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여! 수종사에 오시려거든 세욕(世慾)의 옷 훌훌 벗어버리고 선(善)마음 하나만 가지고 오십시오 행여, 힘들다고 차를 타고 오시질랑 말고 그져 산길따라 산다랑치 논 쟁기질 하듯 그렇게 천천히 고삐를 늦추고 산길에 핀 원추리꽃 달맞이꽃 그리고 금불초 양지꽃 같은 그 이름들을 불러내어 손인사라도 나누며 천천히 오십시오 오시는 길에 혹, 조안면 능내리에 이르거든 잠시, 다산 유적지에 들러 초당에 앉아 오순도순 대화도 나누시고 목민심서 한구절 읊어도 좋고 내친김에 여유당, 기념관을 둘러봐도 좋으리 그러나 북한강 남한강이 서로 그리움을 안고 흐르다가 양수강(兩水江)에서 만나 포옹을 하며 몸을 섞는 것을 보시고 행여, 발길 멈춰 유혹되지 말고 눈인사만 나누고 오십시오 누구나 수종사에 오실때는 세월에 옹이 박힌 가슴의 상처 하나쯤 안고 오시겠지만 그렇다고 북한강이나 남한강물에게 속마음 내비치시는 마십시오 삼정헌에 앉아 마음의 문 활짝 열고 녹차 한잔 음미하기 전까지는 그대는 아직 수종사에 이르지 못한 것, 비로소 수종사에 올라 감로수 한잔 드시고 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水鐘소릴 들어보십시오 그럼, 아미타불의 미소가 마음에 떠오르면 그땐, 세욕(世慾)의 짐 모두 부려놓고 허리 굽혀 두손을 합장해도 좋으리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 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 성공이란 무엇일까? 전투에서 승리한 군대와 패배해 죽어가는 병사의 이미지를 대비시키며 시인은 패배를 경험한 자만이 성공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가장 쓰라린 허기를 경험한 자가 과일즙의 달콤한 맛을 안다는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허기가 너무 심하면 주스를 마셔도 주스의 순수한 맛을 모를 수 있다. 허기가 너무 심하면 주스를 급하게 마시다 죽을 수도 있다. 적당히 목마른 자가 과일즙의 맛을 음미할 줄 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은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평가받지만, 에밀리 디킨슨은 살아서 시집 한 권 펴내지 않았고, 자신의 시에 제목을 붙이지도 않았다. 시 ‘성공…'을 읽으며 매사추세츠의 집과 마을을 떠나지 않았던 ‘은둔 시인’ 디킨슨에 대한 선입견이 깨졌다. 그녀도 성공을 갈망했었다. 영화 ‘조용한 정열’에서는 예민하고 까칠한 노처녀로 그려졌지만 에밀리 디킨슨의 세계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넓고 깊었다 -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차마, 사랑은 여윈 네 얼굴 바라보다 일어서는 것 묻고 싶은 맘 접어두는 것 말 못하고 돌아서는 것 하필, 동짓밤 빈 가지 사이 어둠별에서 손톱달에서 가슴 저리게 너를 보는 것 문득, 삿갓등 아래 함박눈 오는 밤 창문 활짝 열고 서서 그립다 네가 그립다 눈에게만 고하는 것 끝내, 사랑한다는 말 따윈 끝끝내 참아내는 것
.......................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학창 시절에 이웃집 담벼락 위로 뻗은 감나무에 매달린 감을 보며 가을을 느끼곤 했는데, 요즘 도시인들은 감나무를 보기 힘들다. 어디 하나 뺄 곳 없이 순도 높은 시어들로 완성된 시. “떫고 비리던”이라니. 얼마나 생생한 표현인가. 덜 익은 감의 떫은맛에 “비리던”이 들어가 청춘의 아픔과 서투른 우여곡절이 연상되었다. 더 이상 떫고 비리지도 않은 ‘내 피’가 갑자기 약동하면서 빈속에 소주 한 병을 들이부은 듯 가슴이 쓰렸다.
허영자 선생님은 현존하는 한국 시인 중에서 한국어의 맛과 향기를 가장 잘 구사하는 시인 중 한 분이시다. 당신의 시를 읽을 때마다 노래처럼 자연스러운 리듬을 느끼는데, 아마도 시를 쓸 때 일부러 의식하지 않아도 우리말의 전통적인 운율이 몸에 배어 그대로 나오는 것 같다.
어머니는 연시를 좋아하셨다. 작년 봄에 어머니를 잃은 뒤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어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자식은 부모가 죽어야 철이 들어요.” -최영미<시인.이미출판 대표>
그러려무나 물기 완전 날아가고 빈 젖 같은 마른 씨 안고 있는 화형 직전의 고추같이 바다를 제 몸 안으로 거둬들였음에도 바짝 마른 멸치같이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 붉은 고추가 한옥 마당에서 마르고 있다. 아마도 '앞니만 한 뜰'에서였을 것이다. 물기가 다 날아가서 없어지고 있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처럼 가을이 마르고 있다. 가을 햇살에 하나의 풍경도 마르고 있다. 우리 모두도 마른다. 수척해진다. 구르는 낙엽처럼 종일 뒤척인다. 형체가 왜소해진다. 비워진다. 그리하여 무념(無念)에 이르러도 좋을 일이다.
신달자 시인은 시 '계동 가을'에서 '구절초// 한 잎 같은// 방에 누워// 그 꽃잎만 한 이불로// 11도의 서늘함을 가리고// 그 꽃잎 하나 같은// 내일을 생각하다'라고 썼다. 가을에는 실로 우리도 구절초 한 잎 같다. 한 잎처럼 작아져 한 가닥 바람에 홀로 흔들린다. - 문태준<시인>
마음에 병을 얻어서 나누어줄 게 없다. 얻은 것이 하필 병이라면 병이라도 나누어야 한다. 아프다고 말하면서 아픈 마음을 나누고 아픈 마음을 덜어가는 사람에게 더 아프라고 채근하지는 못해도 은근히 바라는 마음이 병을 나눈다. 염치도 없이 병을 나누려면 병이 깊어야 한다. 마음이 깊어야 병도 깊다. 병이 깊어야 나눌 수 있는 마음도 깊어지는 법. 한없이 깊어지다 보면 병도 법이 되는가 보다. 그걸 생각하면 아프다. 아픈 사람이 아프면 아프지 않은 사람도 아프다. 그래서 아프다. 이 아픈 현실을 못 이겨서 떠나는 사람도 아프다. 남아 있어도 아프고 떠나 있어도 아픈 사람. 그가 아프다고 전갈을 보내면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 어느 쪽에서 그 소식을 듣고 움직여야 할까. 아픈 쪽에서 더 아픈 쪽으로 움직이다 보면 모두가 아픈 것처럼 아프다. 더 아프지 말아야지. 이런 충고를 하는 사람도 아프다. 아파서 여기까지 왔다. 어서 일어나라고 아픈 사람이 말했다.
땡볕 속에서 쟁기를 끄는 소의 불알이 물풍선처럼 늘어져 있다 아버지는 쟁기질을 하면서도 마음이 아프신지 자꾸만 쟁기를 당겨 그 무게를 어깨로 떠받치곤 하셨다 금세 주저앉을 듯 흐느적거리면서도 아버지의 말씀 없이는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는 소 감나무 잎이 새파란 밭둑에 앉아서 나는 소가 참 착하다고 생각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아버지는 동네 앞을 흐르는 거랑 물에 소를 세우시고 먼저 소의 몸을 찬찬히 씻겨준 뒤 당신의 몸도 씻으셨다 나는 내가 아버지가 된 뒤에도 한참동안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으나 파킨슨씨병으로 몸의 근육이란 근육이 다 자동차 타이어처럼 단단해져서 거동도 못하시는 아버지의 몸을 씻겨드리면서야 겨우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힘들고 고단한 세월을 걸어오시는 동안 아버지의 소처럼 나의 소가 되신 아버지 아버지가 끄는 쟁기는 늘 무거웠지만 나는 한번도 아버지를 위해서 백합처럼 흰 내 어깨를 내어드린 적이 없다 입술까지 굳어버린 아버지가 겨우 눈시울을 열고 나를 바라보신다 별이 빛나는, 그 사막의 밤처럼 깊고 아득한 길로 아직도 무죄한 소 한 마리 걸어가고 있다
처음엔 풀 밑으로 숨기 바빴지 한 번 주고 두 번 주고 며칠 지나니 이제는 살랑살랑 마중을 오네 먹이 몇 번 주었을 뿐인데 금붕어와 나 사이에 길이 든 거야
길든다는 말 길들인다는 말
금붕어와 나 사이에 길이 든다는 거였어 살랑살랑 길을 들인다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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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든다는 것은 익숙하게 된다는 뜻이다. 정 붙이고 의지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길들기 위해서는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한다. 눈빛과 조용조용한 귓속말과 작은 몸짓 등을 주고받아야 한다.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된다. 주고받으면서 서로가 잇닿게 되고 그리하여 마음이 쉽게 돌아서지 않게 된다.
길든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이 시는 금붕어가 가르쳐져 길드는 일을 보여준다. 물론 화자가 가르쳐져 길드는 일도 동시에 보여준다. 금붕어와 화자 사이에는 나음과 못함이 없이 대등하다. '살랑살랑'이라는 말에는 정붙이는 일의 부드러움과 유쾌함이 잘 배어 있다. 마치 미풍이 자꾸 가볍게 불어오는 것만 같다. - 문태준<시인>
....................... 내가 읽은 서시 중에 가장 아름다운 서시. 시집 ‘남해 금산’의 첫머리에 나오는 시인데, 젊은 날 이성복 시인의 날카로운 감수성과 순수한 열정이 우리를 긴장시킨다. 그냥 그렇고 그런 상투적인 표현이 거의 없고, 쉬운 듯 어렵고 어려운 듯 쉬운 시다. ‘늦고 헐한’ 저녁. 싸구려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은 시인은 사랑을 (혹은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며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를 걷는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이 거리는 내게 낯설다.
그는 공감각적 심상에 아주 능한 시인이다. 2연의 3행을 보라. ‘새소리’(청각)가 ‘번쩍이며’(시각) 흘러내리고… ‘몸 뒤트는 풀밭’이라니. 참으로 창의적이며 애절한 묘사 아닌가. 그의 시는 마치 움직이는 그림 같다. 사랑이라는 진부한 감정을 이토록 새롭게 역동적으로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시인의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사랑을 갈구하는 불안한 청춘의 어느 저녁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눈물이 난다. -최영미<시인.이미출판 대표>
담벼락 같은 세상에 누가 아무렇게나 갈겨 쓴 글 같은 것들 너를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제멋대로 그려 놓은 기호나 부호 같은 것들 아무도 해석할 수 없게 써 놓은 암호 같은 것들 눈 앞에 저렇게 가득히 서 있는 것들 나무 빼곡하게 들어선 숲 같은 것들 물 가득 흐르는 강 같은 것들 그 위로 날아가는 새들 그 속으로 헤엄치는 물고기들 지상에 누가 함부로 풀어 놓은 것들 예고도 없이 흩날리는 눈발 같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같은 뜨고 지는 일월(日月)이나 변함없는 천지(天地) 같은 것들 지울 수 없게 아로새긴 *연비(聯臂) 같은 것들 두 다리로 걸어가는 것들 네 다리로 달려가는 것들 대지를 돌아다니며 낙서하는 것들 동굴 같은 세상에 너를 갖고 싶다고 원한다는 말 대신에 손으로 발로 마음으로 그려 놓은 무늬같은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