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허영자(許英子)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학창 시절에 이웃집 담벼락 위로 뻗은 감나무에 매달린 감을 보며 가을을 느끼곤 했는데, 요즘 도시인들은 감나무를 보기 힘들다. 어디 하나 뺄 곳 없이 순도 높은 시어들로 완성된 시. “떫고 비리던”이라니. 얼마나 생생한 표현인가. 덜 익은 감의 떫은맛에 “비리던”이 들어가 청춘의 아픔과 서투른 우여곡절이 연상되었다. 더 이상 떫고 비리지도 않은 ‘내 피’가 갑자기 약동하면서 빈속에 소주 한 병을 들이부은 듯 가슴이 쓰렸다.
허영자 선생님은 현존하는 한국 시인 중에서 한국어의 맛과 향기를 가장 잘 구사하는 시인 중 한 분이시다. 당신의 시를 읽을 때마다 노래처럼 자연스러운 리듬을 느끼는데, 아마도 시를 쓸 때 일부러 의식하지 않아도 우리말의 전통적인 운율이 몸에 배어 그대로 나오는 것 같다.
어머니는 연시를 좋아하셨다. 작년 봄에 어머니를 잃은 뒤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어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자식은 부모가 죽어야 철이 들어요.”
-최영미<시인.이미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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