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낯설다
천양희

 


우울이 우물처럼 깊다고 말할 때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노래가 좋아질 때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받침을 물끄러미 볼 때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할 때


소유를 자유로 바꾼 사람을 잊어버릴 때


슬픔을 이기려고 꽃 속에 얼굴을 묻을 때


목 놓은 바람 소리 나를 덮칠 때


먼 것이 있어서 살아 있다고 중얼거릴 때


남의 고통 앞에 '우리'라는 말을 쓰고 후회할 때


흰 구름으로 시름을 덮으려고 궁리할 때


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쓸 때
나는 낯설다

 

 

*조용필  「그 겨울의 찻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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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 
         조용미
 



마늘과 꿀을 유리병 속에 넣어 가두어두었다 두 해가 지나도록 깜박 잊었다 한 숟가락 뜨니 마늘도 꿀도 아니다 마늘이고 꿀이다 

 

당신도 저렇게 오래 내 속에 갇혀 있었으니 형과 질이 변했겠다 

 

마늘에 緣하고 꿀에 연하고 시간에 연하고 동그란 유리병에 둘러싸여 마늘꿀절임이 된 것처럼 

 

내 속의 당신은 참당신이 아닐 것이다 변해버린 맛이 묘하다 

 

또 한 숟가락 나의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 줄 마늘꿀절임 같은 당신을, 

 

가을밤은 맑고 깊어서 방안에 연못 물 얇아지는 소리가 다 들어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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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법
          홍관희

 

 



살다가

사는 법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길을 멈춰 선 채

달리 사는 법이 있을까 하여
다른 길 위에 마음을 디뎌 보노라면

그 길을 가는 사람들도 더러는
길을 멈춰 선 채
주름 깊은 세월을 어루만지며

내가 지나온 길 위에
마음을 디뎌 보기도 하더라

마음은 그리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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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 
           도종환



그의 시는 비단처럼 화사하지 않다  

그의 시는 달변이지 않고  

세련된 기교로 탄성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그의 시는 연필로 쓴 시라서  

읽다가 조금 고쳐도 될 것 같다  

다소 어눌한 데가 있고 투박한 것은  

고향 언저리를 맴돌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잡곡밥처럼 따스해서  

천천히 음미하며 읽게 된다  

그가 뜨겁기보다 따스한 사람이라 그럴 것이다  

그는 시를 쓰다가 가만히 눈물을 흘리곤 한다는데  

그래서 그의 시를 읽다가 눈물 날 때 있다  

사는 건 고달프고 

많이들 외로워한다는 걸 그는 안다  

그 자신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읽는 동안 남을 용서하게 되는 것도 좋다  

그의 시는 깃발처럼 휘날리지 않고  

나팔 소리가 되어 전선으로 몰려가게 하지도 않는데  

어떤 때는 명치끝을 뜨겁게 하고  

주먹을 쥐게 한다



그의 눈빛이 맑기 때문이다

맑은 눈으로 차분하게

먼 노을을 응시하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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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저녁의 버스킹

                           김종해

 

 

 


나뭇잎 떨어지는 저녁이 와서
내 몸속에 악기(樂器)가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간 소리 내지 않았던 몇 개의 악기
현악기의 줄을 고르는 동안
길은 더 저물고 등불은 깊어진다
나 오랫동안 먼 길 걸어왔음으로
길은 등 뒤에서 고단한 몸을 눕힌다
삶의 길이 서로 저마다 달라서
네거리는 저 혼자 신호등 불빛을 바꾼다
오늘밤 이곳이면 적당하다
이 거리에 자리를 펴리라
나뭇잎 떨어지고 해 지는 저녁
내 몸속의 악기를 모두 꺼내어 연주하리라
어둠 속의 비애여
아픔과 절망의 한 시절이여
나를 위해 내가 부르고 싶은 나의 노래
바람처럼 멀리 띄워 보내리라
사랑과 안식과 희망의 한때
나그네의 한철 시름도 담아보리라
저녁이 와서 길은 빨리 저물어 가는데
그동안 이 생에서 뛰놀았던 생의 환희
내 마음속에 내린 낙엽 한 장도
오늘밤 악기 위에 얹어서 노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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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는 길 
            -어느 학생의 말-

         정희성

 

 


모든 문제의 답은 학교에 있고 
정답은 언제나 근엄해서 
담임선생님의 얼굴 같지요 
답답한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삼차방정식보다 난해하게 변해 버린 
선생님의 표정을 읽으며
정답까지 가는 길은 너무도 아득해 
나는 가끔 다른 길을 갑니다
비록 험하기는 하지만 
이 세상 어딘가엔 즐거움도 있겠지 
생각하며 길모퉁이 돌아서면 
찍소리 말고 공부나 하라는 
어머니의 고함소리 멀어지고 
친구가 다닌다는 공장을 지나면 
신축공사장 인부들 
오락실 근처에선 재수할 때 만난 
친구의 옆보습도 보이지요 
무언가 고달파 보여도 
정답처럼 엄숙하지 않아서 
볼수록 정다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나는 교실로 돌아오곤 하지요 
그러면서 나는 자신에게 곧잘 
어리석은 질문을 던집니다 
ㅡ정답은 학교에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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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 5 
        이정하 

 

 



 가야할때가언제인지분명히알고간다는사람 
 마치그때가오기를기다렸다는듯이 
 훌훌털고일어서는사람 
 그러면서또무슨말은그리많은지 
 사랑했네못잊을거네다시돌아올거네 
 떠나려면그냥떠나라공연히개폼잡지말고 
 너는가도내사랑엔흠집을내고싶지않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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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박철

 

 



갈참나무 허리에

연선아 좋아해, 하고 새기는 일이나

원고지에 몇 자 적는 일이나

본질은 같다



의자 모서리를 움켜쥐고 그때 그 자리에

다시 노을이 젖어오고

나는 더 우회적으로 이 일을 생각한다



어떤 기적이 있어

기대앉은 의자에 새잎이 돋고

수맥이 흐르고

나는 둥둥 떠서

기어이 너에게 갈 수도 있다

 

 

이렇게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겠다. 
첫 사랑의 푸르른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지금 그는 의자를 유심히 바라본다. 
의자는 낡은 정물이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 
어쩌면 의자는 갈참나무를 켜서 만든 의자일지도 모른다.

갈참나무에는 “연선아 좋아해”라는 사랑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오늘 해질녘에는 노을이 축축하게 의자에 앉는다. 
의자는 수많은 계절이 흐르고 지나가는 것을 보아왔다. 
그는 정물인 의자가 다시 활물(活物)로, 갈참나무로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한다. 
파릇한 새잎처럼 새뜻하고, 두근거리고, 빛이 많아 찬란하고, 속마음이 둥둥 높게 떠서 가던 그 첫사랑의 때로, 순수한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묻는다.


박철 시인은 시 ‘소년에서’를 통해 그때의 어린 자아를 나무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멀리 대지에, 대지를 향하여, 대지를 이루고/ 너는 너 하나로 가득 자유와 생명을” 가꾸며 살라고 말한다. 
내게도, 모든 이들에게도 이렇게 속삭여주고 싶은, 어린아이가 각자의 마음속에 있을 테다.
-문태준<시인>

 

 

 

 

 

 

 

 

 



 

 

 

 

 

 

정직한 사람 
박세현

 

 



잿빛 슬래트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


서로 가녀린 정을 이어붙이며 살아가는 나라


떠나는 사람은 또 어디론가 훌쩍 떠나가고


다시 오는 사람은 또 그만그만한 인생을 앞세우고


방 둘 부엌 하나인 사택으로 접어들어 살 같은 이웃이 된다


아직도 비어 있는 17호 사택의 벽바닥엔


정직한 사람이라고 씌어진 낙서와


그림책에서 오려낸 티티새 두 마리가


떠나간 주인의 생활을 회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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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편지 
마종기 
  

 



무모한 여름이여. 
꽃들은 여기저기서 
책임도 지지 못할 
임신을 하고, 
풀도, 나무도, 나도 
여름이면 도둑처럼 
지붕 위로 올라갔었다. 


지붕 위의 하늘은 
몇 개쯤이던가. 
애매한 맹세를 은근히 
사방에 흘리면서 
날개 빠른 새가 되어 
사방을 들뜨게 했다. 
아, 정말 들뜨게 했다. 
모든 약속이 아름답게 
향기처럼 우리를 울렸다. 


궁색한 여름이여. 
우리가 믿은 하늘은 
구름처럼 희고 
트럼펫 소리는 높고 낮게 
춤을 추었다. 
그리고 우리는 잤다. 
잠속에 내린 소낙비가 
여름을 적시고 
피부에 남은 물기가 
차갑게 외면할 때까지 
우리는 바람을 타고 있었다. 


파랑새도 굴뚝새도 
돌아가야 할 길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우리는 그해부터 
늙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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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여름을 사랑합니다 
이채

 


겨울은 덥지 않아서 좋고 
여름은 춥지 않아서 좋다는 
넉넉한 당신의 마음은 
뿌리 깊은 느티나무를 닮았습니다 


더위를 이기는 열매처럼 
추위를 이기는 꽃씨처럼 
꿋꿋한 당신의 모습은 
곧고 정직한 소나무를 닮았습니다 


그런 당신의 그늘이 편해서 
나는 지친 날개 펴고 
당신 곁에 머물고 싶은 
가슴이 작은 한 마리 여름새랍니다 


종일 당신의 나뭇가지에 앉아 
기쁨의 목소리로 
행복의 노래를 부르게 하는 
당신은 어느 하늘의 천사인가요 


나뭇잎 사이로 파아란 열매가 
여름 햇살에 익어가고 있을 때 
이 계절의 무더위도 신의 축복이라며 
감사히 견디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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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박연준(1980~)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이따금 한번씩은 비를 맞아야

동그랗게 휜 척추들을 깨우고, 주름을 펼 수 있다

우산은 많은 날들을 집 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보낸다

눈을 감고, 기다리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

벽에 매달린 우산은, 많은 비들을 기억한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

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

벽에 매달려 온몸을 접은 채,

그 많은 비들을 추억하며

그러나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
우산을 소재로 이런 시도 쓸 수 있구나. 
애정을 가지고 살펴보면 우리 주위의 모든 사물이 시의 재료가 될 수 있다. 
깜찍하고 발랄하고 감각적인 언어에서 젊음이 느껴진다. 
시인은 우산이 되어, 비를 기다리는 우산의 마음을 헤아린다. 
비가 오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어져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지만, 우산이 하나도 없는 집은 없으리라.

우산을 발명한 뒤 인류는 더 바빠졌고 노동 착취는 더 심해졌다. 
비 오는 날, 동굴에만 집에만 갇혀있지 않고 밖으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으니 우산처럼 고마우면서 얄미운 존재가 또 있을까. 
우리 집 신발장에는 한 번도 비를 맞지 않은 우산이 두 개나 있다. 
너무 오래 펼치지 않은 우산을 최근에 꺼내 펼쳐 보았더니 색이 바래 보기 싫었다. 
너무 오래 우산을 기다리게 하지 말자.
-최영미<시인.이미출판 대표>

 

 

 

 

 

 

 

 

 

 

농무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 친들 무엇하랴.

비룟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강은교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

‘이렇게’를 넣은 것이 신의 한 수. 
시의 방관자였던 독자들이 ‘이렇게’를 보며 적극적인 행위자로 동참하는 변화가 일어난다. 
나무들이 흔들리는 숲에서 나도 따라 흔들리는 것처럼, 내가 나무 넷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착시. 
이것이 시인의 능력이며 리얼리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가서 우리 함께 싸우자! 라고 외치지는 않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서 항거했던 이 나라 풀뿌리 민초들의 저항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시다. 
존재와 존재의 관계를 탐구하는 모양새가 어딘지 불교 철학과 닿아 있다. 
시인도 그렇게 흔들리며 고개를 젓던 나무의 하나였기에 이렇게 빼어난 작품이 나오지 않았나. 
이 시에 나무들을 흔들리게 하는 ‘바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시를 한 줄 한 줄 베끼다 보면 예전에 모르던 시의 묘미를 발견하게 된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바다 옆에 집을 짓고


                                한기팔(1937~2023)

 

 

 



바다 옆에

집을 짓고 살다 보니까

밤이면

파도소리, 슴새 울음소리 들으며

별빛 베고

섬 그늘 덮고 자느니

그리움이 병인 양 하여

잠 없는 밤

늙은 아내와

서로 기댈

따뜻한 등이 있어

서천에 기우는 등 시린 눈썹달이

시샘하며 엿보고 가네.

 

 

..........................................



한기팔 시인은 서귀포시 보목동에서 태어났다. 
시인은 시 ‘보목리(甫木里) 사람들’에서 “보오보오/ 물오리 떼 사뿐히 내려앉은/ 섶섬 그늘/ 만조때가 되거든 와서 보게”라고 써서 고향의 풍광을 소개했고, “이 시대의 양심인 양/ 아무 말이 필요치 않은/ 사람들”이라고 써서 고향 사람들의 인품을 칭송했다.


파도 소리가 앞마당까지 철써덕철써덕 밀려오는 곳에 시인의 집이 있다. 
먼바다와 섬과 수평선을 바라보며 산다. 
시인은 “아침을 나는 새처럼/ 깨끗하게 살기 위하여”라고 노래하기도 했는데, 그런 새의 울음소리가 밤에도 들려왔을 것이다. 
바닷가에 살고 있으니 호젓하고 또 때로 적적하기도 했을 터이다. 
그래도 아내에게 의지할 수 있다. 등을 비스듬히 댈 아내의 따뜻한 등이 있다. 
시인이 “햇빛 고운 날/ 목련꽃 그늘에/ 늙은 아내와 앉으니/ 아내가 늙어서 예쁘다”라고 노래한 그 아내가 옆에 있다. 
서쪽 하늘에는 눈썹 모양의 달이 떴다. 깜깜한 공중에 홀로 있으니 기댈 데가 없어서 등이 시려 보인다. 
시인은 파도처럼 뒤척이다 이내 잠잠하게 있는 수평선처럼 고요한 잠에 들었을 것이다.
-문태준<시인>

 

 

 

 

병(病)에게
조지훈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이외수

 

 


울지 말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 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 나서지
바람이 차다고
고단한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산다는 건 만만치 않은 거라네
아차 하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망가지기 십상이지
어쩌다 좋은 날도 있긴 하겠지만 
그거야 그때뿐이지
어느 날 큰 비가 올지
그 비에 뭐가 무너지고 
뭐가 떠내려갈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것이지
희망이라도 하나 품고 사는 건 행복한 거야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

자, 한잔 들게나
되는 게 없다고 
이 세상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술에 코 박고 우는 친구야 

 

 

 

 



 

 

 

 

 

시를 읽는다 
                 박완서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 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꽃을 따르라 

                   정호승

 



돈을 따르지 말고
꽃을 따르라

봄날에 피는 꽃을 따르지 말고
봄날에 지는 꽃을 따르라

벚꽃을 보라
눈보라처럼 휘날리는 꽃잎에
봄의 슬픔마저 찬란하지 않으냐

돈을 따르지 말고
지는 꽃을 따르라

사람은 지는 꽃을 따를 때
가장 아름답다

 



.............................................
꽃이 오고 있다. 꽃이 와서 봄에게 새 의상(衣裳)을 입히고 있다. 산과 들에 헐벗은 구석이 사라지고 있다. 
시인은 봄날에는 꽃을 좇아서 꽃 가는 대로 같이 가라고 말한다. 
돈을 선호하지 말고 꽃을 애호하라고 말한다. 꽃을 맘껏 완상하라는 권유이기도 하겠다. 
그런데 피는 꽃보다 지는 꽃을 숭상하라는 속뜻은 무엇일까. 
꽃에게는 개화와 낙화의 일기(日記)가 각각 있음을 기억하라는 뜻 아닐까. 
우리의 일상에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함께 있음을 잊지 말라는 뜻 아닐까. 
흐뭇하고 흡족한 때도 있고, 아프고 괴로운 때도 있듯이.


마음을 접어야 할 때와 손을 떼어야 할 때가 있다. 
이별을 받아들이고 견뎌야 하는 때가 있다. 이때가 바로 꽃이 지는 시간이다. 
나는 정호승 시인의 시 가운데 ‘반달’이라는 시를 또 좋아한다. 
“아무도 반달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반달이 보름달이 될 수 있겠는가/ 보름달이 반달이 되지 않는다면/ 사랑은 그 얼마나 오만할 것인가” 
낙화는 보름달이 반달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 문태준 <시인>

 

 

 

 

 

 

 

 

꽃편지 
       이해인

 

 



해마다 너의 편지는

꽃으로 말을 건네는 

꽃편지



봄에는 진달래 

여름엔 장미

가을엔 코스모스

철따라 꽃잎을 붙여서 내게 보내온

네 편지를 읽으면

네 고운 마음과 함께

글씨도 꽃으로 피었났지



네얼굴 네 목소리

꽃 위에서 흔들리고

네가 보고 싶은 너는

마른 꽃잎 향기에

가만히 입맞추고

끝나는 게 싫어서 

일부러 천천히 읽는 네편지는

꽃마음으로 사랑을 전하는 

꽃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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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더 꽃이다  

        
                       유안진

 

 


어린 매화나무는 꽃 피느라 한창이고
사백년 고목은 꽃 지느라 한창인데
구경꾼들 고목에 더 몰려섰다
둥치도 가지도 꺾이고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갈라지고 뒤틀리고 터지고 또 튀어나왔다
진물은 얼마나 오래 고여 흐르다가 말라붙었는지
주먹만큼 굵다란 혹이며 패인 구멍들이 험상궂다
거무죽죽한 혹도 구멍도 모양 굵기 깊이 빛깔이 다 다르다
새 진물이 번지는가 개미들 바삐 오르내려도
의연하고 의젓하다
사군자 중 으뜸답다
꽃구경이 아니라 상처 구경이다
상처 깊은 이들에게는 훈장(勳章)으로 보이는가
상처 도지는 이들에게는 부적(符籍)으로 보이는가
백년 못 된 사람들이 매화 사백년의 상처를 헤아리랴마는
감탄하고 쓸어보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만졌던 손에서 향기까지도 맡아 본다
진동하겠지 상처의 향기
상처야말로 더 꽃인 것을.

 

 

 

 

 

 

 

 

 

 

 

 

휘청
      서덕준

 

 



왜 이리도 징검돌을 허투루 놓으셨나요

당신 마음 건너려다 첨벙 빠진 후로

나는 달무리만 봐도

이제는 당신 얼굴이 눈가에 출렁거려

이다지도 생애를 휘청입니다.







 

 

 

 

누가 울고 간다

                      문태준 

 

 

 



밤새 잘그랑 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새 
가슴이 붉은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 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 낼 수 없는 




 

 

 

 

 

 

 

 

그대 수종사에 오시려거든 

                                        김택근

 

 



그대여!
수종사에 오시려거든 세욕(世慾)의 옷 훌훌 벗어버리고
 선(善)마음 하나만 가지고 오십시오
 행여, 힘들다고 차를 타고 오시질랑 말고
 그져 산길따라 산다랑치 논 쟁기질 하듯
 그렇게 천천히 고삐를 늦추고
 산길에 핀 원추리꽃 달맞이꽃 
 그리고 금불초 양지꽃 같은 그 이름들을 불러내어 
 손인사라도 나누며 천천히 오십시오
 오시는 길에 혹,
조안면 능내리에 이르거든
 잠시, 다산 유적지에 들러 초당에 앉아 
 오순도순 대화도 나누시고
 목민심서 한구절 읊어도 좋고
 내친김에 여유당, 기념관을 둘러봐도 좋으리
 그러나 북한강 남한강이 서로 그리움을 안고 흐르다가
 양수강(兩水江)에서 만나 포옹을 하며
 몸을 섞는 것을 보시고
 행여, 발길 멈춰 유혹되지 말고 눈인사만 나누고 오십시오
 누구나 수종사에 오실때는
 세월에 옹이 박힌 가슴의 상처 하나쯤 안고 오시겠지만
 그렇다고 북한강이나 남한강물에게 
 속마음 내비치시는 마십시오
 삼정헌에 앉아 마음의 문 활짝 열고
 녹차 한잔 음미하기 전까지는
 그대는 아직 수종사에 이르지 못한 것,
비로소 수종사에 올라 감로수 한잔 드시고
 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水鐘소릴 들어보십시오
 그럼, 아미타불의 미소가 마음에 떠오르면
 그땐, 세욕(世慾)의 짐 모두 부려놓고
 허리 굽혀 두손을 합장해도 좋으리

 

 

 

 

 

 

 

 

 

 

 

 

얼굴 반찬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 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시집『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 2008)

 

 

 

 

바람 부는 저녁 

                       이현승

 

 

 

 


산책로에서 갈대의 간격을 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촘촘하게 서걱이는 갈대들

 


눈물을 훔쳐 주기 좋은, 부대끼기 좋은,

 


흐느끼는 사람의 곁에서 가만히 외면하기 좋은 간격이 있다

 

 

 

 

 

 

 

 

 

 

 

단어와 사랑을 나누다 

                            김민정

 



글을 쓴다는 건 늘 내게 숙제다.

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단어와 만난다.

그러다가 사랑에 빠졌다.

사랑하는 건 어렵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가라고 했지

나는 매일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그 길을 걷고 있다.

 

어느 날 멈춰 보니

읽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주어와 동사, 그리고 명사, 형용사들은

서로 앞에 서겠다고 토닥거린다.

나는 그들을 안정시키고 차례를 정해준다.

 

고요해진 싸움쟁이들은

말쑥한 꽃망울이 되었다.

지난 밤 천둥치던 순간에도

나는 밤새도록 단어와 사랑을 나누었다.

 

 

 

 

 

 

성공은 가장 달콤하게 여겨지지(Success is counted sweetest)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1830~1886)

 

 



성공은 한번도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

가장 달콤하게 여겨지지

과일즙의 참맛을 알려면

가장 쓰라린 허기가 필요하지

오늘 깃발을 들고 있는 자주빛 옷을 입은

사람들 중 누구도 (패배한 자만큼)

승리의 뜻을 분명히 알지 못하지

패배해 죽어가는 병사의 귀에

멀리서 어렴풋이 승리의 환호가

고통스럽고 분명하게 들리지


 


........................
성공이란 무엇일까? 
전투에서 승리한 군대와 패배해 죽어가는 병사의 이미지를 대비시키며 시인은 패배를 경험한 자만이 성공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가장 쓰라린 허기를 경험한 자가 과일즙의 달콤한 맛을 안다는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허기가 너무 심하면 주스를 마셔도 주스의 순수한 맛을 모를 수 있다. 
허기가 너무 심하면 주스를 급하게 마시다 죽을 수도 있다. 
적당히 목마른 자가 과일즙의 맛을 음미할 줄 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은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평가받지만, 에밀리 디킨슨은 살아서 시집 한 권 펴내지 않았고, 자신의 시에 제목을 붙이지도 않았다. 
시 ‘성공…'을 읽으며 매사추세츠의 집과 마을을 떠나지 않았던 ‘은둔 시인’ 디킨슨에 대한 선입견이 깨졌다. 
그녀도 성공을 갈망했었다. 
영화 ‘조용한 정열’에서는 예민하고 까칠한 노처녀로 그려졌지만 에밀리 디킨슨의 세계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넓고 깊었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Success is counted sweetest (영시 원문)


Success is counted sweetest,

By those who ne’er succeed.

To comprehend a nectar

Requires sorest need.

Not one of all the purple Host

Who took the Flag today

Can tell the definition

So clear of Victory

As he defeated – dying –

On whose forbidden ear

The distant strains of triumph

Burst agonized and clear!

- Emily Dickinson(1830~1886)

 

 

 

나는 배웠다 2

                      양광모

 



삶은 산문이지만

사랑은 운문이라는 것을



어떤 사랑은 눈물로 마침표를 찍지만

어떤 사랑은 기도로 느낌표를 찍는다는 것을



낯 뜨겁게 만드는 사람이 있고

가슴 뜨겁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희망은

아침에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이 아니라

어두운 밤하늘의 희미한 별빛이라는 것을



촛불이 뜨겁게 타오를수록 

촛농도 더 많이 고인다는 것을



눈과 얼음에게는

겨울이 봄이요, 응달이 양지라는 것을


성공의 무게를 재는 저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행복의 길은

혼자 걸어가기에는 너무 좁고

함께 걸어가에는 충분히 넓다는 것을



너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조금 덜 행복할 뿐이라는 것을



가장 현명한 사람은 

빈틈 없는 사람이 아니라 

쉴 틈을 잘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생이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고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하나를 얻는다는 것을



운명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고 느낄 때

운명이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마음은 빈 상자와 같아

보석을 담으면 보물 상자가 되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 상자가 된다는 것을



가방끈이 길면

땅에 끌리기 마련이라는 것을



진정한 배움을 위해 필요한 것은

비움이라는 것을



인생을 통해

나는 내 삶을 비우는 법을 배웠다

 

 

 

 

 

 

 

 

 

 

따뜻한 슬픔 

                    홍성란 

 

 



너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차마, 사랑은 여윈 네 얼굴 바라보다 일어서는 것 
묻고 싶은 맘 접어두는 것
말 못하고 돌아서는 것 
하필, 동짓밤 빈 가지 사이 어둠별에서 
손톱달에서 가슴 저리게 너를 보는 것 
문득, 삿갓등 아래 함박눈 오는 밤 
창문 활짝 열고 서서 
그립다 네가 그립다 눈에게만 고하는 것 
끝내, 사랑한다는 말 따윈 끝끝내 참아내는 것


숫눈길  
따뜻한 슬픔이
딛고 오던
그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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