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찬(晩餐) 
              함민복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 

 

반찬이 강을 건너왔네 
당신 마음이 그릇이 되어 
햇살처럼 강을 건너왔네 

 

김치보다 먼저 익은 
당신 마음 
한 상 

 

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 

 

 

 

 

 

 

 

 

 

 

 

 

서시(序詩)
              이성복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
내가 읽은 서시 중에 가장 아름다운 서시. 
시집 ‘남해 금산’의 첫머리에 나오는 시인데, 젊은 날 이성복 시인의 날카로운 감수성과 순수한 열정이 우리를 긴장시킨다. 
그냥 그렇고 그런 상투적인 표현이 거의 없고, 쉬운 듯 어렵고 어려운 듯 쉬운 시다. 
‘늦고 헐한’ 저녁. 싸구려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은 시인은 사랑을 (혹은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며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를 걷는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이 거리는 내게 낯설다.

그는 공감각적 심상에 아주 능한 시인이다. 
2연의 3행을 보라. ‘새소리’(청각)가 ‘번쩍이며’(시각) 흘러내리고… ‘몸 뒤트는 풀밭’이라니. 
참으로 창의적이며 애절한 묘사 아닌가. 
그의 시는 마치 움직이는 그림 같다. 
사랑이라는 진부한 감정을 이토록 새롭게 역동적으로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시인의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사랑을 갈구하는 불안한 청춘의 어느 저녁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눈물이 난다.
-최영미<시인.이미출판 대표>

 

 

 

 

 

 

 

 

낙서(落書)
            김종제
 



담벼락 같은 세상에 
누가 아무렇게나 갈겨 쓴 
글 같은 것들 
너를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제멋대로 그려 놓은 
기호나 부호 같은 것들 
아무도 해석할 수 없게 써 놓은 
암호 같은 것들 
눈 앞에 
저렇게 가득히 서 있는 것들 
나무 빼곡하게 들어선 숲 같은 것들 
물 가득 흐르는 강 같은 것들 
그 위로 날아가는 새들 
그 속으로 헤엄치는 물고기들 
지상에 누가 함부로 풀어 놓은 것들 
예고도 없이 흩날리는 눈발 같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같은 
뜨고 지는 일월(日月)이나 
변함없는 천지(天地) 같은 것들 
지울 수 없게 
아로새긴 *연비(聯臂) 같은 것들 
두 다리로 걸어가는 것들 
네 다리로 달려가는 것들 
대지를 돌아다니며 낙서하는 것들 
동굴 같은 세상에 
너를 갖고 싶다고 원한다는 
말 대신에 
손으로 발로 마음으로 
그려 놓은 무늬같은 것들 


*연비(聯臂) - 사랑하는 남녀끼리 몸의 은밀한 부분에 하는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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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표를 끊으며

                      이정록

 

 



장항선에는 광천 역과 천안 역이 있는데요 
광천에는 신랑동이 있고요 천안에는 신부동이 있어요  
 

상행과 하행을 반복하는 지퍼의 손잡이처럼 
그들 사이에 열차가 오르내리는데요 
이들 둘의 사랑을 묶고 있는 장항선은 
신부의 옷고름이자 신랑의 허리띠인 셈이지요  
 

그런데 천안역은 이 땅 어디로든 풀어질 수 있구요 
광천역은 오로지 신부동의 옷고름만 바라볼 뿐이지요 
안타까운 신랑의 마음저림으로 
광천 오서산의 이마가 백발의 억새 밭이 되고요 
토굴 새우젓이 끄느름하게 곰삭는 것이지요  
 

다른 역들은 잠깐만에 지나치지만, 천안역에서는 
한참을 뜸들이며 우동국물까지 들이켜는 기다림을 
신부가 알까요 호두과자처럼 작아지는 신랑의 거시기를 말이에요  
 

광천에는 신랑동이 있구요 
천안에는 신부동이있지요 
그 사이에는요 신혼여행지로 알맞은 온천이 있구요 
예산에 가면 사과알 같은 부끄러움 주렁주렁하지요  
 

수없이 오르내리는 마음이 절어서 
선로에 검붉은 돌이 쏟아지지요 
그 돌들이 다 사랑인 것을 
철로 옆 소나무도 알고 있지요  
 

억새꽃이 부케처럼 피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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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담 (閑談) 
            이응관


인간사 어느 구석에 
불 사르지 않고 일궈낸 밭이 있었던가. 
쓰러지고 일어서는 
세월의 숨결 또한 그렇지 않던가. 
그러나 불 태움도 증오라네. 
정열로 위장된 파멸이라네. 
사랑으로 가장한 미움이라네. 
보게 
구름밭 갈고 
새 깃 흔적 무심히 지우는 허공의 넉넉함과 
탁류 안고 더욱 깊어 가는 
저 창해의 푸른 살림살이는 어떤가. 



새삼 놀랄 일도 아닌 
바로 이런 살림을 
어디 마음만 낸다고 아무나 하는 짓들인가. 
이런 일은 
큰 사람이, 
아주 큰 사람이 
천태산쯤에 토굴 파고 
화전 일구어 감자 먹고 
낮잠 자다가 홀연히 깨어 
흙벽 바라보고 싱긋이 웃으며 
혼자서 
암, 혼자서 
마쳐버릴 살림살이지

 

 

 

 

 

 

 

 

 

묵집에서
         장석남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나는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오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읍내 형수 
    송경동

 



소전으로 가는 길목 
이십년째 잡화를 하는 신세계슈퍼 이층에 
단란주점을 낸 소연이가 
내 첫사랑이다. 지금은 
만리장성이라는 중국집을 냈지만 
장터 포주집 아들로 
내가 성, 성 하며 쫓아다니던 
어릴 적엔 순 건달로, 내게 그짓은 
콩알을 넣고 해야 제맛이라고 가르쳐주던
덕기형과 결혼한 그 친구가 
내 첫사랑이다. 나와 내 친구와 
또 한 친구까지를 관통하고 다녀 
지금껏 팽팽한 삼각을 유지해주는 
그 피멍 같은 계집 


장성 어느 재에서 한번만 주라고 
한번만 주라고 탱탱 부은 내 보람을 
개새끼야 개새끼야 하고 밀쳐내던 그 
콩닥숨 단내가 탱자내음 같던 가시내 
왜 남들은 다 줘놓고 나만 안 주냐고 
열두 시간 비지땀 애걸해도 
니가 봤냐 니가 봤냐며 
꼬막처럼 닫힌 속살 열지 않던 
짜디짠 
벌교 가시내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제는 더이상 소녀가 아닌 
내 첫사랑. 선거 때면 
똘마니들 동원도 한몫하고 
재 너머 읍내로 들어오는 모든 정보와 
누구누구의 신장개업 구상까지도 
환히 꿰는 영민한 읍내 형수 
찾아가면 원없이 술 내주고 
처진 가슴 부벼 날 꼬일 줄도 아는 
그 희한한 내 첫사랑


지금도 홍계리 그 외등은
벌겋게 타오르고 있을까
장미꽃 넝쿨처럼 가시를 치며 담을 넘던
세 자매의 웃음소리
가쁜 숨쉬며 나는 어디쯤 달려 왔는가
굉음처럼
지나가버린 세월
긴 밤내 썼던 편지를 쫙쫙 찢어 날리던
그 철로변 
꽃잎들은 다 날아갔을까

 

 

 



 

 

 

 

떠나거나 머물거나 


                          박승미

 

 


집채만한 고래도

난파 당한다는 걸

장생포에 와서 처음 알았다

쇠가죽 구두에 발을 밀어 넣고

세상을 헤매다 보면

구두에 납치당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고래도 바닷물 속에 떠밀리다 보면

난파라도 당하고 싶었던 게지

물결에 밀리고 밀려

포구에 정착하고 싶었던 게지

유화공단 부둣가에서

축제라도 열린 듯

난파 고래를 잡던 날

큰 칼잡이, 작은 칼잡이들이

고래를 해체할 때

소금기에 절은

쇠가죽 구두 속에서

나를 빼내고 싶었다

발가락을 바닷바람에 말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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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편지
           박세현

 

 



첫눈을 맞으며 
세상의 나이를 잊으며 
저벅저벅 당신에게 걸어가 
기다림의 사립문을 밀고 싶습니다 


겨울밤 늦은 식사를 들고 있을 당신에게 
모자를 벗고 정중히 인사하고 싶습니다 


우리들 해묵은 안부 사이에 
때처럼 곱게 낀 감정의 성에를 
당신의 잔기침 곁에 앉아 녹이고 싶습니다 


부당하게 잊혀졌던 세월에 관해 
그 세월의 안타까운 두께에 관해 
당신의 속상한 침묵에 관해 
이제 무엇이든 너그러운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첫눈을 맞으며 
세상의 나이를 잊으며 
저벅저벅 당신에게 걸어가 
당신의 바람벽에 등불을 걸고 싶습니다 

 


............................
1953년 강원도 강릉 출생  
관동대 국어교육학과와 한양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문학박사  
1983년 [문예중앙]에 시 <오랑캐꽃을 위하여>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꿈꾸지 않는 자의 행복>, <길찾기>, <오늘 문득 나를 바꾸고 싶다>,
<정선 아리랑>, <치악산>, <사경을 헤매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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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집 한 채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

매일매일을 숨차게 달려왔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홀연 길을 잃고 세상과 두절되고 싶어진다.

열두 고개 넘어 맹수와 금강소나무와 산양이 산다는 경상북도 최북단 울진군 북면 두천리쯤의 태백 숲길이었으면 좋겠다.

무릎이 꺾인 채 길과 시간과 세간의 슬픔을 비껴 너와집 한 채처럼 주저앉고 싶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마침내 돌아가는 길마저 지우고 싶다.

첩첩의 농담으로 둘러싸인 능선 뒤편으로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지도에도 없는 '강원남도 두천'이라는 곳, 누군들 한 번은 꿈꿔보지 않았을까.
- 정끝별<시인.이화여대 교수>

 

 

 

 

마디
  김창균
 

 


 
돌아돌아 강진 어디쯤이었던가
청대 숲에 든 적이 잇다.
그때, 그때였지
그대의 손마디와 내 손마디가 서로를
아슬하게 잡고 걸었던 오래된 길
손 잡고 걷는 길은 늘
한 사람의 마음을 접는 것이어서
마디마다 힘주어 산 저들의 속을 닮아
마음 주는 사람은 속이 궁글고
많은 가지 중 하늘 택해
중심을 잡는 저들 앞에 서서
내가 선택해 걸었던 길들을
되짚어본다.
 

한 번 금 가면
발끝까지 쪼개지는 마음과
휘지 않는 말들도
내 앞에 앉혀보는 저녁
끄끝내
당신의 손마디가 아프게 부푸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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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풍경
박남준


 



겨울 햇볕 좋은 날 놀러가고 
사람들 찾아오고 
겨우 해는 드는가 
밀린 빨래를 한다 금세 날이 꾸무럭거린다 
내미는 해 노루 꽁지만하다 
소한대한 추위 지나갔다지만 
빨래줄에 널기가 무섭게 
버쩍버썩 뼈를 곧추세운다 
세상에 뼈 없는 것들 어디 있으랴 
얼었다 녹았다 겨울 빨래는 말라간다 
삶도 때로 그러하리 
언젠가는 저 겨울 빨래처럼 뼈를 세우기도 
풀리어 날리며 언 몸의 세상을 감싸주는 
따뜻한 품안이 되기도 하리라 
처마 끝 양철지붕 골마다 고드름이 반짝인다 
지난 늦가을 잘 여물고 그 중 실하게 생긴 
늙은 호박들 이 집 저 집 드리고 나머지 
자투리들 슬슬 유통기한을 알린다 
여기저기 짓물러간다 
내 몸의 유통기한을 생각한다 호박을 자른다 
보글보글 호박죽 익어간다 
늙은 사내 하나 산골에 앉아 호박죽을 끓인다 
문밖은 여전히 또 눈보라 
처마 끝 풍경소리 나 여기 바람 부는 문밖 매달려 있다고 
징징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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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태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슬퍼할 일을 마땅히 슬퍼하고
괴로워할 일을 마땅히 괴로워하는 사람. 


남의 앞에 섰을 때
교만하지 않고
남의 뒤에 섰을 때
비굴하지 않은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미워할 것을 마땅히 미워하고
사랑할 것을 마땅히 사랑하는
그저 보통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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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세 
       맹문재

 



집에 가야 할 시간이 훨씬 지난 술집에서
싸움이 났다
노동과 분배와 구조조정과 페미니즘을 안주삼아...
말하는 일로 먹고 사는 사람들과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개새끼들, 놀고 있네
건너편 탁자에서 돌맹이 같은 욕이 날아온 것이다


갑자기 당한 무안에
그렇게 무례하면 되느냐고 우리는 점잖게 따졌다
니들이 뭘 알아, 좋게 말할 때 집어치워
지렛대로 우리를 더욱 들쑤시는 것이였다
내 옆에 동료가 욱 하고 일어나
급기야 주먹이 오갈 판이었다


나는 싸워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단단해 보이는 상대방에게 정중히 사과를 했다
다행이 싸움은 그쳤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굽실거린 것일까
너그러웠던 것일까
노동이며 분배를 맛있는 안주로 삼은 것을 부끄러워 한 것일까


나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싸움이 나려는 순간
사십세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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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혁

 



그대와 나 사이에 밥솥을 걸고
조금 기다린다.
지난여름을 울어 주던
뻐꾸기 소리를 생각하며
조금 더 기다린다,
기다림이 익기를.
생활은 양식과 같다고
밥솥에게 말하며
각자의 가슴에게 던지며
차가운 겨울엔
지난여름의 매미를 생각한다.
소낙비처럼 쏟아지던
사랑을.



 .......................
밥이 다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사랑도 익기를 기다려야 한다. 
뜸을 들이듯이 한동안 가만히 있어야 한다. 
가슴이 추운 때에는 지난여름의 때를 떠올려보는 것도 좋다. 
지난여름의 하늘을 울어주던 뻐꾸기 소리와 소낙비처럼 쏟아지던 매미의 울음소리를 떠올려보는 것도 좋다.


열매나 씨가 여물기를 가을의 끝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사랑도 여물기를 기다려야 한다.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사랑도 무르익기를 기다려야 한다. 
시인은 시 '사랑의 노래'에서 "사랑은 가슴속 스케치"이며 "사랑은/ 멀리 깨끗한 하늘이 되기를"이라고 썼다. 
가슴속에 그린 첫 그림이 사랑이요, 만월(滿月)처럼 멀리 깨끗하게 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또한 사랑은 영혼의 허기를 채워주는 밥이다.(151221)
-문태준<시인>

 

 

 

 

 

 

 

 

 

장작
    정경화

 



그대에게 가는 길은
내 절반을 쪼개는 일
시퍼런 도끼날이
숲을 죄다 흔들어도
하얗게 드러난 살결은
흰 꽃처럼 부시다


그대 곁에 남는 길은
불씨 한 점 살리는 일
바람이 외줄을 타는
곡예 같은 춤사위에
외마디 비명을 감춘 채
아낌없이 사위어 간다


그대 안에 이르는 길은
기어이 재가 되는 일
화농으로 굳은 상처
달빛으로 닦다 보면
비로소 쌓이는 적멸,
솔씨 하나 묻는다

 


 .................. 
추위가 벌써부터 시퍼렇다. 
겨울 채비에 바쁠 때 덜 마른 나무라도 많이 쪼개야 했다. 
나무 때던 시절 얘기지만, 뒤란이며 마당귀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장작은 겨울 양식같이 든든했다. 
나무들 속살이며 무늬도 향기롭고 아름다웠다. 
지금은 절 마당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런 장작은 불이요 꽃이다. 
보고 있으면 모닥불 추억처럼 온몸이 뜨거워진다. 
그래서 '그대에게 가는 길'과 '그대 곁에 남는 길'과 '그대 안에 이르는 길'이 장작불로 다 모이는가. 
'절반을 쪼개'고 '불씨 한 점'을 살려내서 '기어이 재'가 되는 길. 
그런 전소(全燒)의 깨끗한 사랑도 있지만 장작은 군고구마의 구수한 추억도 주었다. 
찬바람 드셀수록 장작불 함께 쬐던 벗들이며 군고구마 같은 마음들이 그립다.(131129)
- 정수자<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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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을 멈추고

                     나희덕                

 


 

 
그 나무를 
오늘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어제의 내가 삭정이 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이십 년 후에 내가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것 같아 
한쪽이 베어져 나간  나무 앞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덩굴손이 자라고 있는 것인지요
내가 아니면서 나의 일부인,
나의 의지와는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자라나
나를 온통 휘감았던 덩굴손에게 낫을 대던 날,
그해 여름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을 용서한 것도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릅니다
덩굴자락에 휘감긴 한쪽 가지를 쳐내고도
살아있는 저 나무를 보세요
무엇이든 쳐내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그해 여름, 그러나 이렇게 걸음을 멈추는 것은
잘려나간 가지가 아파오기 때문일까요
사라진 가지에 순간 꽃이 피어나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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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


                         이호광

 

 

 



참 가련한 일이다.

서로 괴롭히기 위해 사람이 되어
적(適)을 만들기 시작한 우리는.
서로 슬퍼하기 위해 사람이 되어
눈물을 만들기 시작한 우리는.

만약
사람과 사람 사이를
한 열흘쯤 비워 둘 수 있다면
나는 거기서
아무것도 아니고 싶다.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니고 싶다.

참 가련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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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늦가을 꽃의 마알간 낯바닥을
한참을 쪼그려 앉아 본다
벌들이 날아든 흔적은 없고
햇살과 바람만이 드나든 흔적이 숭숭하다
퇴적된 가루 분분한 홀몸에 눈길이 가고
나도 혼자라는 생각이 정수리에 꼼지락대는 순간,
꽃 속 꽃이 내어준 자리에 뛰어들었다.
혼자 고요한 꽃은,
누군가 뛰어든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한 꽃은
순간 화들짝 놀랐지만
나도 저도 이내 맑아졌다
곁이리라
화엄(華嚴)이리라

 



................
맑은 낯을 한 꽃이 있다. 
생명들의 기운이 점차 쇠락해지는 늦가을에 꽃의 얼굴을 본다. 
그 어떤 것도 탐하지 않아 아주 고요한 내면으로 꽃은 있다. 
자기를 잘 제어하면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넉넉하다고 느끼면서 꽃은 있다. 
호수의 수면과도 같은 꽃의 조용하고 잠잠한 내부로 시인이 들어간다.
들어간다는 것은 마음이 이끌려 이동한다는 뜻이다. 
이끌려 눈길을 주고받고, 내심(內心)을 나눈다는 뜻이다.


홀로 지내느라 누군가를 수용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 다소 놀람이 없지 않았겠지만 꽃은 시인에게 곁을 허락한다. 
그리고 다시 애초의 평온하고 깨끗하고 수수한 낯으로 돌아간다. 
이런 사귐이라면 상스럽지 않다. 이 꽃과 같은 영혼의 맑음과는 사귀고 싶다. 
- 문태준<시인>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


                                  유홍준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는
둥글다네

나는 그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를 좋아한다네

사람이 사람을 앉히고 발톱을 깎아준다면
정이 안 들 수가 없지
옳지 옳아 어느 나라에선
발톱을 내밀면 결혼을 허락하는 거라더군
그 사람이 죽으면 주머니 속에 발톱을 넣어 간직한다더군

평생 누구에게 발톱을
내밀어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

단 한번도 발톱을 깎아주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

발톱을 예쁘게 깎아주는 사람은
목덜미가 가늘고
이마가 예쁘고 속눈썹이 길다더군 비가 오는 날이면
팔베개도 해주고 지짐도 부쳐주고 칼국수도 밀어준다더군
그러니 결혼을 안 할 수가 있겠어
그러니 싸움을 할 수가 있겠어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는
고양이에 가깝고
공에 가깝고
뭉쳐놓은 것에 가깝다네 그는 가장 작고 온순하다네

나는 그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를 좋아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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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江)
      구광본

 



 

혼자서는 건널 수 없는 것.

오랜 날이 지나서야 알았네.

갈대가 눕고 다시 일어나는 세월,

가을빛에 떠밀려 헤매기만 했네.

한철 깃든 새들이 떠나고 가면

지는 해에도 쓸쓸해지기만 하고

얕은 물에도 휩싸이고 말아

혼자서는 건널 수 없는 것.

 

 


......................
구광본(1965- ) 시인. 대구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6년 “검은 길”로 등단. 1987년 시집 <강>으로 제11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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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다는 것은 


                 이정하

 



그립다는 것은
아직도 네가
내 안에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지금은 너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볼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내 안 어느 곳에
네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너를
샅샅이 찾아내겠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가슴을 후벼파는 일이다
가슴을 도려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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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고현혜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대 집에
죽어가는 화초에 물을 주고
냉기 가득한 그대 부엌
큰솥을 꺼내 국을 끓이세요.
어디선가 지쳐 돌아올 아이들에게
언제나 꽃이 피어 있는
따뜻한 국이 끓는
그대 집 문을 열어주세요.
문득 지나다 들르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당신 사랑으로 끓인 국 한 그릇 떠주세요.
그리고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사람
목숨 바쳐 사랑하세요.

 



.................
고현혜 시인은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면서 영어와 한국어로 시를 쓴다. 
그는 시 '전업주부 시인'에서 "이제 시 쓰는 것보다/ 밥하는 게 더 쉬워요// 서점에서 서성이는 것보다/ 마켓에서 망설이는 시간이 더 길고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최근에 펴낸 그녀의 시집을 보니 모국어로 쓴 시편들이 높고 따뜻하고 특별하게 섬세하다.


이 시에서 시인은 사랑이 넘치는 집을 꿈꾼다. 
화초가 싱싱하게 되살아나고, 부엌에는 온기가 가득한 그런 집을 꿈꾼다. 
가족에게 따뜻한 국을 끓여 차려주는 사랑의 행위는 외로운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진다.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사람/ 목숨 바쳐 사랑하세요."라고 쓴 시구(詩句)를 읽는 순간 "그녀의 하얀 팔이/ 내 지평선의 전부였다"라고 짧게 쓴 막스 자코브의 시 '지평선'이 떠올랐다. 
때로 우리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잊고 살기도 한다.(150824)
-문태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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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권오범

 

 



육신의 안녕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자리라서 
청렴결백하게 옥석을 가리라고 
조물주가 지정해준 음식물 들머리 엄지가락 



볼 수 없어 
짐작만으로 더듬거리지만 
한번 경험한 맛은 
숟가락 놓을 때까지 기억하리라 



척척한 굴속에 갇혀 
평생 누워지내려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그리하여 바깥일까지 참견하고 싶은 것이다 



하여간 참을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침묵훈련을 시켜야 한다 
까딱하면 묘혈을 파는 
간사하기 그지없는 것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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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나무에게  


              최영희

 




한줄기 
소낙비 지나고 
나무가 
예전에 나처럼 
생각에 잠겨있다 


8월의 
나무야 
하늘이 참 맑구나 


철들지, 
철들지 마라 


그대로, 
그대로 푸르러 있어라 


내 모르겠다 


매미소리는 
왜, 저리도 
애처롭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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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담쟁이
           강현덕

 




동그랗게 꿈을 말아

안으로 접을래



빠알간 흙벽 속으로

자꾸 말아 넣을래



다져서 쌓은 꿈들이

사방으로 터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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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수
   임성규



어디로 흘러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네
모든 바람이 저 숲으로
가라고 말했지만
믿을 건 아무것도 없다고
고개를 저었네.


바닥에 맨발로
서 있던 날도 많았지
독수리가 허공을
빙빙 도는 빈들에서
내 마음 움푹 패도록
그대를 생각하네.



..............
낙수에 하염없이 취하던 때가 있었다. 
아무것도 못 하는 무기력에 나른히 빠진 채 비나 바라보던 시절, 시골집의 낙수는 지음(知音) 같았다. 
초가든 기와든 지붕을 아는 낙수는 비의 굵기에 따라 리듬을 달리 한다. 
그 중에도 처마 끝을 한참씩 잡고 있다 마침내 떨어지는 투신들! 
투명한 망울 속에는 더 아슬하니 영롱한 풍경이 맺히다 지곤 했다. 
우두커니 마루에서 낙수로 먼 편지를 적기도 했다.


'어디로 흘러야 할지' 알 수 없는 날이 길어지는 즈음이다. 
'모든 바람이' 가라는 숲도 믿을 수가 없다니 장마 같은 막막함에 갇혔던가. 
닿을 수 없는 그리움 때문인지 '독수리가 허공을/ 빙빙 도는 빈들에서'도 발을 떼지 못 하니 속울음도 꽤나 우묵하겠다. 
그렇게 '움푹 패도록/ 그대를 생각'한 게 언제인지, 낙수 잘 듣는 옛 처마 밑에 들고 싶은 때다. 
그저 하염없이 낙수나 봐도 좋으려니.
정수자<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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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구나
         전다희

 

 




내가 너를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나를 선택했구나


내가 너를 가르치려 들었는데 
네가 나를 가르쳤구나


나는 네게 부족하다 생각하건만 
너는 내가 다 주었다 하는구나


나는 네게 주고 있는 줄 알았건만 
네가 내게 많은 것을 주고 있었구나 

 

부모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나를 부모로 만들었구나
참으로 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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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놈
     이진수

 

 




비암이 우에 센지 아나

내사마 모르겠다 우에 센 긴데

참 말 모르나 그 놈이 센 거는

껍데기를 벗기 때문인기라 

문디 자슥 껍데기 벗는 거하고

센 거하고 무신 상관이가

와 상관이 없다카나 니 들어 볼래

일단 껍데기를 벗으모 안 있나

비얌이 나오나 안 나오나

나온다카고 그래 씨부려 봐라

그라모 그기 껍데기가 진짜가

시상 새로 나온 비얌이 진짜가

문디 시방 내를 바보로 아나

그기야 당연지사 비얌이 진짜제 

맞다 자슥아 내 말이 그 말인기라

껍데기 벗어던지고 진짜 내미는 놈

그런 놈이 센 놈 아니겠나

넘 몰래 안창에다 진짜 감춘 놈

그런 놈이 무서븐 거 아이겠나

어떻노 니캉 내캉 홀딱 벗어 뿔고

고마 확 센 놈 한번 돼 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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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지오 칸타빌레 

                            나호열

 

 

 



돌부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자주 넘어졌다
너무 멀리 내다보고 걸으면 안돼
그리고 너무 빨리 내달려서도 안돼
나는 속으로 다짐을 하면서
멀리 내다보지도 않으면서
너무 빨리 달리지도 않았다
어느 날 나의 발이 내려앉고
나의 발이 평발임을 알게 되었을 때
오래 걸을 수 없기에 
빨리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 앞에서 오래 걸을 수도 
빨리 달릴 수도 없는 나는 느리게
느리게 이곳에 당도했던 것이다
이미 꽃이 떨어져버린 나무 아래서
누군가 열매를 거두어 간 텅 빈 들판 앞에서
이제 나는 내 앞을 빨리 지나가는 음악을 듣는다
느리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인가
아름다운 것들은 느린 걸음을 가진 것인가
느리게 걸어온 까닭에
나는 빨리 지나가는 음악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긴 손과 긴 머리카락을 가진 음악의 눈망울은
왜 또 그렇게 그렁그렁한가
아다지오와 칸타빌레가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강물의 악보가 얼마나 단순한가를 생각한다 
강물의 음표들을 들어올리는 새들의 비상과
건반 위로 내려앉는 노을의 화음이
모두 다 평발임을 깊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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