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정갑숙

 

 



낮에도 
등불을 켠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낮에도 
밤처럼 캄캄한 
누군가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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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김연동

 

 




오래된 낚시를 꺼내 강물에 던져 놓고


은빛 물고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이따금 요란한 입질 낚아채면 허공이다


쳐다본 하늘 위엔 별빛이 무성하고


세속을 휘감아온 저기압의 바람 소리


내 수면(水面) 키워온 달도 흔들리고 있구나

 


.......................
낚시는 종종 심신 수양의 길로 회자되었다. 
태공망(太公望) 덕에 '세월을 낚는다'는 깊이에 강태공들의 운치를 더해온 셈이다. 
월산대군 역시 고기가 물지 않아도 좋아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욕심을 버릴 때 이르는 무심(無心)의 평화로운 경지다.


그런데 요즘의 낚시 풍경은 사정이 복잡하다. 
조기 퇴직자며 장기 무직자가 갈수록 많아지기 때문이다. 
출근 같은 산행도 그렇지만, 한창 일할 나이에 '허공'이나 낚는 잔등을 생각하면 쓸쓸하기 짝이 없다. 
그런 근황의 안팎에는 '저기압의 바람소리'만 무성하고 진짜 입질은 멀 테니 긴 낮이 얼마나 쓸 것인가.


하고 보면 시도 입질만 요란할 때가 많다. 
기나긴 기다림을 언제나 내려놓나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사는 동안은 기다림이 곧 근황이자 희망이리라. 
시간의 강물에서 번쩍 튀어 오를 '은빛'을 향한-.
-정수자<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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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절창이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시. 
처음 잡지에 실린 ‘낙타'를 읽을 때 마흔 무렵의 나는 “모래만 보고 살다가”에 꽂혔다. 
보지 않는 듯하면서 다 보고 계셨구나. 
십수 년이 지나 다시 시를 읽는데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이 가슴에 박혔다. 
어려운 말 하나 쓰지 않고 깊은 곳을 찌르는 언어. 
어떤 경지에 오른 시인만이 그런 거룩한 살인을 할 수 있다.


1990년대, 마포와 인사동 언저리에서 신경림 선생님과 어울린 적이 있었다. 
술자리든 어디서든 언성을 높여 누군가와 다투는 선생님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늘 허허 웃으며 옆에 앞에 뒤에 사람과도 잘 지내시는, 한국 문단에서 보기 드문 분이었다.

시집 ‘돼지들에게'를 펴내며 신경림 선생님에게 추천사를 부탁드렸다. 
세대는 다르나 내 시를 편견 없이 봐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아름다운 추천사를 주신 선생님께 감사와 존경을 바친다.-최영미<시인.이미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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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당신
          곽효환

 


당신, 날 보고 웃네요
찻잔 둘 덩그러니 놓여 있는
낡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오래전에 그랬듯이
당신, 여전히 날 보고 웃네요
어느새 창밖에는 눈발 가득하고요
나는 아직 못한 말이 있는데
아니 할 말이 많은 것 같은데
두고 온 말들은 머릿속을 맴돌고
나는 이렇게 아픈데
여전히 아무 말 못했는데
빙그레 미소를 머금은 당신,
내 앞에 웃고만 있네요.

 



....................   
화자는 만면(滿面)에 미소를 머금은 당신과 마주 앉아 있다. 
둘 사이에는 낡은 탁자가 하나, 그리고 그 위에 찻잔 둘이 얹혀 있다. 
화자는 내심(內心)이 들떠 있고, 당신은 느긋하고 차분하다. 
화자는 일층 높고, 당신은 일층 낮다.


화자는 아프고 위태로운 형편이지만 화자 또한 말을 꺼내놓고 있지는 않다. 
속마음만 쏟아지는 눈발처럼 수선스럽게 움직이고 있을 뿐.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사랑의 장면이 떠오른다. 
이별하거나 해후(邂逅)하는 사랑은 얼마나 할 말들이 많겠는가. 
부려놓으면 산처럼 쌓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당신은 잔잔한 미소로써 안부 묻는 일을 대신하고, 그윽한 미소로써 애틋함을 끌어안아 어루만진다. 
큰 사랑은 이처럼 주고받는 말을 버리고도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 문태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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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최영미 
   

 



 
너의 인생에도 
한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바람에 갈대숲이 누울 때처럼 
먹구름에 달무리질 때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 


너의 몸 골목골목 
너의 뼈 굽이굽이 
상처가 호수처럼 괴어 있을까 


너의 젊은 이마에도 
언젠가 
노을이 꽃잎처럼 스러지겠지 


그러면 그때 그대와 나 
골목골목 굽이굽이 
상처를 섞고 흔적을 비벼 
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헤엄치고프다, 사랑하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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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조오현

 



밤늦도록 불경(佛經)을 보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 울음소리를


홀로 듣노라면


천경(千經) 그 만론(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
 

 

 

 

 

 

 

기대지 않고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


 

 



더 이상

기성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기성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기성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그 어떤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오래 살면서

마음속 깊이 배운 건 그 정도

자신의 눈과 귀

자신의 두 다리로만 서 있으면서

그 어떤 불편함이 있으랴

기댄다면

그건

의자 등받이뿐

(성혜경 옮김)

 

 

.........................................
그래, 차라리 의자 등받이에 기대는 게 낫지. 내 삶과 동떨어진 학문이며 사상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기대지 않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노리코 여사는 엄청난 독서를 했을 게다. 이런저런 사상과 학문을 섭렵했던 자만이 그처럼 쉽게 버릴 수 있다. 내가 조선 여자라 노리코의 시에 격하게 공감할지도…. 성리학과 불교와 모더니즘을 수입해 얼른 내 몸에 둘러야 했던 변방의 먹물들. 서재 가득한 책에 포위된 지식인의 사진을 볼 때마다 숨이 막힌다.


내 나라 안방을 점령한 무슨 무슨 클래스에 열광하는, 무슨 무슨 논리에 영혼을 바치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 유튜브의 시대, 내 눈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다리로 서 있지 못하고 부화뇌동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말이 없어진다면 삶은 더 간단하게 행복하거나 불행하겠지.

인간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내가 기대는 건 스포츠. 호주오픈 테니스가 시작되기 전에 편하게 앉을 소파를 사야겠는데, 아직 맘에 드는 소파를 발견하지 못했다. 내 맘에 딱 드는 물건이 아니라면 사지 말자. 어중간한 물건을 샀다 금방 버리느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오래 살면서 내가 배운 건 그 정도.
- 최영미<시인.이미출판 대표>

 

 

 

한파주의보
              홍수희


 



동안은 숨 쉬는 데 너무 충실하였네


그대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


나가는 기척도 듣지 못했어


비로소 세상에 한파주의보가 내리고


내 마음에도 거꾸로 매달린 고드름이 보일 즈음에야


그대 다녀간 발자국이 어름어름 눈에 비치네


잊었던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유리창을 덜컹대며 문을 열어라 하네

 

 

 

 

 

 

 

 

 

 

눈 위에 남긴 발자국 
                           용혜원

 

 



밤새 하얀 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다


눈 덮인 새벽길에
첫 발자국을 남기려니
마음이 상쾌하고 즐겁다


온통 하얀 세상을 보니
내 마음에까지 눈이 내린 듯 하다
눈을 밟으며 걷노라니
노래가 절로 나온다


행복은 늘 주변에 있다
하얀 눈이 내리는 날이면
하늘에서 복을 내려 주는 것만 같다


오늘은 하얀 눈 위에
첫 발자국을 만들며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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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야(除夜)
              이영도 (1916~1976)

 




밤이 깊은데도 잠들을 잊은 듯이
집집이 부엌마다 기척이 멎지 않네
아마도 새날 맞이에 이 밤 새우나 부다.


아득히 그리워라 내 고향 그 모습이
새로 바른 등(燈)에 참기름 불을 켜고
제상(祭床)에 제물을 두고 밤 새기를 기다리나.


벌써 돌아보랴 지나간 그 시절이
떡가래 썰으시며 어지신 할머님이
눈썹 센 전설을 풀어 이 밤 새우시더니.


할머니 가오시고 새해는 돌아오네
새로운 이 산천(山川)에 빛이 한결 찬란커라
어떠한 고담(古談)을 캐며 이 밤들을 새우노?

 


...............................
'눈썹 센'다는 말에 감기는 눈썹을 붙잡던 그믐밤. 
'기척이 멎지 않'는 부엌에선 맛있는 냄새 진동하고 설빔은 또 어른대고…. 
엄동설한에도 설맞이 집안은 훈훈하니 정겨웠다. 
모두 '떡가래 썰으시며' 가래떡 같은 '전설' 풀어주던 할머니며 할아버지들 후광이리.


그렇게 이어온 제수는 가문의 긍지였다. 
명절증후군 모르던 시절 얘기지만, 없는 살림에도 집집이 정성은 정갈하고 높았다. 
제야의 거룩함에 추위마저 삼가는 듯했다. 
한 살 더 먹는다고 몸가짐도 새삼 바로 했다. 
옛 그림이 된 제야, 이제는 '어떠한 고담(古談)을 캐며' 새우시는가?
- 정수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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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하늘
         구재기

 




조금은 
가난하게 살고 싶다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비어 있다는 것 
나의 사랑도 
그렇게 비어 있고 싶다 


비어 있는 곳을 찾아 
자꾸만 채우며 살아가고 싶다 


하늘은 늘 가난하다 
그래서 곧잘 구름 벗어 비어 있다 
비어 있을 때마다 
더욱 푸르러지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더욱 더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걸 보다가 
나는 그만 좌르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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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김나영


 



이 남자다 싶어서 
나 이 남자 안에 깃들어 살 
방 한 칸만 있으면 됐지 싶어서 
당신 안에 아내 되어 살았는데 
이십 년 전 나는 
당신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나 당신 밖에 있네 
옛 맹세는 헌 런닝구처럼 바래어져 가고 
사랑도 맹세도 뱀허물처럼 쏙 빠져나간 자리 
25평도 아니야 
32평도 아니야 
사네 
못 사네 
내 마음의 공허가 
하루에도 수십 번 이삿짐을 쌌다 풀었다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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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끝
              오세영


 

매운 고춧가루와 쓰린 소금과 달콤한
생강즙에 버물려
김장독에 갈무리된
순하디 순한 한국의 토종 배추
양념도 양념이지만
적당히 묵혀야 제 맛이 든다.
맵지만도 않고 짜지만도 않고
쓰고 매운 맛을, 달고 신 맛을
한가지로 어우르는 그 진 맛
이제 한 60년 되었으니
제 맛이 들었을까,
사계절이라 하지만 세상이란 본디
언제나 추운 겨울
인생은 땅에 묻힌 김칫독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인가
그 분이 독을 여는 그 때를 위해
잘 익어 있어야 할 그 김치.


               ('적멸의 불빛', 문학사상사, 2001)



 

 


 .................
어릴 적 명실상부한 겨울의 시작은 김장하는 날이었다. 
품앗이로 차출된 김장 특전사 아줌마들과 후방을 어슬렁거리는 조무래기와 장정들을 위해 돼지고기를 삶았다. 
생굴, 청각, 동태 등 해산물이 듬뿍 들어간 알싸한 양념을 구수한 수육에 얹어 배춧속에 싸먹는 그 맛이야말로 김장의 별미였다. 
물에 씻겨 소금에 절여지고,

 
독한 마늘과 고춧가루와 생강에 버무려져, 독에 묻혀 한겨울을 견뎌내는 김장김치의 맛! 
날것들을 죽이고 스스로 부드러워져 더불어 웅숭깊게 맛이 드는 숙성된 김치는, 그렇게 맛이 드는 우리 삶의 또 다른 비유다. 
겨울의 끝맛과 인생의 끝맛이 김치로 내통한다. 
겨우내 한 식구(食口)로 먹을 김치가 그득하면 월동 준비는 끝, 이제 겨울이 시작되어도 좋을 것이다.
- 정끝별<시인.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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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
                  이태정


 



모서리 앉지 마라 말씀하신 아버지가
명퇴 후 습관처럼 모서리에 앉아계신다
가운데 앉으세요 해도 고개만 저으신다
키도 작아지고 목소리도 작아지고
가장(家長) 자리에서 가장자리된 아픈 이름
한사코 가운데자리 앉혔다 눈시울이 뜨겁다




............................
자리로 사람값 매기는 게 세상의 인심이다. 
무슨 행사마다 의전에 예민한 것도 자리가 곧 위상인 때문이다. 
옆자리, 앞자리, 뒷자리 등 위치에 따라 그 표상이며 속내도 사뭇 복잡하다. 
'측근'이라는 오랫동안 득세해온 자리도 '최측근'에서 다시 '친(親)'이니 '진(眞)'으로 회자되며 자릿값을 깨우쳐준다. 
그런 당락이야 먼 데 일로 넘긴다지만, 아버지의 '명퇴'는 주변에 그늘을 드리울 우리 집안의 일이다.


'가장(家長) 자리에서 가장자리된 아픈 이름'들. 그렇듯 퇴직은 '키도 작아지고 목소리도 작아지'는 일이다. 
'명퇴'라지만 물러앉음 자체가 명예롭지 못한 이후를 만들기 때문이다. 
내려오는 자리가 있으면 올라가는 자리도 있을진대, 연말 탓인지 퇴직의 그림자들이 더 길게 쓸쓸하다. 
그래도 '가운데자리 앉'히고 싶은 이 땅 아버지들의 오랜 수고 덕에 또다시 꽃피는 봄은 올 것이다.(151218)
-정수자<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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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당부
                       김왕노





채송화 피면 채송화만큼
작은 키로 살자.
실바람 불면 실바람만큼
서로에게 불어가자.
새벽이면 서로의 잎새에
안개이슬로 맺히자.
물보다 낮게 허리 굽히고
고개 숙이면서 흘러가자
작아지므로 커지는 것을
꿈꾸지도 않고
낮아지므로 높아지는 것을
원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
벌써 올해의 마지막 달을 살고 있다. 
한 해가 시작될 때 소원했던 일의 목록을 살펴본다. 
잘된 일도 있고, 그렇게 되지 못한 일도 있다. 
"고요히 앉아 있는 곳에서는 차를 반쯤 우려냈을 때의 첫 향기 같고, 오묘하게 움직일 때는 물 흐르고 꽃 피듯이 하네"라는 말씀을 따라 살고자 했으나 미치지 못한 때가 많았다.


이 시에서 당부하고 있는 것처럼 채송화의 낮은 키만큼만 바라고, 실바람처럼 부드럽게 다가가고, 안개이슬처럼 맑고 투명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아주 억세지 않게, 공손하게, 누구를 앞서겠다는 생각을 반절 접고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문태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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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황필수





선생님!
그 한 마디가 좋아서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선생님!
그 한 마디가 좋아서
가진 것 다 주어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선생님!
그 한 마디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선생님!
그 한 마디가 좋아서 
평생을 
평생을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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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장(月葬)
                        김준태

 


달에 묻었네

서녘 초승달 속에

그대를 묻어 보냈네

옛 노래처럼

 

 

달에 묻었네

만장도

꽃상여도 없이

울음소리도 없이

 

 

달에 보냈네

떠오르는 달에

그대를 묻어

보냈네 꽃처럼

옛노래처럼!

 

 

 

 

 


...........................
‘그대’라는 호칭 속은 텅 비어서 종(鐘)과 같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길게 울려올 때가 있습니다.
쨍쨍한 가을 어느 날 문득 이름을 가리고 오는 먼 ‘그대’의 음성, 몸짓, 어여쁨, 연민….
그리움이 밀물집니다.
모든 이별에는 까닭이 있지만 후일 생각해보면 모든 이별엔 아무런 까닭도 없었습니다.


이제 맑게 씻고 나오는 달의 계절입니다.
그 앞으로 기러기도 끼루룩 지나갈 겁니다.
거기 그대가 있습니다. 회한이 있습니다.
월장(月葬), 달에 묻는 일! 이라니요.
아무 곳에도, 먼 훗날에도 차마 그 어떤 망각 속에도 묻을 수 없는 ‘그대’라는 뜻이겠지요.
‘서녘 초승달’ 있는 저녁, 입술에 ‘옛노래’가 얹히는 것은 필연입니다.
‘그대’를 불러 나를 달래는 노래입니다.
-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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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길
함명춘





또 갈 곳 잃어 떠도는 나뭇잎이랑, 

꼭 다문 어둠의 입속에 있다 한숨처럼 쏟아져 나오는 바람이랑, 

상처에서 상처로 뿌리를 내리다 갈대밭이 되어버린 적막이랑, 

지나는 구름의 손결만 닿아도 와락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별이랑, 

어느새 잔뿌리부터 하염없이 젖기 시작하는 풀잎이랑, 

한 줌의 흙 한 그루의 나무 없인 잠시도 살 수 없는 듯 어느 결에 맨발로 내려와  둑길을 걷는 달빛이랑




.......................................
책의 옛 사진을 보다가 지금의 내 사는 동네를 만나 반가웠습니다. 
반쯤 부서진 살곶이 다리 풍경이었는데요, 돌다리 저편 뚝섬 언덕 위가 아름다운 ‘둑길’이었습니다. 
둥글게 둥글게 곡선으로만 이어진 그 생명 가득한 길 위에 어린아이들이 노는지 걷는지 아득한 몇 점으로 보였는데 보나마나 신이 났겠습니다. 
그 둥긂의 세계에서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지금, 그쪽은 차들 쌩쌩 달리고 시멘트로 직각 벽을 해놓았습니다. 
발전한 걸까요? 글쎄요.


이 시를 만나니 저절로 그 풍경이 떠오릅니다. 
시에 ‘둑길’의 중생(衆生)이 즐비합니다. 
‘나뭇잎’, 어둠에서 쏟아져 나오는 ‘바람’, 적막의 ‘갈대밭’,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별’들…. 
이것을 향한 마음이면 시쳇말로 ‘힐링’입니다. 
인간들에게 지친 삶을 이 ‘둑길’의 뭇 생명들이 치유합니다. 
‘큰물’이 날 때마다의 쓸모이니 평소에는 아무 일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 아무 일 없는 듯한 것의 큰 쓸모를 ‘효율’이라는 좀벌레는 알 턱이 없으니 이제 자연에서나 사회에서나 ‘둑길’은 잘 없습니다. 
휘파람 불 데가 없습니다!
-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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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변
        신효식



사람이 늙는다는 건
바나나가 오래되는 것과 같다
샛노란 얼굴엔 검버섯이 늘어나고
젊은 날 우람하고 튼실했던
몸은 구부러지지만,
딱딱했던 마음에는
연륜이라는 여유가 더해져
'그래 그건 그렇지
그것도 맞는 말이지'
하며 생각은 말랑말랑 해지고
삶은 더 달콤해진다.


                     (2015 시민공모작)

 

 

 

 

오래된 가을  
                 천양희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엽같이
버림받은 기억에 젖은 적이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서 있어본 적이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더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다.

 

 

 

 

                                                오래 전부터 저녁은                               

                                                               송재학




오래 전부터 나는 이곳에 서 있었네 
저녁밥이 헐은 입으로 들어갈 때 
늦은 불빛 사이 길들이 기다림으로 들먹거릴 때 
나는 이곳에 엎드려 
슬픔이 추려내는 환한 석남꽃에 기대었네 


누군가 저녁을 열고 유혹을 만나네 
끔찍한 신음소리와 울음이 초조한 발밑을 적시네 
희망을 따라가는 일은 싸움, 그러나 
사람들은 하루의 아픔에 잡히기를 원치 않네, 오직 
그들은 밤의 두려운 이불을 끌어당길 뿐 


저녁은 많은 얼굴을 붙들고 숨죽인 채 부풀어 있거나 
저녁은 죽음과 비슷한 옷자락을 갖추었네 


나무는 노을만 바라본 듯 금빛 가운데 무너져 
저녁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네. 
저녁은 곧 베어먹을 수 있는 고기처럼 검붉어 
낯설은 비애의 냄새로 가득한 정육점만 길가에 즐비하네 


누군가 나처럼 세월에 떠밀리네 
시든 꽃잎을 단 창문이 닫히고 
저녁은 어느 곳에 닿으려고 저토록 많은 불빛을 쌓아가는지 

 

 

 

 

내 가슴 빈터에 네 침묵을 심는다                                        
                    
                                      김정란   








네 망설임이 먼 강물소리처럼 건네왔다 
네 참음도 
네가 겸손하게 
삶의 번잡함 쪽으로 돌아서서 모르는 체하는 그리움도 


가을바람 불고 석양녘 천사들이 네 이마에 
가만히 올려놓고 가는 투명한 오렌지빛 
그림자도 


그 그림자를 슬프게 고개 숙이고 
뒤돌아서서 만져보는 네 쓸쓸한 뒷모습도 


밤새 
네 방 창가에 내 방 창가에 
내리는, 내리는, 차갑고 투명한 비도 


내가 내 가슴 빈터에 
네 침묵을 심는다, 한번, 내 이름으로, 


너는 늘 그렇게 내게 있다 
세계의 끝에서 서성이는 
아득히 미처 다 마치지 못한 말로 


네게 시간을 줘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쓴다, 내 가슴 빈터에 


세계가 기웃, 들여다보고 제 갈 길로 가는 
작은, 후미진 구석 


그곳에서 기다림을 완성하려고 
지금, 여기에서, 네 망설임을, 침묵을, 거기에 심는다, 
한번 더, 네 이름으로, 


언제든 온전히 말을 거두리라 


너의 이름으로, 네가 된 나의 이름으로



 

 

 

 

사랑법 첫째 
고정희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그 사람에게 
                            신동엽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건너편 가을
                         심재휘



비가 그치고 늦가을 바람이 분다
어제보다 조금 더 눈이 맑고
주머니가 많은 바람이 분다


집 앞 오래된 은행나무 숲을 쓰다듬으며 가을이
동쪽으로 기울어진 소리를 내며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오전에 나갔던 길을 되짚어
은행나무 숲길로 돌아오는 사람


오늘은 바람이 불고
우 우 바람이 불고
사람의 어깨를 저녁이 어루만진다



..................
가을 찬비 지나가고 나면 훨씬 스산하고 쓸쓸한 데가 많다. 
가을바람은 냉담하다. 가을바람은 옹색하다. 한 채의 빈집 같다. 
그러나 가을바람은 으스스하긴 해도 흐리터분하지는 않다. 
흐린 정신을 바로 세운다. 가을바람은 서리처럼 흰빛이다. 
이처럼 가을이 기울어져 지나가고 나면 나무는 앙상한 가지로 차림차림이 간편해지고, 

숲의 살림은 더욱 단출해질 것이다. 
그것이 나무와 숲의 본래 면목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있던 자리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길을 떠났던 사람이 그 행로를 되짚어 출발지로 다시 돌아오듯이.


이제 해는 일찍 떨어진다. 가을의 주위는 점점 일찍 어두워진다. 
행인들은 이리처럼 점점 사나워지는 날씨 속에 있다. 
그러나 안온하게 감싸주는 이가 없지만은 않다.  내 바로 맞은편을 지나가는 가을의 얼굴을 본다.
- 문태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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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울 때
                         강경호



꽃은 지는 아픔으로
우는 것이 아니다


내 사랑을 얻은 날 아침
정원의 꽃을 바라볼 때
이슬에 젖은 꽃이
연분홍 기쁨을 활짝 펴 울고 있었다


내 사랑이 떠난 날 저녁
정원에 앉아 숨죽여 울 때
벌레 먹은 꽃이
푸른색 슬픔을 말아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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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길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주고 싶다.

 


누군가
책꽂이에 꽂혀 있는 나를
뽑아주었을 때는.

 


가끔씩 사람들이
나를 집어던져
몸을 망가지게도 하고
멍들게도 하지만

 


나를 선택한
그 사람을 위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주고 싶다.

 


내 몸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는.



 

 

 
.................
가을을 흔히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아이들은 책을 읽을 겨를이 없다. 
학원 다니느라 오락 게임하느라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만 책 읽는 것처럼 중요한 공부가 어디 있으랴. 
모든 학습은 책을 읽고 이해하는 독해력이 바탕이 된다는 것을 왜 모를까.


나무로 만든 종이책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어 한다. 
자신의 몸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히기를 소망한다. 
별들이 불을 밝히면 귀뚜라미도 밤새워 책을 읽는 가을이다. 
이런 가을에 가장 보기 좋은 것은 아이들이 책을 읽는 모습이요,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책장을 사락사락 넘기는 소리일 것이다.
- 이준관<아동문학가>

 

 

 

 

 

 

 

 

 

가을 
나호열


 

                                        툭…… 
                                        여기 
                                        저기 
                                        목숨 내놓는 소리 
                                        가득한데 
                                        나는 배가 부르다

 

 

 

 

 

 

 

 

 

 

 

다시 해바라기

김중식

 

 

 

이 세상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가자,
해서 오아시스에서 만난 해바라기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겠으나
딱 한 송이로
백만 송이의 정원에 맞서는 존재감
사막 전체를 후광(後光)으로 지닌 꽃

 

앞발로 수맥을 짚어가는 낙타처럼
죄 없이 태어난 생명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는
성모(聖母) 같다
검은 망사 쓴 얼굴 속에 속울음이 있다
너는 살아 있으시라
살아 있기 힘들면 다시 태어나시라

 

약속하기 어려우나
삶이 다 기적이므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사막 끝까지 배웅하는 해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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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버리지 못했다

김수열

 

 

 

 

닳고닳아 더는 신을 수 없어
신발장 구석이나 차지하고 있는
한갓 쓰레기에 불과한 것들이지만
함부로 버리지 못했다


나를 데리고 걸어온 숱한 길을 생각하면
살아온 날들조차 폐기처분되는 것 같아
함부로 버리지 못했다


가야할 길만을 걸어온 것도 아닌데
가고 싶지 않은 길도 가고
가서는 안 될 길을 간 적도 많은데
그래도 나를 데리고 온 길이
한순간에 지워질 것 같아
여태껏 버리지 못했다


어쩌다 술자리에서 바꿔 신었을지라도
그 사람이 걸어온 당당함 혹은 비틀거림이
나로 하여 사라질 것만 같아
함부로 버리지 못했다


신발장을 열 때마다 아내는
신지도 않는 걸 왜 모셔 두냐며 핀잔이지만
때가 되면 버린다 얼버무릴 뿐
언제 버려야 하는지
꼭 버려야만 하는지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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