'가을의 향기'로 불릴 만큼 향기 짙은 감국은 지천으로 피어 가을 고샅을 오래 비추던 친근한 꽃이다.
그래선지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며 '군자의 꽃'으로 기려온 국화의 하나건만 감국은 똑 시골 소녀나 촌부 같은 느낌이다.
'오래 참은 약속처럼' 환히 핀 감국들.
'뜨겁게 묻어둔 말'로 '볼이 붉던 그 시절'을 데려온다.
베갯속 넣는다고 꽃을 따던 날도 있었던가.
항아리에 꽂으면 집안이 온통 노란 향기로 그윽했다.
들꽃은 거기 있어 들꽃이라고 이젠 함부로 데려오지 않지만 말이다.
바람도 가실(가을걷이)하는 날, 하루 잘 익으러 감국에게 간다.
- 정수자<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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