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⑦] "치맛바람에도 철학이 있어야죠"
  • 소프라노 조수미 키운 김말순씨
  • 김덕한기자 ducky@chosun.com
    입력 : 2005.05.10 18:42 / 수정 : 2005.05.10 18:42
    • 조수미의 배짱과 대범한 성격은 어머니 김말순씨를 그대로 닮았다. "강단에서 그렇게 손짓을 해도 65세까지 무대에 서겠다고 고집 피우는 딸이 자랑스럽다"며 김씨는 싱긋 웃었다. /김창종기자 cj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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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해 여름 김말순(69)씨는 수술대에 누워 있었다.
    • 심혈관 다섯 군데가 막혀 수술하지 않고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 의사는 혀를 찼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치를 뻔했습니다.
    • ” 심혈관을 떼내고 팔뚝의 혈관을 이식하는 7시간의 대수술.
    • 그러나 마취에서 깨어나는 순간에도 그는 오로지 로마에 있는 딸 수미 생각뿐이었다.

      수술대에 오르기 전 모녀는 이미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 수술 소식에 모든 공연 스케줄을 취소하고 한국으로 날아오겠다는 딸에게 어머니는 전화통에 대고 호통을 쳤다.

    • “세계 최고의 성악가가 어떻게 사적인 일로 관객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있느냐고 야단을 쳤지요.

    • 나는 수미가 내 자식이기에 앞서 세계 음악애호가들의 연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라고 생각해요.”
      ‘여장부 김말순’은 언제고 이런 식이었다. 가진 거라곤 배짱과 끈기. 이거다 싶으면 한길로 매진했다.

    • 그렇게 해서 얻은 ‘대표작’이 세계 정상의 소프라노 조수미다.
      서울 돈암동 기슭 단칸방에 살던 시절에도 그는 자식 교육이라면 물불을 안 가렸다.

    • 딸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 “딸이니 더 잘 키운다”는 신념으로 뭉친 별난 어머니 덕에 수미는 피아노, 미술, 발레, 고전무용 안 해본 게 없다.

    • 그래도 어머니의 안목엔 노래가 가장 뛰어났다. “목소리에 차고 나가는 힘이 대단하다는 거지요.”
      그때부턴 ‘스파르타’ 식으로 일관했다. 7시간 이상 연습하지 않으면 방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 연습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딸의 숙제도 대신했다.

    • “수미의 여고시절엔 새벽 두 시까지 십자수를 놓고 있었다니까요.

    • 화장할 겨를이 어디 있어요. 멋내는 것 좋아하면 딸자식 출세 못 시켜요.(웃음)”
      딸이 서울대 음대에 수석 입학한 뒤에도 김씨의 ‘딸 관리’는 느슨해지지 않았다.

    • “밤 10시 전 귀가, 남자친구는 사귀지 말 것!” 하지만 딸은 그예 사랑에 빠졌고, 성적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 당황했지만 어머니로서 김씨의 결단은 빨랐다.

    • “방법은 하나, 유학이었죠.

    •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으로 떠나면서 수미는 울고불고 했지만 지금은 저에게 아주 고마워하고 있답니다.

    • ”유학 간 지 3년 만인 1985년 나폴리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 김씨는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

    • 이듬해 프로 무대에 데뷔하면서는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질다 역을 맡더니, 거장(巨匠) 카라얀으로부터 ‘신이 내린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았다. 어머니는 그 순간 가슴으로부터 딸을 떠나보냈다.
      “피아노 한번 쳐보는 게 소원이던 여고시절 꿈이 수미 덕에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지요.

    • 남들은 통상 ‘희생’이라고 합디다만, 안 그래요.

    • 대한음악사 문턱이 닳도록 악보를 사다 나르면서 아이가 보기 전에 제가 먼저 공부하고 건네줬어요.(웃음)

    • 학교에서 수미가 돌아오면 제일 먼저 ‘오늘은 뭘 배웠니?’ 하고 물었어요. 마치 도강하는 학생 같았죠.”
      김씨는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위로 언니들이 줄줄이 있어서 이름이 ‘말순(末順)’이다. 어린 시절에도 악바리였다.

    • 10남매의 치열한 ‘경쟁’ 속에도 악착같이 마산여고를 졸업했고, 대학에 가겠다며 상경했다가 신문사 오퍼레이터로 취직했다.
      그의 ‘야심’을 눌러앉힌 건 결혼이다.

    • “그 펄펄 끓는 에너지가 모두 자식들에게로 전이된 거죠. 극성엄마 된 건 당연해요. 나뿐이었겠어요?

    • 자기 못 배운 한(恨) 자식 통해 풀려는 그때 엄마들이 다 그랬지요. 그래도 그 시절엔 철학이 있었어요.

    • 최소한 억지로는 안 했지요. 대신 해볼 만하다 싶으면 죽어라고 달려드는 거예요. 설령 실패한다 해도 말이지요.”

[벤처 농사꾼] <6·끝> 참다래사업단 정운천 회장


 

키위농업에 '이건희식 경영' 접목
생산~유통 전과정 한 사업단으로 묶어
"개방이 대세라면 차별화만이 살 길"
 
해남=송동훈기자 dhsong@chosun.com
입력 : 2005.04.18 18:11 31' / 수정 : 2005.04.19 02:07 11'


▲ 정운천 회장이 '키위 신화'를 이뤄낸 비결은 사업과정의 일원화, 유통망 장악, 품질의 차별화, 과감한 투자에 있었다. / 김영근기자
‘키위 재벌’로 잘 알려진 한국참다래유통사업단 정운천(51) 회장은 ‘벤처 농업계의 이건희’로 불린다. 위기를 기회로 역전시키는 발상의 전환, 품질 차별화를 통한 특화된 고객층 확보, 시대를 한 걸음 앞서나가는 과감한 미래 투자…. 두 사람의 경영 스타일이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연간 350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정씨의 전남 해남군 화산면 키위단지는 농업에 ‘이건희식 경영’을 접목시킨 기업형 영농 현장이다.

정 회장이 처음 키위와 인연을 맺은 것은 80년대 초반. 고려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키위 묘목 수입상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맛 좋고 영양이 풍부한 키위야말로 장래성 있고 돈 되는 품목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곧이어 전남 해남에 터를 잡고 직접 키위 농사를 시작했다. 만 5년5개월 동안 비닐하우스에서 먹고 자며 키위 재배에 매달리던 정씨에게 첫 위기가 찾아왔다. 87년 태풍 셀마로 모든 것이 날아가는 큰 피해를 입은 것. 설상가상, 89년엔 키위시장 개방이란 날벼락이 떨어졌다.

위기 속에서도 정씨는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대응해 나갔다. 첫째는 국내 키위산업의 일원화였다. 다국적 키위 기업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키위 생산부터 선별·포장·저장·유통·가공·판매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사업단으로 일원화해 의사 결정과 조직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탄생한 참다래사업단은 국내 최초의 농민주식회사였다.

둘째는 ‘적과의 동침’. 외환위기로 키위 판매량이 줄어들었을 때 경쟁국인 뉴질랜드와 과감히 손을 잡았다. 11월~다음 해 4월은 국산 키위를 생산·유통시키고, 5~10월까지는 뉴질랜드산을 수입·유통시키는 방식으로 계절과일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다.

셋째는 차별화된 품질을 앞세운 유통망 장악. 키위를 따서 그냥 파는 게 아니라, 딴 후 숙성시켜 더 달고 부드럽게 만드는 ‘후숙(後熟)’ 과정을 개발했다. 이렇게 수입산과 차별화 한 품질을 가지고 백화점·할인점에서 직판 행사를 꾸준히 벌였고, 그 결과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넷째는 과감한 미래 투자와 신규사업 진출이다. 정씨는 외환위기 직후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구마를, 키위의 뒤를 이을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택했다.

3년을 매달린 끝에 그는 고구마의 신선도와 품질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는 저장법과 세척 이후에도 붉고 싱싱한 고구마 본래의 색을 살릴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고구마는 이제 변비·콜레스테롤 제거 등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는 고부가가치형 작물로 탈바꿈했다. 고구마가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3년 만에 사업단 전체 매출액의 40%를 웃돌 정도로 급성장했다.

정 회장은 “농산물 시장 개방이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우리의 자연여건과 첨단기술을 활용한 차별화·고급화 전략만이 살 길”이라며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정부와 국민들에게 손 벌리지 않는 농업인들의 독립정신”이라고 말했다.

[벤처 농사꾼] <5> 경기도 원평허브농원 이종노씨
'허브왕국' 세워 연매출 10억
채소밭을 허브농원으로 재단장
지난해 관람객 15만명 다녀가
비누·샴푸 등 허브제품 판매도
화성=송동훈기자 dhsong@chosun.com
입력 : 2005.04.17 18:14 13' / 수정 : 2005.04.18 04:08 26'

농업을 제조업 혹은 관광산업과 결합시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허브’라는 독특한 소재로 산업 간 융합을 시도해 대박을 터뜨린 농사꾼 출신 사업가가 있다. 원평허브농원과 허브제품 생산업체 ㈜허비너스를 함께 운영, 지난해 10억원의 매출액을 올린 이종노(46) 사장.


▲ 원평허브농원 이종노 사장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성공했다’는 말을 듣는 게 싫다”며 “진짜 성공을 향한 첫걸음을 겨우 떼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 정경렬기자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원평리 51사단 바로 옆에 있는 그의 원평허브농원은 연일 방문객들로 붐빈다. 지난달 말에는 평일 오전인데도 소풍을 나온 유치원생들과 중국인 관광객들, 주부, 견학온 농업인 등 400여명이 몰렸다.

4000평 규모의 허브농원은 그야말로 ‘허브 왕국’이다. 허브로 장식된 실내 화원, 허브 재배장, 가공제품 전시·판매장, 관람객들이 허브 원료로 비누·샴푸 등 생활용품을 직접 만들어보는 실습실 등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채소 농사를 짓던 이 사장은 고려대 자연자원대학원에 진학한 97년 초 허브를 만나면서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는 99년 4월, 1년4개월의 준비 끝에 채소밭이었던 이곳에 허브농원을 개장했다.

운이 좋았던지 허브농원은 처음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입소문이 나면서 지난해에만 15만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이 사장은 “웰빙 바람이 불면서 건강에 좋은 허브가 인기를 끈 데다, 가족·친구끼리 가볍게 놀러와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어필한 것 같다”고 말했다. 성공 비결은 다양한 상품 개발이었다. 2000년 농업인 중 최초로 중소기업청으로부터 벤처기업 인증을 받아 ㈜허비너스라는 허브 가공업체를 세웠다. 이 회사는 현재 허브를 이용한 여드름·알레르기성 피부 개선용 오일, 방충용 스프레이, 공기청향제, 비누 등 40여종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허비너스 제품을 이용해본 소비자들은 대부분 단골이 됐다.

이 사장은 “인생철학 1호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라며 “이익을 내기보다 정직하게 만들어서 정직하게 팔다 보니 고객의 사랑을 받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운영 중인 허브사이트(www.herbsfarm.com)를 농업전문 포털사이트로 개편해서 지식농업을 전파하는 일도 하고 있다. 그는 허브와 관련된 모든 것을 모아놓은 허브테마농원을 구상 중이다.

 

[벤처 농사꾼]

<4> 전남 장성 강용씨
친환경 농법으로 年매출 25억

 

    발행일 : 2005.04.15 / 경제 B4 면

     

    30여개의 대형 비닐하우스가 똬리를 틀고 있는 전남 장성군 남면 분양리.

    이곳 비닐하우스촌을 지나다보면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철골구조의 단층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대졸 출신 젊은 농사꾼 10여명이 모여 상추·치커리·양파 등 채소 재배로 지난 해에만 25억원대의 매출을 올렸다는 ‘학사(學士)농장’ 본부다.

    하지만 겉보기엔 농장이라기보다 공장에 가까웠다.

    자동 포장기계로 가득찬 포장실, 저온 저장창고, 서류뭉치와 컴퓨터로 가득한 사무실은 제조업체 내부를 연상케 했다.

    학사농장이 농장 같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이 농장은 장성군, 강원도 고랭지, 제주도 등 전국 각지의 30여 농가와 손잡고 공동 생산을 한다.

    기획과 판매는 강용 사장 등 본부에서 맡고, 생산은 제휴 농가가 맡는 분업 체제다. 전국 농장을 합치면 무려 40만평을 넘는 규모다.

    97년 설립 때부터 무농약 친환경 농법과 다품목 소량 생산을 고수했다.

    고소득층을 겨냥한 백화점·할인점 판로를 단시간 내에 뚫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

    이와 함께 다양한 현장교육·체험학습 프로그램을 개발해 고객들에게 무농약 생산 현장을 공개했다.

    매달 소식지를 발행해 농장의 시시콜콜한 소식까지도 모두 공유했다.

    불만이 있으면 100% 환불해 주고, 품질 보증기간을 정해서 1주일 이내에 채소가 상하면 군말없이 반품을 받아줬다.

    강 사장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믿고 먹을 수 있다’는 신뢰가 확산되면서 8000여명의 고정 팬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일단 ‘신뢰’가 쌓이자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단골고객이 늘자 대형 바이어들이 제 발로 찾아왔고, 신세계·현대백화점(1998년)을 시작으로 이마트(2000년)에까지 제품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때마침 불기 시작한 웰빙 바람 덕도 톡톡히 보았다.

    그러나 학사농장의 시작은 초라했다.

    강 사장은 대학생이던 92년 선배의 비닐하우스에 놀러갔다 파릇파릇 솟아난 무순의 아름다움에 반해 농사일에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대학까지 공부시켜놨더니 겨우 농사라니, 차라리 호적을 파가라”며 반대했지만, 뜻을 꺾지 않았다.

    겨우 광주 망월동에 20여평의 채소밭을 빌려 농사를 시작했지만 폭설과 태풍에 비닐하우스가 통째로 날아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7번 망하고, 8번 일어섰다”고 회상했다.

    그는 2003년 (주)유기데이를 설립, 가공식품 제조업에도 진출했다.

    빵·야채수프·선식·만두·떡 등 60여종의 가공식품을 만든다.

    “다음 번에는 농촌문화사업과 외식산업에 진출한다”는 그의 꿈의 한계는 어디까지일지 궁금했다.

    장성=송동훈기자

    (블로그)dhsong.chosun.com

    [벤처 농사꾼] <3> 경남 하동 김종관씨
    녹차냉면으로 이룬 '부농의 꿈'
    녹차수제비·만두… 10여가지 제품 개발
    대리점 80곳 직접 개척… 연 2억원 넘는 순소득
    하동=김홍수기자 hongsu@chosun.com
    입력 : 2005.04.13 18:10 46' / 수정 : 2005.04.13 19:11 40'

    지난 3월 말 매화꽃이 만발한 경남 하동 화개동천 계곡. 쌍계사를 마주 보고 있는 산비탈에 ㈜산골제다 농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 김종관씨가 수확을 앞둔 녹차나무 상태를 살피고 있다. 이곳의 야생 녹차나무는 키가 무릎 높이 밖에 안 되지만, 수령이 40-40년에 달한다. / 김홍수기자
    농장 이름에 ‘주식회사’ 간판이 붙은 이유가 궁금했는데, 농장주이자 대표이사인 김종관(43)씨를 만나자 궁금증은 곧 풀렸다. 6대째 이곳에서 살고 있는 김씨는 1만2000평의 야생 녹차 밭을 가꾼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농장 한쪽에 공장까지 차려 녹차냉면<사진> 등 녹차 가공 식품을 만들어 전국에 판다. 이에 따라 그는 연간 2억~3억원의 소득을 올린다.

    김씨가 녹차 가공품으로 먹고 살게 된 사연은 이랬다. 그는 1980년 고교 졸업 후 부산의 한 중소기업에 취업해 8개월간 직장생활하며 도회지 정착을 시도했다. 하지만, 도시생활은 실속도 없고 왠지 공허했다. “당시 월급이 13만원이었는데, 하숙비를 주고 나면 남는 게 없었어요. 밑 빠진 독 같은 생활이 너무 한심스러워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귀향 후 김씨는 산기슭에 무더기로 자생하고 있는 야생 녹차나무에 주목했다. 당시 야생 녹차 나무는 4~6월에만 주민 소득원이 됐다. 6월이 지나면 찻잎이 억세져 녹차용으로는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억센 녹차잎엔 엽록소와 탄닌 성분이 많아 기능성 식품으로서의 효용성은 녹차용 잎보다 오히려 더 클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녹차 엑기스를 추출해 상품화하면 돈이 되겠다 싶었죠. 그래서 동업자를 구해 제품 개발에 성공했지만, 판로가 개척되지 않아 결국 부도가 났습니다. 당시 소비자들은 생소한 엑기스 제품에 거부감을 보였어요. 참담한 실패였죠.”

    야반도주해 4년여간 도망다니던 김씨는 사태가 정리된 뒤, 1996년 ㈜산골제다를 만들어 재기에 나섰다. 이번엔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 형태로 개발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시행착오 끝에 녹차잎 분말과 녹차 원액을 밀가루에 혼합하는 방식으로 녹차냉면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2002년 8월엔 특허까지 받았다. 용기백배한 김씨는 국수, 수제비, 만두, 떡국, 된장, 고추장, 장아찌 등 10여가지의 녹차 가공식품을 잇달아 개발했다.

    김씨는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무리한 사업확장은 자제하고, 판로도 대형 유통업체는 배제한 채 독자적인 판매망을 구축하는 원칙을 고수했다. 대기업과 손을 잡으면 당장은 편하게 돈을 벌지 몰라도 철저히 종속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씨의 고집과 발품 덕분에 산골제다 녹차 가공식품을 파는 대리점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 현재 80여개에 이른다. 또 이곳 제품으로 만든 음식만 파는 음식점도 100여곳에 달해 제품의 안정적인 수요처도 확보됐다.


    김씨의 성공은 지역사회 발전에도 적잖은 기여를 하고 있다. 녹차잎을 사시사철 활용하는 방법을 개발함으로써 주변 농가소득을 3배 이상 향상시켰다. 녹차 가공식품 재료로 들어가는 연간 30~40t의 녹차잎 중 김씨 농장에서 생산된 것은 10% 수준이며, 나머지 90%는 이웃 녹차 재배 농가들로부터 수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벤처 농사꾼] <2> 충남 천안 이종우씨

    '인터넷 쌀가게'로 연 5억대 매출
    천안=김홍수기자 hongsu@chosun.com
    입력 : 2005.04.12 18:48 57' / 수정 : 2005.04.12 20: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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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쌀 1000여가마(80㎏ 기준)를 생산하는 충남 천안의 농사꾼 이종우(51)씨. 현대판 ‘천석꾼’으로 연 1억5000만원의 순수입을 올리고 있지만 경운기·트랙터·콤바인 등 그 흔한 농기계는 단 한 대도 없다.


    ▲ 21세기 거농 인터넷 쌀가게로 연간 1억5000만원의 순수입을 올리고 있는 이종우씨. 이씨는 외주(아웃소싱)를 이용해 농기계 한 대 없이 6만평의 논을 경작한 뒤 인터넷과 택배업체를 통해 전국의 소비자에게 쌀을 직판하고 있다. / 김홍수기자
    농기계는 구입않고 아웃소싱

    “뭣 하러 비싼 농기계를 사서 1년에 겨우 한두 달 쓰고 창고에서 썩힙니까. 필요할 때마다 돈 주고 빌려 쓰면 됩니다. 말하자면 ‘아웃소싱(outsourcing)’이죠.”

    이씨는 지난 97년 서울에서 공기업에 다니다 틀에 박힌 직장생활에 염증을 느껴 귀향했다. “6대째 농사를 짓고 있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마음 편히 농사나 짓자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오랜만에 지어 보는 농사는 예상보다 너무 힘들었다. 귀향 3개월 만에 몸무게가 10㎏이나 빠졌다. 이런 식으론 버티기 어렵겠다는 위기 의식이 들면서 대학(단국대 행정학과) 졸업 후 신발가게·양복점·금은방 등을 전전하며 장사 감각을 익혔던 그의 마음속에 비즈니스 마인드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품질 차별화에 기반한 쌀의 브랜드화’ ‘인터넷을 통한 소비자 직판’이란 사업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우선 품질 차별화를 위해 무농약·저비료 재배를 시도하기로 하고, 연구작업에 착수했다. 전문 연구기관에 토양 분석을 의뢰한 결과 농토의 비료 사용량이 과잉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는 당장 비료 투입량을 종전의 3분의 1로 줄였다. 결과는 대성공. 비료 투입을 최소화하자 벼의 생명력이 강해지면서 병충해에 대한 내성이 생겨 농약을 치지 않아도 잘 자랐다.

    그는 쌀 품질 차별화와 더불어 ‘인터넷 쌀가게’(www.ssal.co.kr)를 만들어 자신이 생산한 쌀을 소비자들에게 직접 판매키로 했다. 인터넷 쌀 판매의 핵심 포인트는 ‘선(先) 주문, 후(後) 도정’ 방식. 도정한 상태의 쌀을 만들어 놓고 주문을 기다리는 방식이 아니라 주문을 받은 다음 도정해 집으로 배달해주는 방식을 취한 것.

    무농약 쌀… 주문받은 뒤 도정

    “보통 쌀은 도정 후 15~20일이 지나야 소비자들의 손에 들어갑니다. 저는 인터넷 판매방식을 통해 이 기간을 2~3일로 줄였죠. 쌀을 도정하면 그때부터 품질이 변질되기 시작하기 때문에 이 기간을 최소화하면 밥맛 좋은 쌀이 되거든요.” 도정→판매 과정의 유통단계 단축은 유통비용의 절감효과도 가져와 보통 쌀은 전체 쌀가격의 20% 정도가 유통가격이지만 이씨의 경우 그 비율이 7~8%밖에 안 된다.


    ▲ 타임誌도 관심 2000년 8월 미국 시사잡지 타임에 실린 이씨의 기사. 타임지는 ‘인터넷에 연결된 농부들(wired farmers)’이란 제목으로 이씨의 성공 사례를 사진과 함께 상세히 소개했다.
    이씨의 강점은 전문가의 지식과 기술을 적절히 잘 빌려 쓴다는 점이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구축할 때도 2~3개 업체를 물색해 사업제안서를 받아보고 믿음이 가는 곳을 선정했다.

    또 택배업체를 선택할 때도 3개 업체에 사업계획서를 보내고, 업체끼리 가격경쟁을 붙이는 방식으로 가격을 다운시켰다.

    이렇다 보니 현재 이씨의 해드림 브랜드 쌀 1포대 가격(20㎏)은 5만8000원으로 차별화된 품질과 택배비용까지 감안하면 별로 비싸지 않다.

    이씨는 현재 8000여명의 고정 고객을 확보, 연 5억5000만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지난해 순소득은 1억5000만원에 달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자 2000년부터 농사 규모를 3만평에서 6만평으로 늘렸고, 그래도 공급량이 달리자 이웃 15농가의 쌀을 수매해 판매하고 있다. 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마을 전체 발전에도 보탬이 되고 있는 것이다.

    • [벤처 농사꾼] <1> 전남 광양 나종년씨
    • “칼슘 많고 위염 균 억제성분”
      年3억원대 소득 富農 만들어 성수기
      지나면 썰렁하던 마을 체험관광 단지로 새 활력얻어
    • 광양=김홍수기자 hongsu@chosun.com
      입력 : 2005.04.11 18:12 / 수정 : 2005.04.12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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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종년씨가 고로쇠나무 수액으로 만든 간장과 된장이 들어 있는 장독을 살피고 있다. 나씨 뒤로 펼쳐진 1000여평의 농장 마당에는 수백개의 장독과 메주 덩어리들이 봄햇살 아래 도열해 있다. 김영근기자 kyg21.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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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광양 옥룡면 백운산 휴양림으로 향하는 좁은 지방도를 달리다 보면 ‘고로쇠 간장·된장, 나종년 농장’이란 간판이 눈길을 끈다.
      • 깔끔하게 정돈된 1000여평의 농장 마당에는 수백개의 장독과 메주 덩어리들이 봄 햇살을 쬐고 있다.

        농장 주인 나종년(47)씨. 그는 농림부가 선정한 신지식농업인이다. 마을 주변에 지천으로 널린 고로쇠나무 수액을 이용한 간장·된장을 개발해 연간 3억원대의 소득을 올리는 ‘벤처농사꾼’이다.

        예부터 백운산 일대는 통일신라시대 말 고승인 도선국사 수도처와 고로쇠나무 자생지로 유명한 곳이다. 도선국사가 오랜 참선 수행 끝에 마침내 득도했으나 오랜 좌선 탓에 다리뼈에 이상이 생겨 걷지를 못하다 고로쇠 수액을 먹고 일어섰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이런 배경 덕분에 해마다 우수~경칩 사이 고로쇠 수액 성수기가 되면 옥룡면 일대 마을은 고로쇠 수액을 찾는 관광객들로 빈방을 찾아보기 힘들다.

      • 이 즈음엔 고로쇠물은 18ℓ한 통에 5만원을 호가할 정도로 비싼 가격대를 형성한다. 하지만 4월만 지나면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기면서 남은 고로쇠 수액도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다.

        나씨는 폐기 처분되는 고로쇠 수액을 재활용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고로쇠 수액으로 간장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됐다.

      • 나씨는 메주를 쑤어 간장을 만드는 과정에 물 대신 고로쇠 수액을 넣고 발효시키는 시도를 해봤다. 결과는 대성공.

      • 일반 간장보다 뒷맛이 훨씬 깔끔한 고로쇠 간장이 탄생한 것.

      • 한국식품개발연구원에 의뢰한 성분 분석 결과, 고로쇠 간장에는 일반 간장보다 칼슘 성분이 훨씬 더 많이 함유돼 있고, 특히 고로쇠 된장에는 위염을 유발하는 헬리코박터균을 억제하는 항균 성분이 있다는 사실이 광양보건대학 연구팀의 임상실험 결과 밝혀졌다.

        고로쇠 간장·된장에 대한 특허를 취득한 그는 제품 양산체제를 갖추는 한편 인터넷 홈페이지(n ajongnyeonfarmmoa.com)를 만들고, 간장 담그기 등 농촌 체험관광 프로그램을 만들어 ‘테마관광’으로 연결시켰다.

        예전 같으면 그냥 버렸을 고로쇠 수액을 그의 농장이 소화해 줌으로써 농외 소득이 늘어났고, 마을은 ‘농촌관광 테마마을(도선국사 마을)’로 지정돼 새로운 관광수요를 낳았다.

      • 한 농사꾼의 아이디어가 마을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불씨가 된 셈이다.

        그는 지금 마을에서 없어선 안 되는 대표 일꾼이 됐지만, 한때 고향을 등진 시절이 있었다.

      • 하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한 그는 1993년 노모가 계신 시골로 귀향했다.

      • 그는 고로쇠 수액이 마을 소득의 큰 몫을 차지하면서도 ‘한철 장사’에 그치는 점을 어떻게 개선할지 궁리하다 고로쇠 가공식품 개발이란 아이디어로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그에겐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 새로운 판로 개척으로 매출을 크게 늘려야 하고, 10%선에 머물고 있는 콩 자급도도 올려야 한다.

      • 나씨는 “콩 재배면적을 현재 2000평 수준에서 1만평 수준으로 늘리고, 포장을 고급화해 품질에 걸맞은 제값을 받는 게 당면 과제”라고 말했다.

      • 그의 고로쇠 간장·된장은 값비싼 고로쇠 수액을 주원료로 하고 있지만 소비자가격은 간장(0.9ℓ기준), 된장(1㎏ 기준)이 각각 7000원, 1만원 정도로 일반 간장·된장과 비슷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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