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풍경
박남준


 



겨울 햇볕 좋은 날 놀러가고 
사람들 찾아오고 
겨우 해는 드는가 
밀린 빨래를 한다 금세 날이 꾸무럭거린다 
내미는 해 노루 꽁지만하다 
소한대한 추위 지나갔다지만 
빨래줄에 널기가 무섭게 
버쩍버썩 뼈를 곧추세운다 
세상에 뼈 없는 것들 어디 있으랴 
얼었다 녹았다 겨울 빨래는 말라간다 
삶도 때로 그러하리 
언젠가는 저 겨울 빨래처럼 뼈를 세우기도 
풀리어 날리며 언 몸의 세상을 감싸주는 
따뜻한 품안이 되기도 하리라 
처마 끝 양철지붕 골마다 고드름이 반짝인다 
지난 늦가을 잘 여물고 그 중 실하게 생긴 
늙은 호박들 이 집 저 집 드리고 나머지 
자투리들 슬슬 유통기한을 알린다 
여기저기 짓물러간다 
내 몸의 유통기한을 생각한다 호박을 자른다 
보글보글 호박죽 익어간다 
늙은 사내 하나 산골에 앉아 호박죽을 끓인다 
문밖은 여전히 또 눈보라 
처마 끝 풍경소리 나 여기 바람 부는 문밖 매달려 있다고 
징징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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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태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슬퍼할 일을 마땅히 슬퍼하고
괴로워할 일을 마땅히 괴로워하는 사람. 


남의 앞에 섰을 때
교만하지 않고
남의 뒤에 섰을 때
비굴하지 않은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미워할 것을 마땅히 미워하고
사랑할 것을 마땅히 사랑하는
그저 보통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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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세 
       맹문재

 



집에 가야 할 시간이 훨씬 지난 술집에서
싸움이 났다
노동과 분배와 구조조정과 페미니즘을 안주삼아...
말하는 일로 먹고 사는 사람들과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개새끼들, 놀고 있네
건너편 탁자에서 돌맹이 같은 욕이 날아온 것이다


갑자기 당한 무안에
그렇게 무례하면 되느냐고 우리는 점잖게 따졌다
니들이 뭘 알아, 좋게 말할 때 집어치워
지렛대로 우리를 더욱 들쑤시는 것이였다
내 옆에 동료가 욱 하고 일어나
급기야 주먹이 오갈 판이었다


나는 싸워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단단해 보이는 상대방에게 정중히 사과를 했다
다행이 싸움은 그쳤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굽실거린 것일까
너그러웠던 것일까
노동이며 분배를 맛있는 안주로 삼은 것을 부끄러워 한 것일까


나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싸움이 나려는 순간
사십세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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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혁

 



그대와 나 사이에 밥솥을 걸고
조금 기다린다.
지난여름을 울어 주던
뻐꾸기 소리를 생각하며
조금 더 기다린다,
기다림이 익기를.
생활은 양식과 같다고
밥솥에게 말하며
각자의 가슴에게 던지며
차가운 겨울엔
지난여름의 매미를 생각한다.
소낙비처럼 쏟아지던
사랑을.



 .......................
밥이 다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사랑도 익기를 기다려야 한다. 
뜸을 들이듯이 한동안 가만히 있어야 한다. 
가슴이 추운 때에는 지난여름의 때를 떠올려보는 것도 좋다. 
지난여름의 하늘을 울어주던 뻐꾸기 소리와 소낙비처럼 쏟아지던 매미의 울음소리를 떠올려보는 것도 좋다.


열매나 씨가 여물기를 가을의 끝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사랑도 여물기를 기다려야 한다.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사랑도 무르익기를 기다려야 한다. 
시인은 시 '사랑의 노래'에서 "사랑은 가슴속 스케치"이며 "사랑은/ 멀리 깨끗한 하늘이 되기를"이라고 썼다. 
가슴속에 그린 첫 그림이 사랑이요, 만월(滿月)처럼 멀리 깨끗하게 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또한 사랑은 영혼의 허기를 채워주는 밥이다.(151221)
-문태준<시인>

 

 

 

 

 

 

 

 

 

장작
    정경화

 



그대에게 가는 길은
내 절반을 쪼개는 일
시퍼런 도끼날이
숲을 죄다 흔들어도
하얗게 드러난 살결은
흰 꽃처럼 부시다


그대 곁에 남는 길은
불씨 한 점 살리는 일
바람이 외줄을 타는
곡예 같은 춤사위에
외마디 비명을 감춘 채
아낌없이 사위어 간다


그대 안에 이르는 길은
기어이 재가 되는 일
화농으로 굳은 상처
달빛으로 닦다 보면
비로소 쌓이는 적멸,
솔씨 하나 묻는다

 


 .................. 
추위가 벌써부터 시퍼렇다. 
겨울 채비에 바쁠 때 덜 마른 나무라도 많이 쪼개야 했다. 
나무 때던 시절 얘기지만, 뒤란이며 마당귀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장작은 겨울 양식같이 든든했다. 
나무들 속살이며 무늬도 향기롭고 아름다웠다. 
지금은 절 마당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런 장작은 불이요 꽃이다. 
보고 있으면 모닥불 추억처럼 온몸이 뜨거워진다. 
그래서 '그대에게 가는 길'과 '그대 곁에 남는 길'과 '그대 안에 이르는 길'이 장작불로 다 모이는가. 
'절반을 쪼개'고 '불씨 한 점'을 살려내서 '기어이 재'가 되는 길. 
그런 전소(全燒)의 깨끗한 사랑도 있지만 장작은 군고구마의 구수한 추억도 주었다. 
찬바람 드셀수록 장작불 함께 쬐던 벗들이며 군고구마 같은 마음들이 그립다.(131129)
- 정수자<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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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을 멈추고

                     나희덕                

 


 

 
그 나무를 
오늘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어제의 내가 삭정이 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이십 년 후에 내가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것 같아 
한쪽이 베어져 나간  나무 앞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덩굴손이 자라고 있는 것인지요
내가 아니면서 나의 일부인,
나의 의지와는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자라나
나를 온통 휘감았던 덩굴손에게 낫을 대던 날,
그해 여름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을 용서한 것도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릅니다
덩굴자락에 휘감긴 한쪽 가지를 쳐내고도
살아있는 저 나무를 보세요
무엇이든 쳐내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그해 여름, 그러나 이렇게 걸음을 멈추는 것은
잘려나간 가지가 아파오기 때문일까요
사라진 가지에 순간 꽃이 피어나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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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


                         이호광

 

 

 



참 가련한 일이다.

서로 괴롭히기 위해 사람이 되어
적(適)을 만들기 시작한 우리는.
서로 슬퍼하기 위해 사람이 되어
눈물을 만들기 시작한 우리는.

만약
사람과 사람 사이를
한 열흘쯤 비워 둘 수 있다면
나는 거기서
아무것도 아니고 싶다.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니고 싶다.

참 가련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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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늦가을 꽃의 마알간 낯바닥을
한참을 쪼그려 앉아 본다
벌들이 날아든 흔적은 없고
햇살과 바람만이 드나든 흔적이 숭숭하다
퇴적된 가루 분분한 홀몸에 눈길이 가고
나도 혼자라는 생각이 정수리에 꼼지락대는 순간,
꽃 속 꽃이 내어준 자리에 뛰어들었다.
혼자 고요한 꽃은,
누군가 뛰어든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한 꽃은
순간 화들짝 놀랐지만
나도 저도 이내 맑아졌다
곁이리라
화엄(華嚴)이리라

 



................
맑은 낯을 한 꽃이 있다. 
생명들의 기운이 점차 쇠락해지는 늦가을에 꽃의 얼굴을 본다. 
그 어떤 것도 탐하지 않아 아주 고요한 내면으로 꽃은 있다. 
자기를 잘 제어하면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넉넉하다고 느끼면서 꽃은 있다. 
호수의 수면과도 같은 꽃의 조용하고 잠잠한 내부로 시인이 들어간다.
들어간다는 것은 마음이 이끌려 이동한다는 뜻이다. 
이끌려 눈길을 주고받고, 내심(內心)을 나눈다는 뜻이다.


홀로 지내느라 누군가를 수용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 다소 놀람이 없지 않았겠지만 꽃은 시인에게 곁을 허락한다. 
그리고 다시 애초의 평온하고 깨끗하고 수수한 낯으로 돌아간다. 
이런 사귐이라면 상스럽지 않다. 이 꽃과 같은 영혼의 맑음과는 사귀고 싶다. 
- 문태준<시인>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


                                  유홍준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는
둥글다네

나는 그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를 좋아한다네

사람이 사람을 앉히고 발톱을 깎아준다면
정이 안 들 수가 없지
옳지 옳아 어느 나라에선
발톱을 내밀면 결혼을 허락하는 거라더군
그 사람이 죽으면 주머니 속에 발톱을 넣어 간직한다더군

평생 누구에게 발톱을
내밀어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

단 한번도 발톱을 깎아주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

발톱을 예쁘게 깎아주는 사람은
목덜미가 가늘고
이마가 예쁘고 속눈썹이 길다더군 비가 오는 날이면
팔베개도 해주고 지짐도 부쳐주고 칼국수도 밀어준다더군
그러니 결혼을 안 할 수가 있겠어
그러니 싸움을 할 수가 있겠어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는
고양이에 가깝고
공에 가깝고
뭉쳐놓은 것에 가깝다네 그는 가장 작고 온순하다네

나는 그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를 좋아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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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江)
      구광본

 



 

혼자서는 건널 수 없는 것.

오랜 날이 지나서야 알았네.

갈대가 눕고 다시 일어나는 세월,

가을빛에 떠밀려 헤매기만 했네.

한철 깃든 새들이 떠나고 가면

지는 해에도 쓸쓸해지기만 하고

얕은 물에도 휩싸이고 말아

혼자서는 건널 수 없는 것.

 

 


......................
구광본(1965- ) 시인. 대구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6년 “검은 길”로 등단. 1987년 시집 <강>으로 제11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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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다는 것은 


                 이정하

 



그립다는 것은
아직도 네가
내 안에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지금은 너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볼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내 안 어느 곳에
네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너를
샅샅이 찾아내겠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가슴을 후벼파는 일이다
가슴을 도려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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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고현혜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대 집에
죽어가는 화초에 물을 주고
냉기 가득한 그대 부엌
큰솥을 꺼내 국을 끓이세요.
어디선가 지쳐 돌아올 아이들에게
언제나 꽃이 피어 있는
따뜻한 국이 끓는
그대 집 문을 열어주세요.
문득 지나다 들르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당신 사랑으로 끓인 국 한 그릇 떠주세요.
그리고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사람
목숨 바쳐 사랑하세요.

 



.................
고현혜 시인은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면서 영어와 한국어로 시를 쓴다. 
그는 시 '전업주부 시인'에서 "이제 시 쓰는 것보다/ 밥하는 게 더 쉬워요// 서점에서 서성이는 것보다/ 마켓에서 망설이는 시간이 더 길고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최근에 펴낸 그녀의 시집을 보니 모국어로 쓴 시편들이 높고 따뜻하고 특별하게 섬세하다.


이 시에서 시인은 사랑이 넘치는 집을 꿈꾼다. 
화초가 싱싱하게 되살아나고, 부엌에는 온기가 가득한 그런 집을 꿈꾼다. 
가족에게 따뜻한 국을 끓여 차려주는 사랑의 행위는 외로운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진다.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사람/ 목숨 바쳐 사랑하세요."라고 쓴 시구(詩句)를 읽는 순간 "그녀의 하얀 팔이/ 내 지평선의 전부였다"라고 짧게 쓴 막스 자코브의 시 '지평선'이 떠올랐다. 
때로 우리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잊고 살기도 한다.(150824)
-문태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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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권오범

 

 



육신의 안녕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자리라서 
청렴결백하게 옥석을 가리라고 
조물주가 지정해준 음식물 들머리 엄지가락 



볼 수 없어 
짐작만으로 더듬거리지만 
한번 경험한 맛은 
숟가락 놓을 때까지 기억하리라 



척척한 굴속에 갇혀 
평생 누워지내려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그리하여 바깥일까지 참견하고 싶은 것이다 



하여간 참을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침묵훈련을 시켜야 한다 
까딱하면 묘혈을 파는 
간사하기 그지없는 것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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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나무에게  


              최영희

 




한줄기 
소낙비 지나고 
나무가 
예전에 나처럼 
생각에 잠겨있다 


8월의 
나무야 
하늘이 참 맑구나 


철들지, 
철들지 마라 


그대로, 
그대로 푸르러 있어라 


내 모르겠다 


매미소리는 
왜, 저리도 
애처롭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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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담쟁이
           강현덕

 




동그랗게 꿈을 말아

안으로 접을래



빠알간 흙벽 속으로

자꾸 말아 넣을래



다져서 쌓은 꿈들이

사방으로 터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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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수
   임성규



어디로 흘러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네
모든 바람이 저 숲으로
가라고 말했지만
믿을 건 아무것도 없다고
고개를 저었네.


바닥에 맨발로
서 있던 날도 많았지
독수리가 허공을
빙빙 도는 빈들에서
내 마음 움푹 패도록
그대를 생각하네.



..............
낙수에 하염없이 취하던 때가 있었다. 
아무것도 못 하는 무기력에 나른히 빠진 채 비나 바라보던 시절, 시골집의 낙수는 지음(知音) 같았다. 
초가든 기와든 지붕을 아는 낙수는 비의 굵기에 따라 리듬을 달리 한다. 
그 중에도 처마 끝을 한참씩 잡고 있다 마침내 떨어지는 투신들! 
투명한 망울 속에는 더 아슬하니 영롱한 풍경이 맺히다 지곤 했다. 
우두커니 마루에서 낙수로 먼 편지를 적기도 했다.


'어디로 흘러야 할지' 알 수 없는 날이 길어지는 즈음이다. 
'모든 바람이' 가라는 숲도 믿을 수가 없다니 장마 같은 막막함에 갇혔던가. 
닿을 수 없는 그리움 때문인지 '독수리가 허공을/ 빙빙 도는 빈들에서'도 발을 떼지 못 하니 속울음도 꽤나 우묵하겠다. 
그렇게 '움푹 패도록/ 그대를 생각'한 게 언제인지, 낙수 잘 듣는 옛 처마 밑에 들고 싶은 때다. 
그저 하염없이 낙수나 봐도 좋으려니.
정수자<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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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구나
         전다희

 

 




내가 너를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나를 선택했구나


내가 너를 가르치려 들었는데 
네가 나를 가르쳤구나


나는 네게 부족하다 생각하건만 
너는 내가 다 주었다 하는구나


나는 네게 주고 있는 줄 알았건만 
네가 내게 많은 것을 주고 있었구나 

 

부모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나를 부모로 만들었구나
참으로 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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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놈
     이진수

 

 




비암이 우에 센지 아나

내사마 모르겠다 우에 센 긴데

참 말 모르나 그 놈이 센 거는

껍데기를 벗기 때문인기라 

문디 자슥 껍데기 벗는 거하고

센 거하고 무신 상관이가

와 상관이 없다카나 니 들어 볼래

일단 껍데기를 벗으모 안 있나

비얌이 나오나 안 나오나

나온다카고 그래 씨부려 봐라

그라모 그기 껍데기가 진짜가

시상 새로 나온 비얌이 진짜가

문디 시방 내를 바보로 아나

그기야 당연지사 비얌이 진짜제 

맞다 자슥아 내 말이 그 말인기라

껍데기 벗어던지고 진짜 내미는 놈

그런 놈이 센 놈 아니겠나

넘 몰래 안창에다 진짜 감춘 놈

그런 놈이 무서븐 거 아이겠나

어떻노 니캉 내캉 홀딱 벗어 뿔고

고마 확 센 놈 한번 돼 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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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지오 칸타빌레 

                            나호열

 

 

 



돌부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자주 넘어졌다
너무 멀리 내다보고 걸으면 안돼
그리고 너무 빨리 내달려서도 안돼
나는 속으로 다짐을 하면서
멀리 내다보지도 않으면서
너무 빨리 달리지도 않았다
어느 날 나의 발이 내려앉고
나의 발이 평발임을 알게 되었을 때
오래 걸을 수 없기에 
빨리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 앞에서 오래 걸을 수도 
빨리 달릴 수도 없는 나는 느리게
느리게 이곳에 당도했던 것이다
이미 꽃이 떨어져버린 나무 아래서
누군가 열매를 거두어 간 텅 빈 들판 앞에서
이제 나는 내 앞을 빨리 지나가는 음악을 듣는다
느리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인가
아름다운 것들은 느린 걸음을 가진 것인가
느리게 걸어온 까닭에
나는 빨리 지나가는 음악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긴 손과 긴 머리카락을 가진 음악의 눈망울은
왜 또 그렇게 그렁그렁한가
아다지오와 칸타빌레가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강물의 악보가 얼마나 단순한가를 생각한다 
강물의 음표들을 들어올리는 새들의 비상과
건반 위로 내려앉는 노을의 화음이
모두 다 평발임을 깊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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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가 모르는가

                    이세방

 





사람이 인생을 지쳐가다 보면
가끔씩 후회를 하게 마련인데

 


그 후회라는 걸
하지 않겠다고 다짐들을 하지만

 


아는가, 큰 욕심을 버린다면
후회는 다른 사람의 것이 될 걸.

 


모르는가, 깨달음은 어디서 오나
밤이 지나야 아침이 온다는 것을


 

 

 

 

 

 

 

 

 

길 
김명인

 

  


길은 제 길을 끌고 무심하게 


언덕으로 산모퉁이로 사라져가고 


나는 따라가다 쑥댓닢 나부끼는 방죽에 주저앉아 


넝마져 내리는 몇 마리 철새를 본다 


잘 가거라, 언덕 저켠엔 


잎새를 떨군 나무들 


저마다 갈쿠리 손 뻗어 하늘을 휘젓지만 


낡은 해는 턱없이 기울어 서산마루에 있다 


길은 제 길을 지우며 저물어도 


어느 길 하나 온전히 그 끝을 알 수 없고 


바라보면 저녁 햇살 한 줄기 금빛으로 반짝일 뿐 


다만 수면 위엔 흔들리는 빈 집일 뿐 

 

 

 

 

 

 

 

 

 

소주 한 병이 공짜 


                     임희구


 




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막 피어나려는 싹수를 

이렇게 싹둑 베어내도 되는 것인가

짧은 순간 만상이 교차한다

술을 끊으면 술과 함께 덩달아 

끊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한둘이 어디 그냥 한둘인가

세상에 술을 공짜로 준다는데

모질게 끊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있는가 

불혹의 뚝심이 이리도 무거워서야 

나는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걸

저 감자탕 집이 이 세상이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가자, 호락호락하게

 

 

 



 

 

 

 

자연에 대한 예의 


                       권정우

 

 





발이 만든 길로 다니기

신을 벗고 길을 건너기

강을 만나면 뒤돌아 가거나 머물거나 배로 지나기

높은 산이 보이면 돌아가거나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 걷기

계절을 거스르지 않기

생이 다한 뒤에도 자연에 남는 거니까

사는 날에 집착하지 않기

 

 

 

 

 

 

 

 

 

 

 

6월의 달력
           목필균

 






한 해 허리가 접힌다.


계절의 반도 접힌다.


중년의 반도 접힌다.


마음도 굵게 접힌다.

 



동행 길에도 접히는 마음이 있는 걸,


헤어짐의 길목마다 피어나던 하얀 꽃.


따가운 햇살이 등에 꽂힌다.

 

 

 

 

 

 



 

 

 

 

산낙지를 위하여

                   정호승 


 




신촌 뒷골목에서 술을 먹더라도

이제는 참기름에 무친 산낙지는 먹지 말자

낡은 플라스틱 접시 위에서

산낙지의 잘려진 발들이 꿈틀대는 동안

바다는 얼마나 서러웠겠니

우리가 산낙지의 다리 하나를 입에 넣어

우물우물거리며 씹어 먹는 동안

바다는 또 얼마나 많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겠니

산낙지의 죽음에도 품위가 필요하다

산낙지는 죽어가면서도 바다를 그리워한다

온몸이 토막토막 난 채로

산낙지가 있는 힘을 다해 꿈틀대는 것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바다의 어머니를 보려는 것이다 

 

 

 

 

 







 

 

 

 

죽도록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말이

김재진


 



  

돌 틈을 비집고 나온 제비꽃

길가에 앉아

반쯤 허리가 접혀 있는 민들레

기어다니는 벌레와 조그만 새들

서 있는 나무와 조용한 햇빛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 없어라.

한 고비 넘기고 세상을 보면

모든 것 다 신기한 것밖에 없어라.

죽도록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 말이

한 순간에 다 부질없어라.

껴입던 옷 벗어 바람에 내다걸 듯

모든 것 훨훨 벗어버리고 싶어라.

텅 빈 채 다 받아들이고 싶어라.


 

 

 

 

 

 

 

 

 

 

오월이 오면
             김용호





무언가 속을 흐르는 게 있다.

가느다란 여울이 되어

흐르는 것.



이윽고 그것은 흐름을 멈추고 모인다.

이내 호수가 된다.

아담하고 정답고 부드러운 호수가 된다.

푸르름의 그늘이 진다.

잔 무늬가 물살에 아롱거린다.



드디어 너, 아리따운

모습이 그 속에 비친다.

오월이 오면

호수가 되는 가슴.



그 속에 언제나 너는

한 송이 꽃이 되어 방긋 피어난다.

 

 

 

 

 

 

 

 

 

 

 

 

 

이팝꽃 시간
              윤채영

 



여남은 살 넘어가던 옥포면 다리목
발 빠른 트럭에게 길 먼저 내어주고
넉넉히 안으로 휘어진 논둑길 걷는다


길섶은 서툰데 마중 나온 유년 봄빛
자운영 꽃대 위로 꽃비 연신 내려앉고
명치 끝 툭, 치고 가는 굵은 바람 한 줄기


이팝꽃 휜 가지가 옛 기억 줄을 내려
아슴아슴 내려간다, 고치 같은 유년의 뜰
이적지 색 바래지 않은 종이배 몇 척 같은

 

 

 

 


 ......................
이팝꽃이 한창이다. 
가로수로 가꾸는 도시도 있어 벚꽃 후의 거리가 한참 동안 또 환하다. 
이팝꽃을 보고 있으면 왠지 흐뭇하다. 
흰쌀밥을 그것도 고봉으로 받은 것처럼 넉넉해진다. 
조팝꽃은 잘고 푸석한 조밥 느낌의 안쓰러움이 있는데, 이팝꽃은 신수 훤히 핀 사람처럼 헌걸차게 듬직하다.


'마중 나온 유년 봄빛'도 그래서 더 '아슴아슴' 눈부셨을 거다. 
꽃도 고봉이라 '휜 가지'에 기대 돌아보는 '유년의 뜰'도 하얗게 빛났을 거다. 
쌀밥 추억은 옛이야기가 됐지만, 기름기 자르르한 햅쌀밥의 보얗고 보드라운 식감은 여전히 일품이다. 
그러니 이팝꽃 아래 서면 '이적지 색 바래지 않은 종이배 몇 척 같은' 시간도 얻나 보다. 
이팝꽃길로 걸어간 봄날, 어느 섶을 또 아슴아슴 피우려나.
-정수자<시조시인>

 

 

 

 

 

 

 

 

 

 

5월의 노래
            김명수

 





아카시아 향기 짙은 5월이 오면


새벽부터 숲 속에서 소쩍새 울고


뒤따라 뻐꾹뻐꾹 뻐꾸기 소리


한낮에는 보리밭에 종달새 소리.


모를 낸 들판엔 모가 파랗고


이삭 팬 보리밭엔 훈풍이 불어


보리밭은 물결 이뤄 남실거리고


산 속에선 구구구 산비둘기 소리


저녁이면 쏙속쏙속 쏙독새 소리


산 속에서 울어 주는 쏙독새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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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편지 
             오순화

 




꽃이 울면 하늘도 울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아시나요
꽃이 아프면 꽃을 품고 있는
흙도 아프다는 것을 
그대는 아시나요



꽃이 웃으면 하늘도 웃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아시나요 
꽃이 피는 날 꽃을 품고 있는 
흙도 헤죽헤죽 웃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아시나요



맑고 착한 바람에
고운 향기 실어보내는 하늘이 품은 사랑
그대에게 띄우며
하늘이 울면 꽃이 따라 울고
하늘이 웃으면 꽃도 함께 웃는 봄날
그대의 눈물 속에 내가 있고
내 웃음 속에 그대가 있음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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