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현리 홀아비바람꽃
정일근
산다는 것은 버리는 일이다
내 심장 꺼내고 그 자리에 채워 넣었던
첫사랑 했으나, 그해 가을
진해 바다로 투신하고 싶었던
여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었던 심장의 통증까지
추억에서 꺼내 내버린 지 오래다
詩에 목숨 걸었으나, 당선을 알려주던 노란 전보
첫 청탁서, 첫 지면, 첫 팬레터… 詩로 하여 내 전부를 뛰게 했던
무엇 하나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다
가슴 설레며 읽은 신간 서적 책장에 꽂아둔 채
표지가 낡기도 전에 잊히듯이
산다는 것은 또 그렇게 잊어버리는 일이다
만남보다 이별이 익숙한 나이가 되면
전화번호 잊어버리고 주소 잊어버리고
사람 잊어버리고, 나를 슬프게 하는 것 모두
주머니 뒤집어 탈탈 털어 잊어버린다
행여 당신이 남긴 사랑의 나머지를
내가 애틋하게 기억해주길 바란다면
그건 당신의 검산이 틀렸다
솥발산 깊은 산길에 홀아비바람꽃 피었다
잎 버리고 꽃잎 버리고 홀아비바람꽃 피었다
나도 홀로 피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 인생이다
내가 나를 인정하고부터 편안하다
편안해서 혼자 우는 날이 많아 좋다
다시 바람 불지 않아도 좋다
혼자 왔으니 혼자 돌아갈 뿐이다
'(詩)읊어 보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3141]나도 마른다 / 신달자 (0) | 2023.11.02 |
---|---|
[3140]아픈 사람 / 김언 (0) | 2023.09.28 |
[3138]아버지의 소 / 이상윤 (0) | 2023.09.05 |
[3137]이유가 있었다 / 신광철 (0) | 2023.08.29 |
[3136]금강초롱 / 홍해리 (0) | 2023.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