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박연준(1980~)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이따금 한번씩은 비를 맞아야
동그랗게 휜 척추들을 깨우고, 주름을 펼 수 있다
우산은 많은 날들을 집 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보낸다
눈을 감고, 기다리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
벽에 매달린 우산은, 많은 비들을 기억한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
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
벽에 매달려 온몸을 접은 채,
그 많은 비들을 추억하며
그러나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
우산을 소재로 이런 시도 쓸 수 있구나.
애정을 가지고 살펴보면 우리 주위의 모든 사물이 시의 재료가 될 수 있다.
깜찍하고 발랄하고 감각적인 언어에서 젊음이 느껴진다.
시인은 우산이 되어, 비를 기다리는 우산의 마음을 헤아린다.
비가 오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어져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지만, 우산이 하나도 없는 집은 없으리라.
우산을 발명한 뒤 인류는 더 바빠졌고 노동 착취는 더 심해졌다.
비 오는 날, 동굴에만 집에만 갇혀있지 않고 밖으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으니 우산처럼 고마우면서 얄미운 존재가 또 있을까.
우리 집 신발장에는 한 번도 비를 맞지 않은 우산이 두 개나 있다.
너무 오래 펼치지 않은 우산을 최근에 꺼내 펼쳐 보았더니 색이 바래 보기 싫었다.
너무 오래 우산을 기다리게 하지 말자.
-최영미<시인.이미출판 대표>
'(詩)읊어 보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3165]여름편지 / 마종기 (0) | 2024.08.15 |
---|---|
[3164]당신의 여름을 사랑합니다 / 이채 (0) | 2024.08.01 |
[3162]농무(農舞) / 신경림 (0) | 2024.06.29 |
[3161]숲 / 강은교 (0) | 2024.06.18 |
[3160]바다 옆에 집을 짓고 / 한기팔 (1) | 2024.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