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고영민
겨울 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 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 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 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詩)읊어 보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3185]마른 나뭇잎 / 정현종 (0) | 2025.04.04 |
---|---|
[3183]시 읽는 눈이 별빛처럼 빛나기를 / 문 신 (0) | 2025.03.10 |
[3182]새들의 생존법칙 / 김복근 (0) | 2025.02.22 |
[3181]어두운 등불 아래서 / 오세영 (0) | 2025.02.11 |
[3180]등대의 노래 / 강은교 (0) | 2025.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