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고급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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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고급 제품 
      
    어떤 분은 이런 농담을 합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고급 제품이다."이라고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담’은 흙으로 만들어 졌고 ‘에와’는 
    갈비뼈로 만들어졌습니다. 
    흙은 무기물질이고 갈비뼈는 유기물질입니다. 
    여자의 재료는 "1차 가공"을 거친 더 고급스런 소재인 
    셈입니다. 
    더구나 신제품은 항상 뒤에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남성들은 여성보다 염색체수도 하나가 모자랍니다. 
    첨단 재료일수록 취급에 주의가 더 필요한 법입니다. 
    한 여인이 결혼을 했습니다. 
    부부싸움 끝에 친정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화가 난 남편은 이번 기회에 버릇을 고쳐 놓겠다고 
    별렀습니다. 
    친정에 온 딸을 보는 부모 마음도 편치 않았습니다. 
    며칠 쉬게 한 다음 딸을 돌려 보내며 친정아버지가 
    사위에게 보내는 편지 한 장을 딸 편에 보냈습니다. 
    집에 돌아온 아내가 편지부터 내밀었습니다. 
    신랑이 편지를 받아 들자마자 기겁을 했습니다. 
    거기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취급주의: 깨어지기 쉬움" 
    아내들은 실제로 연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치 
    깨어지기 쉬운 그릇과 같습니다. 
    한 번 깨지고 나면 다시 붙여 쓸 수 없습니다. 
    아내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취급주의를 어기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아담의 신체 중 왜 하필이면 
    갈비뼈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을까요?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일 머리로 만들었다면 여성들은 남자들의 
    꼭대기 위에 올라갈 것이다. 반대로 발 뼈로 
    만들었다면 발에 밟혔을 것이다. 갈비뼈로 
    만들어 여자가 남편의 가슴에 안겼을 때 
    평안을 누리도록 한 것이다." 
    이래서 유대인 랍비들은 "남자들은 그의 
    옆구리로부터 나온 갈비뼈를 갖지 못하는 
    동안은 휴식할 수 없고 여자는 그녀가 나온 
    남자의 팔 밑에 있지 않으면 휴식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의학용어에 "지체자각증상"이라는 게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잃은 사람이 
    마치 그 팔이나 다리가 그대로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손끝이 아프다거나 발가락이 
    간지럽다고 호소하는 증상을 말합니다. 
    이를 일러 '펜텀 페노미나(Phantom Phenomina) 
    라 부르고 많은 남성들이 이 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하느님은 ‘아담’이 잠들고 있는 사이에 가장 예민하고 소중한 부분인 그 가슴의 갈비뼈를 뽑아다가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지금까지도 여자가 눈물만 글썽거려도 가슴이 저려서 견디지를 못하고 쉬 무릎을 끓고 만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이 모든 것을 미리 알아서일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즉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이란 말은 내 존재구조가 곧 여자의 존재구조라는 고백입니다. 이 사실을 일찍 깨달은 ‘아담’ 이야말로 남자 중의 남자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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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김종태



달래 비슷하지도 않으면서

진짜 달래라고 진달래?

이름만 그럴싸한 것은

말만 그럴싸한 것보다 본질적 사기이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떠벌리는 철부지보다는

우린 사랑하잖아요 라고 명패를 목에 매달고

제 할일 다 했노라 하는 것은

철부지보다 미운 개구쟁이이다


짧은 봄밤 

선홍빛 물드는 그리움은 나 몰라라 하고

그 진달랫빛 석 달 갈 줄 알고 나물만 캐는 사람은

진달래보다도 더 미운 개구쟁이 사기꾼이다




진달래 [korean rosebay] 

Rhododendron mucronulatum

진달래과 낙엽관목

참꽃 또는 두견화라고도 한다. 산지의 볕이 잘 드는 곳에서 자란다. 높이는 2∼3m이고 줄기 윗부분에서 많은 가지가 갈라지며, 작은가지는 연한 갈색이고 비늘조각이 있다. 잎은 어긋나고 긴 타원 모양의 바소꼴 또는 거꾸로 세운 바소꼴이며 길이가 4∼7cm이고 양끝이 좁으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잎 표면에는 비늘 조각이 약간 있고, 뒷면에는 비늘 조각이 빽빽이 있으며 털이 없고, 잎자루는 길이가 6∼10mm이다.

꽃은 4월에 잎보다 먼저 피고 가지 끝 부분의 곁눈에서 1개씩 나오지만 2∼5개가 모여 달리기도 한다. 화관은 벌어진 깔때기 모양이고 지름이 4∼5cm이며 붉은빛이 강한 자주색 또는 연한 붉은 색이고 겉에 털이 있으며 끝이 5개로 갈라진다. 수술은 10개이고 수술대 밑 부분에 흰색 털이 있으며, 암술은 1개이고 수술보다 훨씬 길다.


열매는 삭과이고 길이 2cm의 원통 모양이며 끝 부분에 암술대가 남아 있다. 관상용으로 심기도 하고, 꽃은 이른봄에 꽃전을 만들어 먹거나 진달래술(두견주)을 담그기도 한다. 한방에서는 꽃을 영산홍(迎山紅)이라는 약재로 쓰는데, 해수·기관지염·감기로 인한 두통에 효과가 있고, 이뇨 작용이 있다.

한국·일본·중국·몽골·우수리 등지에 분포한다. 흰색 꽃이 피는 것을 흰진달래(for. albiflorum)라고 하고, 작은 가지와 잎에 털이 있는 것을 털진달래(var. ciliatum)라고 하며 바닷가와 높은 산에서 흔히 자란다. 털진달래 중에서 흰색 꽃이 피는 것을 흰털진달래(for. alba)라고 하며 해안 근처에서 간혹 볼 수 있다. 잎이 둥글거나 넓은 타원 모양인 것을 왕진달래(var. latifolium)라고 한다.


바닷가 근처에서 자라는 것 중에서 잎에 윤기가 있고 양면에 사마귀 같은 돌기가 있는 것을 반들진달래(var. maritimum)라고 하고, 열매가 보다 가늘고 긴 것을 한라진달래(var. taquetii)라고 한다. 키가 작고 꽃도 작으며 5개의 수술이 있는 것을 제주진달래(R.saisiuense)라고 하며 한라산 정상 근처에서 자란다.





진달래를 지칭하는 이름은 여러 가지이다. 연달래, 꽃달래, 얀(온)달래, 반달래, 진달래 수달래 등 모두 달래자가 붙어 있다. 같은 진달래이지만 꽃의 느낌에 따라 다르게 불렀던 것 같다. 달래꽃보다 꽃빛깔이 진하다고 하여 진달래가 되었다고도 한다.

사람마다 그 때 그 때의 느낌에 따라 연달래, 얀달래라고 해도 옆에서 듣는 사람은 모두 진달래로 들을 수 있었으리라.

남도지방 은어에 앳된 처녀를 일컬어 연달래라 하고 성숙한 처녀는 진달래, 그리고 과년한 노처녀는 난달래라 한다. 나이에 따라 변하는 젖꼭지 빛깔에 비유한 짓궂은 표현이라고 하나 믿을 것이 못된다.


강원지방에서는 물가에서 자라는 산철쭉을 수달래라 한다. 물에서 자라는 진달래를 뜻하지만 진달래는 독성이 적어 먹을 수 있어도 산철쭉은 먹지 못한다.

진달래는 우리 땅 어디든지 자라지 않는 곳이 없다.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폭넓은 서식지를 갖고 있는 우리의 자생식물이다. 그래서 한 때는 우리 나라꽃으로 하자는 운동이 벌어진 때도 있었고, 북한의 경우 함박꽃나무(木蘭)로 바꾸기 전까지는 상징화로 아낌을 받았던 나무이다.


진달래는 확실히 아름다운 나무다.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란다. 진달래가 많은 땅은 그만큼 땅이 척박한 곳이다. 강 산성 토양에서도 견디는 수종이 바로 진달래과 식물이다. 다른 수종이 척박지를 피해 기름진 땅에 뿌리를 내리지만 진달래는 오히려 붉은 색채가 더욱 짙어져 동국의 봄을 장식한다.

진달래는 줄기를 꺾어 주면 도장지가 자라 오히려 더 많은 꽃이 핀다. 진달래는 가지 끝에 꽃눈이 밀집해 달린다. 늙은 나무는 가지가 섬세하고 끝에 한 두 송이의 꽃눈이 달리지만 도장지 끝에서는 십여 송이의 꽃눈이 달린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가지를 꺾인 등산로 주변의 진달래가 휠씬 탐스러운 꽃으로 피는 것이다.


진달래는 먹는 꽃이다. 그래서 진짜 꽃이라는 뜻으로 참꽃이라 부른다. 참꽃에 대해 못먹는 철쭉은 개꽃이라 부른다. 독성이 적은 진달래는 꽃잎을 먹을 수 있지만 독성이 강한 철쭉은 개꽃이라는 이름의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진달래로 국수까지 빚어 먹었던 우리 선조들은 음식의 맛 뿐만 아니라 멋까지 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동국세시기에 진달래로 국수를 뽑아먹는 과정이 소개돼 있어 눈길을 끈다.



진달래는 우리 땅 어디든지 자라지 않는 곳이 없다.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폭넓은 서식지를 갖고 있는 우리의 자생식물이다. 그래서 한 때는 우리 나라꽃으로 하자는 운동이 벌어진 때도 있었고, 북한의 경우 함박꽃나무(木蘭)로 바꾸기 전까지는 상징화로 아낌을 받았던 나무이다. 진달래는 확실히 아름다운 나무다.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란다. 진달래가 많은 땅은 그만큼 땅이 척박한 곳이다. 강 산성 토양에서도 견디는 수종이 바로 진달래과 식물이다. 다른 수종이 척박지를 피해 기름진 땅에 뿌리를 내리지만 진달래는 오히려 붉은 색채가 더욱 짙어져 동국의 봄을 장식한다.


진달래는 줄기를 꺾어 주면 도장지가 자라 오히려 더 많은 꽃이 핀다. 진달래는 가지 끝에 꽃눈이 밀집해 달린다. 늙은 나무는 가지가 섬세하고 끝에 한 두 송이의 꽃눈이 달리지만 도장지 끝에서는 십여 송이의 꽃눈이 달린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가지를 꺾인 등산로 주변의 진달래가 휠씬 탐스러운 꽃으로 피는 것이다.

정원에 심어진 진달래도 가지를 잘라줄 필요가 있다. 도장지가 우뚝하면 봄철에 보다 탐스러운 짙은색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우리 주위에서 보는 관상식물이란 수백년 또는 수천년 동안 재배해 오는 동안 내병성, 내한성, 내습성 등 필요에 따라 환경에 적응하도록 개량한 것들이다. 또 향기가 더욱 짙게 했거나 꽃이 탐스럽고 더 많이 달리도록 개량한 것들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원예식물이 되었다. 진달래는 개량하지 않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관상가치를 지니고 있다. 지금 당장 정원에 심어도 그 어떤 나무보다 화려한 꽃을 피워 매년 봄소식을 알린다.

진달래는 먹는 꽃이다. 그래서 진짜 꽃이라는 뜻으로 참꽃이라 부른다. 참꽃에 대해 못먹는 철쭉은 개꽃이라 부른다. 독성이 적은 진달래는 꽃잎을 먹을 수 있지만 독성이 강한 철쭉은 개꽃이라는 이름의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3월 삼짇날 진달래꽃으로 화전을 붙여 먹는다고 했다.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하여 둥근 떡을 만들고 기름에 지져 먹는 먹는 것을 화전(花煎)이라 한다."

옛날에는 음력 삼월 삼짇날을 전후하여 마음에 맞는 친구들이나 가족끼리 또는 이웃끼리 가까운 산을 찾았다. 계곡에 솥뚜껑을 걸고 나뭇가지를 지펴 불을 붙인다. 따온 진달래꽃을 찹쌀반죽에 섞어 전을 붙이거나 찹쌀반죽 위에 꽃잎을 얹어 지져낸다.

남자들이 솥이며 그릇들을 지게에 져다 취사 준비를 마쳐주고 산을 내려가면 여인들의 오붓한 시간이 된다. 서로 시를 지어 노래하면 댓구에 따라 다른 사람이 시를 짓는다. 이런 놀이를 화전놀이라 했다.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도 삼월 삼짇날(重三)에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하여 둥근 떡을 만든다. 이것을 참기름에 지져내면 화전(花煎)이 된다."고 했다. 진달래로 국수까지 빚어 먹었던 우리 선조들은 음식의 맛 뿐만 아니라 멋까지 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동국세시기에 진달래로 국수를 뽑아먹는 과정이 소개돼 있어 눈길을 끈다.


오미자를 우려낸 붉은 국물에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힘 것을 잘게 쓸어 넣는다. 거기다 꿀을 타고 잣과 진달래 꽃잎을 뛰운 것을 화면(花麵)이라 한다. 혹은 진달래꽃을 녹두가루와 반죽하여 국수를 만들기도 한다. 또 녹두로 국수를 만들어 붉은색으로 물들이기도 하는데 꿀물에 띄운 것을 수면(水麵)이라 한다. 시절 음식으로서 제사에 쓴다.


삼월 삼짇날의 화전놀이는 집안에만 갇혀 지내는 부녀자들에게 이날 하루 소풍을 보내 그간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억압된 조선시대의 폐쇄 사회에서도 삼월 삼짇날의 진달래 화전, 사월 초파일의 느티떡(楡葉餠), 오월 단오에는 수리취떡, 유월에는 장미꽃전, 구월구일 중양절에는 구절초나 국화로 국화전을 부쳐 먹었다.

또 겨울에는 호박떡, 무시루떡, 곶감떡 같은 것을 쪄 시절음식으로 즐겼다. 그외 쑥이나, 미나리, 달래 같은 나물로 전을 붙여 먹기도 했다. 진달래 뿐만 아니라 계절에 따라 나는 갖가지 꽃과 나물로 시절음식을 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나주 선비 임백호(林白胡)는 멋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송도 명기 황진이(黃眞伊)의 무덤에 찾아가 제사를 지낸 분이다. 그의 화전놀이를 읊은 시에


개울가 큰 돌 위에 솥뚜껑 걸어 놓고

흰가루 참기름에 꽃전부쳐 집에 드니

가득한 봄볕 향기가 뱃속까지 스민다.


얼마나 운치있는 노래인가.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부녀자들에게 널리 불리워졌던 〈영남대가 내방가사(嶺南大家內房歌辭)〉 화전가(花煎歌) 편에는 "꽃술일랑 고이 두고 꽃잎만 따서 지져 먹고, 배부르면 진달래 꽃술로 꽃싸움(花戰)하자"고 노래하였다. 꽃술을 걸어 서로 잡아당겨 꽃밥이 떨어지는 쪽이 지게 된다. 편을 갈라서 하게 되는데 마지막까지 남은 쪽이 이기게 된다. 이긴 쪽에서는 춤을 추고 진쪽은 벌로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진달래꽃이 필 무렵이면 절을 찾아가 탑돌이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 때 성벽을 걷거나 다리를 밟으며 탑 주위를 도는 것은 무병 장수를 위한 기원의 뜻이 담겨 있다.

탐스럽게 핀 진달래 가지를 꺾어 꽃방망이(花棒)처럼 만들어서 앞서 가는 사람들을 때리면서 놀았는데 이 꽃다발을 여의화장(如意花杖)이라 했다. 진달래 꽃으로 선비의 머리를 치면 과거에 급제하고 기생의 등을 치면 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 믿었다.


경상도에서는 진달래 나무 숲에 꽃귀신이 산다고 하여 봄철 진달래가 필 때는 어린이들을 산에 가지 못하게 말렸다. 또 얼굴이 뽀얀 문둥이가 진달래꽃을 먹고 사는데 어린이들이 다가와 꽃을 따면 잡아서 간을 내어 먹는다고도 했다. 아마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위험한 산에 함부로 가지 못하도록 이런 이야기를 꾸며낸 것으로 여겨진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진달래꽃이 피면 이름 없는 무덤에도 꽃다발이 놓인다. 시집 못가고 죽은 처녀 무덤에는 총각들이, 총각 무덤에는 처녀들이 진달래 꽃을 꽂아준다. 이렇게 하여 처녀, 총각 귀신을 달래지 않으면 원혼이 나타나 혼사를 망쳐 놓는다고 믿었던 때문이다.


진달래의 한자 이름은 두견화(杜鵑花) 또는 척촉(척촉)이다. 여기에는 형을 그리워 하는 동생의 애틋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척=擲+躪 촉=觸+躪

옛날 중국의 촉(蜀)나라에 의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자 계모가 들어 왔다. 게모의 학대로 형은 집을 쫓겨나고 말았다. 나중에는 동생도 견디다 못해 집을 나오고 말았다.

어느 따뜻한 봄날 동생은 굶주림에 지쳐 쓰러지게 되었다. 그리고는 한 마리 새가 되었다. 그 새가 바로 두견새이다. 형를 찾아 헤매던 두견새는 매년 진달래꽃이 필 때면 고향을 찾아와 언제나 형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슬피 울었다.

촉나라로 돌아 갈꺼나! 촉나라로 돌아갈거나!

귀촉도(歸蜀道)! 귀촉도(歸蜀道)!


목이 찢어져라 슬피 울다가 마지막에는 피를 토하고 말았다. 그래서 진달래와 철쭉에는 지금도 붉은 피가 점점이 묻어 있다. 고사에서 말하는 두견화는 철쭉을 지칭하는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달래는 분명 아니다.

새 이름 두견은 두견이를 말한다. 우리 말이 한자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귀촉도는 소쩍새를 말한다. 같은 여름 철새이긴 하지만 분명 다른 새이다. 옛 사람들이 진달래와 철쭉을 따로 구분해서 쓰지 않았듯 새도 서로 다른 종으로 보지 않은 것 같다.


두견화 전설에 대해 중국의 문호 임어당(林語堂)은 "두견화는 지극히 아름다운 꽃이지만 일반인들은 비극의 꽃으로 여긴다. 그 이유는 뻐꾸기의 피눈물 나는 울음 속에서 핀 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는 두견이도 소쩍새도 아니고 뻐꾸기로 기술돼 있다.


진달래 뿌리 삶은 물에 베를 물들이면 파르스럼한 잿빛으로 염색이 된다. 스님들의 정갈한 승복은 진달래 뿌리로 물들인 것을 으뜸으로 쳤다. 이러한 전통 염료기법이 어느 깊은 산의 암자에나 남아 있을까, 지금은 여간해서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술은 진달래꽃으로 빚은 두견주(杜鵑酒)이다. 진달래꽃을 따다 꽃술을 따내고 독에 담고 찹쌀 고두밥과 누룩을 버무려 그 위에 켜켜이 넣는다. 100일 쯤 지나면 향기가 물씬 풍기는 두견주(되강주)가 된다. 당진 면천의 되강주가 가장 이름났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중양절(重陽節)에 국화와 함께 진달래 뿌리로 술을 담궈 진달래 피는 삼월 삼짇날 마시는 술을 두견주라 한다"고 했다.


봄에 진달래꽃을 소주에 담가 두면 붉은 꽃물이 우러나와 맛과 빛이 우아하다. 한 컵을 불쑥 마시면 심한 현기증이 일어나면서 혼미에 빠진다. 반드시 1개월 이상 숙성시킨 뒤 마셔야 한다.


진달래꽃은 약재로도 쓰였다. 꽃을 말려서 가루로 만든 것을 꿀에 개어 환을 만든다. 이것을 하루 서너 알씩 먹으면 오래된 기관지염을 다스린다. 한방에서는 기관지염, 고혈압, 기침에 좋고 혈압을 내려주며, 신경통 루머티즘을 낫게 한다고 했다.




 진달래


              이영도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 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진달래산천 


   신동엽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에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진달래


                    박노해



겨울을 뚫고 왔다

우리는 봄의 전위


꽃샘추위에 얼어 떨어져도

봄날 철쭉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 외로운 겨울 산천에

봄불 내주고 시들기 위해 왔다


나 온몸으로 겨울 표적되어

오직 쓰러지기 위해 붉게 왔다


내 등뒤에 꽃피어 오는

너를 위하여


현실에서 보란 듯이 이루어낸

지난날 뜨거웠던 친구들을 보면

해냈구나 눈시울이 시큰하다


이런 중심 없는 시대에는

세상과의 불화를 견디기도 어렵겠지만

세상과의 화해도 그리 쉽지만은 안겠지


지금도 난 세상과 불화 중이지만

나 자신과는 참 고요하고 따뜻해

그래서 다시 길 떠나는가 봐


세상과의 화해가 자신과도 화해일 수 있다면

세상과 화해한 넌 지금

너 자신과 화해가 되니?



진달래 사연


봄바람이 들어 들뜬 아가씨를 두고 ‘참꽃’(진달래)에 볼때기 덴 년’ 이라는 속된 말이 있다. 만산홍(滿山紅)의 진달래로 두 볼에 화상을 입었다는 것이니 진달래에 관한 이보다 감각적인 표현이 어느 다른 나라에 있을까 싶다. 이렇게 볼을 덴 처녀들은 진달래 한아름씩 꺽어들고 ‘진달래 무덤’을 찾아가 꽃을 꽂아주는 것이 진달래철 아가씨들의 은밀한 의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달래 무덤은 그 이름처럼 낭만적이진 못하다. 장가 못 가고 죽은 총각으로 외지에서 머슴살이 하다가 죽거나 객사한 소금장수 같은 연고 없는 무덤이다. 돌보지 않아 황폐해진 그 무덤에 연중 한 번 진달래철에 꽃무덤이 된다 하여 그런 고운 이름을 얻었을 뿐이다. 꽃을 꽂지 않은 처자에게는 장가 못 가고 죽은 이 몽달귀신의 해코지를 받는다는 금기가 없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장가 못 가고 죽은 원령에 대한 예쁘디예쁜 봄의 풍속이 아닐 수 없다.

진달래 약탈이라는 신나는 풍속도 있었다. 이 철이면 젊은나무꾼들은 나믓짐에 진달래를 촘촘히 꽂아 꽃짐을 지고 내려오게 마련이다. 짐짓 마을 여인네들이 모여 있는 동네 샘가 앞을 지나간다. 그중 왈가가닥 아줌마가 진달래 꽃짐 뒤로 슬금슬금 다가가서 이 젋으 ㄴ나무꾼의 바짓가랑이를 끌어내린다. 못 보일 것이 드러나 허둥지둥하면 샘가의 부녀부대가 폭소를 터뜨리며 습격하여 그 진달래꽃을 약탈해 간다.

이런 약탈을 당해야 장가를 갈 수 있고 또 품삯도 반품에서 온품으로 받을 수 있었으니 성인식(成人式)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역시 의식화된 진달래 약탈 습속이었다.

진달래 무덤이나 진달래 약탈은 심층에 섹스를 암시하는 감각적인 풍습이란 차원에서 공통되고 있다.

정신적 차원에서도 진달래는 선택 받았다. 옛 우리 선조들은 꽃을 볼 때 그 아름다움이나 현란함을 천하게 보고 그 기절(氣節)이나 지조를 귀하게 보았다. 그래서 마치 벼슬에 품작을 매기듯이 꽃에도 일품(一品)에서 구품(九品)까지 품작을 매겨 가까이하거나 멀리하기도 했다.세조 때 재상인 강희안 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 보면 진달래는 정오품(正五品)에 랭킹되어 있으며 그만한 품작을 내린 이유는 이러하다. 진달래는 메마른 땅이나 바위 틈을 골라 피고 또 북향일수록 잘 피고 꽃빛깔도 진하다는 것을 든다. 곧 절신(節臣)이 궁지에서 임 향한 일편단심으로 붉게 간직하는 기절을 이꽃에서 보아낸 것이다.

진달래가 한국인의 정서에 차지해온 비중도 대단하다.


창밖에 우는 새야

어느 산에서 자고 왔느냐

응당 그 산중 일은 잘 알 터이니

진달래가 피었던가 피지 않았던가.

이것은 판서(判書) 서기보(徐箕輔)의 첩 죽서(竹西)가 열 살 때 지은 시다.


봄맞이 나른한 몸 가눌 길이 없어

진달래 꽃가지 아래 게으르게 앉아

꽃수염 헤아리고 다시 한 번 헤아린다.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김씨라는 규수 시인의 <춘사시春事詩>다.

이렇게 이 꽃에 사랑을 심고, 이 꽃에 품작을 주고, 이 꽃에 정을 태우는 것만으로 성에 차지않아진달래로 화전(花煎)을 부치고, 진달래로 화면(花麵)을 빚으며, 진달래로 화주(花酒)까지 담가먹었을까.

출처 : [기타] 이규태의 진달래 [신원문화사]뽑내고 싶은 한국인중에서...



북한의 나라꽃을 진달래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민중화가들이 북한의 국화 진달래를 그렸다고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북한의 국화는 진달래 가 아니고 등산인들이 산목련이라 부르는 함박꽃나무다.

출처 : 닥터상떼
글쓴이 : 닥터상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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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 연구를 업으로 하는 서생이었던 내가 문화재청장을 맡을 때는 당연히 개인적인 욕심도 조금은 있게 마련이었다. 내게 그 욕심이란 문화재청이나 국립박물관에서 유물들을 움켜쥐고 ‘출입금지’ ‘들어가지 마시오’ 등 빨간 글씨의 경고문으로 일반인은 물론이고 학자들에게도 좀처럼 공개하지 않고 있는 유물들을 내 맘껏 조사하고 싶은 바람이었다.

 

더욱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피력했던 “모든 건축물, 특히 목조건축물은 사람이 살아야 제대로 보존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출입금지를 문화재 보존의 능사로 삼고 있는 문화재 행정을 혁신해 보겠다는 뜻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문화재청장이 되면 우선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써 있는 문화재들이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 보겠다, 그리고 미술사학도로서 유물을 면밀히 조사하는 특권도 누려 보겠다는 두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2004년 9월 3일 부임하자마자 이른바 초도순시를 하면서 경복궁을 찾아갔을 때 나는 아무 예고 없이 출입금지를 몇 개씩 달아놓은 경회루를 올라가 보자고 했다. 경복궁 관리소장은 매우 당황해 하면서 “먼지가 많을 텐데요”라며 나중에 올라갈 것을 권했다.


문화재 보존, 출입금지가 능사 아니다

 

나는 괜찮다며 쇠줄을 넘어 경회루 안쪽으로 들어갔다. 경회루에 오르는 순간 나는 피어오르는 먼지에 얼른 손으로 코를 막지 않을 수 없었다. 먼지의 두께는 최소 10cm는 되는 것 같았다. 이것이 출입금지를 능사로 삼은 보존책의 실태였다.

 

미술사학도로서 생전 처음 대한 경회루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누대의 넓이가 280평이나 되다니, 그 스케일에서 오는 장대함은 가히 감동적이었다. 더욱이 누대가 3단으로 구성되어 미닫이문, 여닫이문 그리고 분합문들이 갖가지로 연출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 공간감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경회루만의 자랑이었다. 이 엄청난 공간을 40년간 묵혀 놓았다니!

 

그날 이후 경복궁 직원들은 일주일을 두고 먼지를 쓸고 닦았다. 먼지를 제거하고 보니 경회루 마루의 나무판들이 모두 말라비틀어진 죽음의 잿빛이었다. 더더군다나 군사독재 시절에 대통령의 연회를 연다고 마루에 카펫을 깔아 그 밑으로 좀이 슨 자국들이 처참하게 남아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목조건축이 어떻게 병들고 죽어가는지를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나는 우선 궁궐지킴이, 궁궐길라잡이, 아름지기 등 문화재 자원봉사자들과 경회루 대청소와 마루바닥 길들이기를 공개행사로 벌였다. 자원봉사자들은 모두들 이 아름답고 황홀한 공간에 감탄하며 정성껏 물걸레, 마른 걸레로 닦았다. 나이 든 분들은 모두 초등학교 시절 교실 복도 마루 길들이기를 연상하며 즐거워했다. 그렇게 한 달간 갈고 닦은 결과 경회루 마루는 죽은 잿빛에서 짙은 갈색의 나무빛깔을 띠기 시작했다.


사람들 드나들자 생기 되찾은 경회루

 

나는 경회루를 국민들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경회루의 잃어버린 담장을 복원한 다음, 2005년 4월부터 일반에게 개방하였다.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경회루 건물은 출입금지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기를 얻게 되었다. 모든 건물은 사람이 살고 있을 때 제대로 보존된다는 대원칙, 특히 목조건축은 사람의 손길과 살내음이 배어야 생기를 얻는다는 교훈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옛 정자 중에서 진주의 촉석루가 가장 잘 보존되고 있는 이유는 그 곳에서 항상 수십 명의 진주 시민과 답사객들이 쉬어가기 때문이다. 수많은 옛 가옥 중 종손과 종갓집 며느리가 지키고 있는 종택만은 고스란히 보존된 반면 빈집으로 남은 고가들은 해마다 보수 정비를 해도 을씨년스럽게 여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후 문화재청에서는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을 관람객들에게 개방했고, 창덕궁의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권역을 잇달아 개방했다. 도배장판을 해놓고 사람이 살지 않아 한 해 여름만 지나면 곰팡이가 피고, 한 해 겨울만 지나면 장판이 들고 일어서던 피해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런데도 일반인들은 아직도 ‘출입금지’가 만능의 보존책인 줄로 알고 문화재청은 옛 건물을 보존할 생각은 안하고 활용만 강조한다고 비판할 때면 정말로 속이 답답하다.

 

얼마 전 창덕궁의 내병조 구역의 건물에 사무실과 당직실 그리고 관리소장의 관사가 있는 것을 한 방송국에서 무슨 큰 문화재 파괴를 한 것인양 보도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좋게 말해서 견해 차이였고, 어떤 면에서는 일방적인 보도였다.

 

그것은 목조건축의 이런 생리를 모르고 보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실 자체가 왜곡되어 있었다. 창덕궁에 사무실과 당직실, 관사가 들어 있는 내병조 건물은 새로 지은 지 10년 밖에 안 되는 건물이다. 이 건물들은 창덕궁 인정전 주변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그런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장기적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사람(직원)들이 드나들고 숙직하며 살내음을 심어 넣기 위한 것이었다.

 

고궁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재예방이다. 그래서 숙직자를 반드시 두고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관리소장이 창덕궁의 관사에서 산다는 것은 책임 있는 숙직자가 상근한다는 셈이다.

 

그런데 방송은 마치 몇 백년 된 건물에 살림집을 차린양 보도했다. 이후 문화재위원들이 와서 조사하고는 별 문제 없다는 의견을 내놓으면서 다만 “언론에서 또 뭐라고 할지 모르니 관사로 사용하는 것은 중지하자”고들 했다. 나는 마지못해 내 뜻을 접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도 승복한 것은 아니었다.

 

누가 뭐라 하든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문화재청은 지금이나 앞으로나 “모든 건축물은 사람이 살고 있을 때 제대로 보존된다”는 대원칙에서 우리의 옛 목조문화재들을 소중히 보존해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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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의 미학 - 건축

 

 

오늘 첫 시간 강의 내용은 ‘산사의 미학’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여러분들에게 우리나라 고건축 특히 사찰건축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강의를 준비를 했습니다. 산사라고 했을 적에 ‘산사가 산이 있는 곳에 절이 있으면 산사고 그것이 일본의 경우에는 안 그런가. 중국의 경우는 안 그런가’ 뭐 이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지만 산사의 전통을 갖게 되는 것은 정확하게 얘기해서 9세기를 넘어간 다음의 일입니다. 황룡사는 시내, 다운타운에 있었던 절의 구조였기 때문에 주변에 회랑을 두르고 높은 탑을 중심으로 건축이 조형이 됐던 겁니다.

이것이 산으로 들어가면서부터 9세기에 하대 신라에 들어와서 구산서문이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산사가 전개됩니다. 그것보다 먼저 전개되는 것이 의상대사의 화엄시찰이라고 하는 그러니까 경주를 중심으로 해서 봤을 적에 화엄사나 부석사처럼 국경선 가까운 곳 쪽으로 큰 사찰을 지어서 국방의 목적으로 해서 대찰들을 지었던 것이 산사로 시작을 합니다마는 사실은 9세기에 하대 신라에 호족들이 발언을 해서 만들어 놓은 절들이 장흥 보림사의 대적광전 앞에 있는 9세기의 쌍탑 사찰인데 이와 같은 모습은 사실 해주에 있는 심원사처럼 산속에 그윽하게 들어가 있는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산사의 개념으로 바뀌게 됩니다.

 

한국 산사는 깊은 산 속, 중·일은 산 꼭대기에

 

중국이나 일본에도 산에 절이 있습니다마는 그 산사의 의미가 우리하고는 상당히 다릅니다. 우선 산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산사의 형태가 다르고, 선암사나 이런 절에서 보이는 것처럼 높은 산이 아니고 깊은 산 중에 들어가 있는 것이 우리 산사가 갖고 있는 특징이라고 얘기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에 있는 산사는 정말로 삼각형으로 서 있는 산 위에 꼭대기에 가서 있는 것인데 우리는 첩첩이 겹쳐져 있는 계곡을 따라 들어가서 아늑하게 자리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산사의 개념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절이 들어앉을 적에 이와 같이 중앙에 정원을 놓고 ㅁ자로 집을 배치하고 그 다음에 이에 따라서 그 전각들을 증축을 하고 절의 사세에 따라 가지고 전각들을 짓게 되는데 거기에는 일정한 룰이 있었습니다.

사천왕이 지키고 있는 천왕문을 들어가면 김봉렬 교수가 말하는 ‘산지 중정형, 산지에 있는 가운데 정원이 있는 형태다’하는 게 가운데 탑을 중심으로 해서 대웅전 앞에 만세루라고 하는 2층 누각이 있습니다. 이것은 야외 법당인데 때로는 거기에다가 불교 사물을 걸어놓고 북과 목어하고 운판을 걸어 놓은 경우가 있습니다마는 기본적으로는 만세루가 야외 법당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검당과 적묵당이 배치되는데 적묵당은 선방이고 심검당은 부엌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절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고 있습니다마는 기본적으로는 대웅전, 적묵당, 만세루, 심검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절의 기본입니다.

그러니까 사찰을 만들 적에 가장 기본적인 것은 대웅전 하나만 있으면 되고 대웅전과 심검당 요사체만 있으면 되고 또 선방이 있고 야외 법당이 있고 그 다음에 목적에 따라서 나한을 모시고 있는 응진전이 참선하는 기도처가 되고 그 다음에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셔 놓은 곳에서 극락세계에 가게 해 달라고 빌 적에 명부전으로 가고 또 관음전은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애로사항이 있으면 저분한테로 가서 빌고 그 다음에 조선 중기 이후에는 산신각을 뒤에 지어서 산신님, 칠성님 모시던 분들도 다 절로 흡합을 해서 불교가 끌어 앉게 되면서 사찰의 구조가 산의 산비탈을 이용하면서 자기 조형 사이트에 맞게 건물들을 배치를 해 놓아 가게 됩니다. 처음부터 마스터플랜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에 증축 사정에 따라서 지었는데 사실 이 현대 건축가들이 가서 봤을 적에는 가람배치가 아주 주변 환경과 잘 맞아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 많은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도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마는 청령에 있는 관룡사 같은 절에 가서 보면 계속해서 증축을 해 놓았던 그 집들의 모습이 레벨까지 계산을 하고 사이즈까지 해서 보면 현대 건축가들이 누가 디자인을 했는가 하는 그런 찬사를 보내는 곳이 상당히 많습니다.

 

큰 마당 만들며 주변 환경과 부조화

 

이런 좋은 전통을 갖고 있던 것이 20세기 그것도 20세기 후반 정확히 80년대 들어와서 다 망가져 버리기 시작합니다. 크고 호화로운 것을 좋아했던 그러한 풍조가 산사에 들어 와서 아늑한 공간으로 해서 아기자기하게 해 놓았던 것들을 전부 앞에다 큰 앞마당 심하게 얘기하면 군대 연병장처럼 엄청나게 큰 마당을 만들어 놓는 풍조가 들어오면서 우리 옛 사찰이 갖고 있었던 고즈넉한 맛을 다 죽이기 시작합니다.

진작에 문화재청에서 지정을 할 적에 부석사 무량수전을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석사 전체를 사적으로 지정을 하고 무량수전은 또 국보로 지정하는 방식으로 해서 이 사이트를 변경시키지 못하게 했으면 지금 우리가 많은 것을 구제할 수 있었을 텐데 또 중요한 사찰은 그렇게 해서 지금 보호를 했습니다마는 지정되지 않은 건물만... 지정된 곳도 무위사나 이런 곳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주변 건물과 주변 환경이 맞지 않은 것으로 변해진 것이 최근 20~30년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옛날 비탈이 있다는 전제 하에 건물을 배치해서 자연 속에 건물이 들어가 같이 조화하던 것을 비탈의 조건을 되도록이면 평지에 가깝게 만들어 놓고 집을 지어놓으니까 주변 사이트와 입지 조건하고 건물하고 괴리감이 생기는 그러한 일들이 생겼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영암 월출산 지나서 강진에 있는 무위사라고 하는 절이 이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주변에 동백나무라든지 느티나무로 짜여져 있는 것이 아주 단아한 맞배지붕 집으로 되어 있는 것이 지금은 양 옆을 다 터서 완전히 다 띄어 놓으니까 앞마당은 넓어졌지만 집은 덩그러니 허전하게 존재하고 있는 그런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집은 워낙 건물 자체가 오래 되어서가 아니고 건물 자체가 이 측면관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단아한 느낌을 주는 건물로서 가장 대표적인 건물의 위용이 있기 때문에 주변이 아무리 망가졌어도 무위사라고 하는 말 값을 하는데 여기 이 기울기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면 약간의 곡선이 보이고 있는데 이 측면관으로서 아름다운 것은 이것보다 예산에 있는 수덕사 대응전의 기울기가 고려시대 이 집이 훨씬 더 크기도 크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 앞에 있는 수덕사가 워낙에 제 책의 표현에 의하면 소림사 무대를 방불케 되어 있어서 그 쪽의 사진을 제가 쓰지를 않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이 기울기를 이렇게 지을 적에 보면 이따가 부석사의 무량수전의 경우에는 학이 날갯짓하고 올라갈 때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수덕사 대응전의 경우에는 학이 날갯짓하고 내려앉을 때에 그 날개의 모습이라는 표현을 써서 그래서 이것이 곡선이면서도 직선에 가까운 긴장감을 주게 됩니다.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제하면서 아래쪽으로 내려앉는 그러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수덕사 하고 무위사의 면 분할을 보면 디자인적인 면 분할 뿐 아니라 둥근 기둥과 각진 기둥이 서로 교차를 해가면서 3D로 입면체로 해서 두드러지고 벽에 붙고 하는 리듬감까지 같이 어울리고 있기 때문에 건축 부재를 그대로 다 드러내 주면서 그로 인해서 건물이 갖고 있는 견고함도 노출시켜 주면서 우리 고건축이 목조건축이 갖고 있는 서까래와 대들보 부위를 전부 노출해 주기 때문에 일본에 있는 사찰 건물은 밖에서 보면 크지만 안에 들어가면 천장이 낮게 깔려 있어서 집이 굉장히 작아 보입니다.

 

안에 들어가 보면 높은 천장이 "시원"

 

그런데 우리 건축은 밖에서 보면 작은 것 같아도 신을 벗고 안에 들어갔을 적에는 천장으로 뚫려 있는 공간감이 워낙에 크게 감싸기 때문에 우리는 더 큰 공간감과 함께 건축 부재가 갖고 있는 싱싱한 노출이 천연스러움이 우리 건축미의 자연미와 함께 중요한 특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이중 서까래를 엮을 적에도 둥근 것이 속에 있으면 바깥에는 각이 진 것으로 내고 또 반대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서까래를 낼 적에도 강약의 리듬 둥근 것과 또 각진 것의 리듬을 전부 보인 듯 보이지 않는 듯 활용을 해주는 것이 건축 낱낱부재에서도 특징입니다.

내소사에 들어가는 주차장에서 딱 보면 내소사 입구에 일주문이 보여 주고 안은 바로 보여 주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절이나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절들이 속이 깊기 때문에 처음에 보여 줄 적에는 그냥 와서 이 앞에서 딱 들어서게 되면 전나무 숲길로 1Km를 가고 그리고 가을에 가면 중간에 단풍나무들이 포진해 있고 저것이 끝나고 나면 벚꽃 나무 길을 지나서고 그 다음에 천왕문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자리에 부여의 군수님도 와 계신데 부여의 무량사에 딱 갔을 적에 매표소에서 표 사서 들고 일주문 딱 들어갔을 적에 이 꺾어서 들어가는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그때 기분이 산사로 진입 할 적에 우리에게 주는 감동과 편안함 사실 거기부터가 건축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서 들어가는 이 길에서부터 건축적인 컨셉을 가지고 조형화 한 것을 이것을 무시해 버리고 자동차로 해서 획 들어가 버리고 난 다음에 그것은 건축으로 이용을 하고 사용을 했다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거지요. 제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절에 갔을 적에는 여기에서부터 걸어가는 것으로 시작을 해야지 속세와 성역이 갖고 있는 시간적 공간적 거리감을 가지고 나갈 적에나 들어올 적에나 그것을 느끼는 데에서 우리는 사찰 건축이 가지고 있는 묘미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내소사의 경우에는 요즘에 현대 시설을 또 이용을 해야 되는 것이 추세니까 이 길은 그대로 놓고 이 옆으로 해서 자동차 길을 따로 해서 놨기 때문에 내소사 진입로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들어와도 바로 대웅전을 바로 보여주는 일은 없습니다. 돌계단을 지나서 봉래루라고 되어 있는 만세루 밑 계단으로 들어가면 이쪽에 심검당이 있고 저쪽에 적묵당이 있고 그리고 옆으로 이렇게 들어가면 대웅보전이 보이면서 이와 같이 앞마당에서 활짝 날개를 핀 팔자 지붕으로 만나는 게 뒤에 있는 능가산 그 중봉에 그 기세에 지지 않을 기세로 활짝 해서 뻗어 올리게 됩니다. 그것도 축대를 높이 쌓아 가지고서 번쩍 올려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에 만약에 이와 같은 산세 속에 무위사의 극락보존 같이 단아한 집을 놓았으면 집이 산세에 눌려서 아마 기운을 쓰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나라 사찰이 갖고 있는 것은 대개 한 네 가지 유형이 있는 중에 화엄사의 경우에는 각황전이 보여주는 것처럼 궁궐에 준할 수 있는 위엄을 갖추어 놓은 사찰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화엄사를 보면 마치 부처님을 왕과 같은 위상 속에서 궁궐에 모시는 것 같은 기분으로 모신 것입니다.

무위사 같은 절은 아주 고즈넉한 산사 속에서 선방과 함께 깊은 산속에 들어 가 있는 형상이 되고 그리고 부석사 같은 경우처럼 일망무제로 파노라마로 전개되어 있는 뷰를 전제로 해서 호방한 기상을 보여주는 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선암사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것이 마치 안동 민속마을이나 하회마을 같은 그 마을을 형성함과 같은 분위기를 해 준 것이 있습니다. 아마 이 네 가지 중에 한 가지가 우리나라 산사가 들어가 앉는 그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화엄사 각황전 오르는 첫 계단 왜 가파른지

 

화엄사에 가서 보면 아래쪽에 이쪽에 각황전이 있고 지금 이쪽에 대웅전이 있는데 이 5층탑이 있는 이 아래가 계단이 보이잖아요. 계단이 이렇게 낮습니다. 이 아래쪽에서 계단으로 올라와야 위쪽으로 각황전하고 대웅전이 있으니까 더 위를 치켜 보는 게 되겠죠. 그런데 아래쪽 탑이 있는 마당에서 각황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그냥 이렇게 되어 있지 않고 이렇게 가파르게 올라갔다 5, 6개 올라 갔다. 그 다음에 옆으로 이렇게 기울기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갖고 해석이 여러 가지가 있어요. 왜 처음부터 똑바로 쌓지 않고 한 5개의 계단은 이렇게 높이 쌓은 다음에 그 다음에 비스듬히 해 주었는가 그것을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법당으로 올라가는 그 길은 어찌됐든지 공경을 표현하기 위해서 외나무다리를 건넌다든지 이런 기울기가 있는데 뒤꿈치를 허공에 매달고 살살 가게 한다든지 만세루 밑으로 긴다든지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계단을 그냥 뒤퉁맞게 올라가지 말고 조심스럽게 올라갔다가 편하게 올라가는 장치였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있어요.

또 우리 문화에 대해서 뭔가 미심쩍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렇게 올라갔다 이렇게 된 것이 이렇게 쌓다 보니까 이렇게 쌓다가는 높아질 것 같으니까 이렇게 바꿨다’ ‘이렇게 처음에 5개 실수를 했다가 그 다음에 이렇게 바꿨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경우에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이 뭔가 다르게 알려주는 경우가 있거든요. 어떤 도자기의 아름다움도 미술사가가 얘기한 것 보다 그 도자기와 30년 동안 교감한 사람이 훨씬 더 멋진 얘기...제가 서산 마애불을 30년 지킨 아저씨 얘기가 어떤 미술사가의 얘기보다 더 우리에게 감동 있다고 얘기 하듯이 화엄사에 20몇 년 있었던 스님한테 물어봤어요. 만났을 적에 물어봤지요.

스님 화엄사 앞마당에서 각황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왜 가파르게 올라가다가 그 다음에 편안히 올라갈까요? 그랬더니 그 분 대답이 ‘아, 거기 계단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그러니까 그 분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20년 동안 산 건데. 이것은 그 사람의 감각이 그 만큼 둔했다는 얘기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그렇게 따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 계단의 구조였다고 하는 것인데 그 중에 어느 것이 답인지는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왜 그러한 이야기들이 우리들이 여태까지 화엄사에 관해서 쓴 책이라든지 답사기나 안내서 봤을 적에 그러한 이야기들은 빠져 있었는가. 이게 건축에 관한 이야기가 단지 기술적인 이야기들만 하고 있고 그것이 갖고 있는 전체, 거기에서 삶이 이루어지고 있고 종교 의식이 있고 하는 이러한 사용자 입장에서 이야기 했던 것이 없어지니까 우리들에게 그러한 섬세하게 읽혀지는 것이 누락된 것이 아니었나 하면서 저 자신은 질문으로 그것을 대신하겠습니다.

영암사 터가 갖고 있는 것은 지난 시간에 너무나도 드라마틱하고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었던 웅장한 산세 속에는 그것에 지지 않는 기세로 해서 들어갔던. 집은 없어졌지만 저 탑을 보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능히 알 수 있지요.

 

서산 개심사 윗쪽에 불만스러운 찻길

 

서산에 있는 개심사 세심동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이런 돌계단을 타고서 한 800미터를 계속계속해서 올라가는 거지요. 이게 지금 개심사의 경우에 이 위쪽으로 차길이 나있는데 지금 거기에도 저 자신은 조금 불만스러운 게 있습니다. 찻길을 내면서 좀더 바깥으로 더 뺐으면 좋은데 이 길을 올라가다 찻길하고 만나요. 그렇기 때문에 본래대로는 이 길로 쭉 올라가다 보면 대나무 신호대들이 있는 곳을 지나게 되면 바로 이런 길로 이 길로 해서 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들어가면 바로 만나는 것이 이 경지라고 하는 거울 鏡자에다가 못 池 자라고 해서 거울 못을 만나게 됩니다.

거울 못 鏡地 또는 映池 전부 다 거울 못이라는 뜻이고 이런 이름이 붙어있는 절에 거울 못이 붙어 있는 곳이 상당히 많습니다. 청평사에 영지가 있지요. 그 영지를 바라보면 청평산이 그 연못 속에 참 아름답게 비칩니다. 불국사의 전설로 되어 있는 아사달 아사녀의 전설이 있는 영지에 가면 거기에 엄청난 콘도미니엄 짓다가 부도난 집이 있어서 아주 흉악하게 되어 있는데 그 괘능 옆으로 가면 있는 그 영지에 보면 그 영지에 토함사 자락이 전부 그림자로 이렇게 지고 있습니다. 여기 거울 못도 상황산 그림자가 받쳐 주기 때문에 전부 거울 못이라는 뜻입니다. 그림자 영자나 겨울 경자나 여기에 들어오면 옆으로 해서 통나무 외나무 다리로 해서 이렇게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앞에 여름철에 배롱나무가 굉장히 아름답게 큰 배롱나무가 있는데 이런 식으로 점점 그윽하게 끌어 들여서 상왕산 개심사 해강 김규진이 쓴 만세루의 현판 이 안쪽에 보면 대웅보전, 심검당, 적묵당, 만세루로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앞에 있는 마당에는 꽃밭이 그냥 우리 학교나 집에서 보는 꽃밭과 같은 식의 아주 편안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뭐 절 집의 꽃밭이 다 그렇지 뭐 이 집만 그렇게 편한가 그렇게 또 반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불국사 앞마당에는 꽃밭이 없습니다. 아무데나 꽃밭을 만들어 놓는 것이 아니고 그 꽃밭을 만들어 놨을 적에는 그 꽃밭이 이 절이 지향하고 있는 것이 절대자가 갖고 있는 친절성을 극대화 할 것이냐 아니면 절대자가 갖고 있는 존엄의 가치를 극대화 할 것인가에 따라서 이 정원에 대한 플랜 자체가 달라져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개심사의 경우에는 경허스님이 썼던 선방 같은 데는 저 뒤로 산신각은 저 위에 느티나무 숲 위쪽으로 이렇게 퍼져 있게 되지요. 여기가 내장사인데 내장사 단풍이 이처럼 이발소 그림처럼 되어 있고 사실 이때에 가보면 사람만 바글거릴 뿐이지 이런 단풍은 못 봅니다마는 역시 만세루 밑으로 들어와서 대웅전하고 적묵당과 심검당으로 포치하고 있는 겁니다. 본래 여기 계단도 여기도 이렇게 평평하게 넓은 것이 아니고 중간에 꽃밭을 만들어서 배치를 했던 것인데 그것을 치웠습니다.

화려한 자연에는 화려하게 대응했던 가장 대표적인 게 내금강에 있는 보덕굴입니다. 이 외금강 옥류천 있는 금강산이 다 이렇게 생겼죠. 여기에 ‘이 산세에 지지 않을 암자 하나를 설계하시오’라고 했을 적에 조용하게 해야 될까? 아니면 보이지 않게 해야 될까? 여러 가지 조건이 있을 수 있지요. 언제 지었는지 모릅니다.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 때부터 내려오고 최소한도 익재 이제현 그 시절에는 분명히 지었던 집이지요. 보덕굴이라고 하는 세 사람 들어가는 암자인데 7.2미터 바지랑대 위에 여기 창문 열려있는 이것만이 암자입니다. 그리고 이 암자를 가려면 지금 저는 이쪽에서 사진을 찍는데 같이 방북했던 고은 선생님이 먼저 이렇게 돌아서 이쪽에 지금 내려가고 있어요. 멀리서 보면 3층 집이지만 위에 있는 집들은 멀리서 보여질 게 외롭지 않게 보기 위한 장치이고 또 빗물이 내릴 적에 물받이로 해오는 기능일 것이고 여기 내려가서 여기 3명 들어가게 되면 벌써 흔들거리기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철, 쇠줄을 가지고 허리띠를 양쪽으로 매가지고 집을 붙잡아 맺고 여기는 18개의 구리 동판을 가지고 이렇게 매어서 이렇게 바지랑대를 놓고 굴 자체는 암자 자체는 이 방 하나입니다. 옆에 이쪽 사진을 이렇게 해 놓으면 여기 ‘사회주의 건설만세’ 이렇게 큰 글씨가 쓰여 있습니다.

 

아늑하면서도 시야 툭터진 무량수전

 

이 집은 한옥 지붕이 어떤 식으로 지어도 네 가지 이상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 네 가지가 다 있습니다. 눈썹지붕, 팔작지붕, 맛배지붕, 우진각 지붕 그리고 단순하고 화려하고 단순하고 화려한 걸로 엮었습니다. 또 1층을 딱 올린 것은 우리가 3층 석탑이나 정림사탑처럼 1층은 껑충하게 올라가고 그 다음에 차곡차곡 해 주는 것과 같은 안정된 차감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게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잘 들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옛날 사람들이 한 것이 어쩌면 산에 가서 보면 좋은 절터는 다 스님들이 차지하고 있고 그리고 거기에 지어진 집들은 그 산세에 맞춰서 있었던가 하는 것에 대해 가지고 산사의 미학이라고 하는 우리 개념 체제가 일찍이 정립돼서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공유할 수 있는 미학이었다면 20세기 후반 21세기에 짓는 건축은 그 미학에 입각해서 지을 때 지금처럼 그냥 화려하고 큰 것만을 추구하지는 않았을 텐데 특히 우리에게 너무나도 편안하게 해 놓은 것이 어떤 면에서 건축적인 의장이 미흡하게 들어간 것으로 오해되어 왔던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참으로 아쉬움을 남깁니다.

무량수전에 올라와서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눈길이 가는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 된 듯 싶어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 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줄 수 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이게 3년전 수능 국어 시험에 나왔던 문장입니다.

무량수전이 여러분들이 가서 무량수전 팔작지붕의 기울기가 학이 날갯짓하고 올라가는 그 리드미컬 한 것을 보여주고 있고 그리고 여기에 주심포 집으로 해서 해놓은 것이 오직 필요한 것 이상의 군더더기는 하나도 붙여주지 않은 필요미 간결미가 지켜주고 있는 엄숙성. 이것이 이 건축의 요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건축에서 제일 중요한 하는 로케이션이지요. 싸이트이지요. 싸이트에서 자리잡음인데 최순우 선생처럼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섰기 때문에 이 아름다움이 들어오는 것이고 이 시야가 있다는 전제 하에서 무량수전이 이 자리에 세워 진 거지요.

교토에 가면 ‘기요미즈데라’ 라고 하는 청수사라고 하는 절이 있는데 그 청수사라고 하는 절이 유명한 것은 그 절보다도 그 절에서 내려다보는 교토의 경관을 보여주는 것 때문에 청수사가 유명했습니다. 교토의 호텔 50층 자리 짓는 것 하고 이 기요미즈데라를 비롯한 교토 사찰하고 싸워서 결국은 15층으로 낮춰 놓았지요.

그러니까 지금도 교토 같은 곳에 50층을 짓겠다는 문화가 있는데 결국은 싸워서 또 이기는 문화가 있는 게 일본입니다. 한편으로는 지어야 된다고 하는 문화가 있고 한편으로 그것을 못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부석사 우리가 간혹 가다가 우리의 건축을 얘기하면 스케일을 얘기하는데 부석사 보다 더 큰 정원을 갖고 있는 절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저것을 다 자기의 정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여기에다가 이것을 지은 겁니다.

경복궁을 보고 자금성의 뭐 뒷간만하다고 얘기하지만 자금성이 어디 북악산, 인왕산 같은 산이 있습니까? 그것을 전제로 해서 지은 것이고 자금성 가 봐요. 처음부터 끝까지 뭐 때문에 갔다 왔는지 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고 처음에 본거나 끝에 가서 본거나 똑같잖아.

우리가 갖고 있는 산사 중에서 이런 시원한 눈 맛을 갖고 있었던 것이 여러 절중에서 부석사 하나로서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 됩니다.

 

토사 막아주는 선암사 삼인당 연못

 

마지막으로 선암사를 가는데 선암사 입구에는 들어가면 삼인당이라고 하는 연못이 있습니다. 연못이 있는데 아직 일주문은 안 왔어요. 들어가는 진입로 자체가 건축이니까 이 연못이 있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토목공학적, 종교적, 미학적 여러 가지 조건이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이 연못이 있기 때문에 장마 때 물을 담가서 고아 가지고 속도를 줄여서 밑으로 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없으면 그 위에서 내려오는 경사 급한 데서 내려오는 물길에 그냥 토사가 생겨가지고 선암사 계곡으로 빠져 버렸을 거에요. 여기에 섬이 있는데 섬이 있기 때문에 물이 들어가서 한 대 때리면 물이 들어가서 때리면 여울이 져서 전체를 돌아 가지고서 나갑니다. 그러니까 물의 회로를 다 유도를 해주는 거지요. 또 섬이 있는 것은 섬이 있어야 연못이 커 보입니다. 이것이 섬이 없으면 연못이 요만한데 섬이 있음으로 해서 상상과 그 너머의 공간이 보이는 연출되는 겁니다.

조금 수준 높여서 얘기하면은 ‘루돌퍼 아르나이미’라는 사람이 쓴 ‘비주얼 퍼셉션’ 시각적 인식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을 보면 ‘인간의 시각적인 습성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한 자세한 얘기들이 나오는 데 여기 무대라고 할 적에 본래 무대에서 가운데 시선이 많이 오지만 그 다음번에 많이 오는 곳은 저쪽입니다. 여기보다도 그래서 하무레트나 이런 연극을 보게 되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뭐 하는 것은 저쪽 무대에서 이루어지고 칼 싸워서 죽이는 것은 다 이쪽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저쪽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제대로 오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고 이쪽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갑자기 무슨 사건이 나서 등장하는 사람. 이게 전부다가 오른쪽과 왼쪽에 대한 인간 심리에 대해서 나온 것을 그 사람이 그런 것을 다 분석을 한 분이에요. 그분이 ‘모든 물체는 공간 속에서 또 다른 공간감을 창출한다’ 서귀포 앞바다에서 그냥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 하고 거기에 참치잡이... 참치는 없겠지. 갈치잡이 배 세 개가 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공간감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여기에도 이 속에 섬 하나를 넣어주는 것 하고 이것이 없는 것하고의 그 공간감의 차이를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종교적으로는 옛날 판유리가 나오기 전에 청동거울 말고 판유리 유리 거울로 색경으로 자기 전신을 비쳐볼 수 있는 것은 연못뿐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을 비쳐볼 수 있는 거울이라는 뜻에서 心印 마음 心자에 도장印까지 포함해서 삼인당 이라고 하는 연못 이름을 갖고 있고 선암사에서는 이와 같은 연못이 6개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암사 일주문으로 들어서게 되면 그 바로 앞에는 ‘육조고사’라고 하는 만세루의 이름이 써 있습니다. 추사의 제자 추사풍으로 썼기 때문에 이렇게 아주 굳세면서도 아주 힘 있고 개성적인 글씨를 썼어요. 육조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절. 달마 시대에서부터 내려오는 절. 그런 뜻이겠지요.

본래 선암사의 지금 23채의 당우가 있고 본래 50여채가 있었던 것인데 이 집이 처음 시작은 이렇게 시작했어요. 대웅전, 만세루, 심검당, 적묵당 4개로 시작했다가 명부전, 관음전, 응진전, 선방으로 이렇게 계속해서 뒤에 무전 이렇게 퍼져나갔습니다. 본래 마당이 이만했어요. 여기에 한 채 한 채 절 집을 지어 들어갔는데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포치가 되어 있어서 선암사에 가서 봤을 적에는 어떤 유서 깊은 마을을 온 것 같은 그런 편안함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선암사 뒷간 보물이든 국보든 지정 조사

 

선암사에 뒷간이 있는데 이 선암사 변소 내가 하여튼 보물이 되든 국보가 되든 하여튼 지정을 해야 된다고 지정 조사가 나갈 겁니다. 일본의 동복사라고 하는 절은 절의 뒷간은 국보로 지정이 됐어요. 여기에 써 있잖아요. ‘대변소 뒷간’ 하고. 이것을 요새 애들이 한문을 잘못 읽어서 깐디라고 읽어 가지고 선암사 깐디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이 집은 지금도 사용을 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선암사에서는 화장실 냄새가 안 납니다. 그것은 그기류가 선암사 뒷간으로 해서 아래쪽으로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조계산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 그쪽으로 나지 선암사 안에서는 절대로 뒷간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선암사에는 천연덕스러운 데가 굉장히 많습니다. 선암사 저 위 달마전 위에 무락이 하나 있는데 동그란 무락이 하나 있었어요. 그걸로 사용했어. 그런데 당우가 늘어나고 사람이 늘어나니까 이 무락을 갈아야 되는 거에요. 그러면 요새 같으면 그거 걷어 내고서 이거 큰 것 놨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또 사람이 5채가 있다가 10채가 되고 20채가 됐다고 그럼 무락이 또 큰 거로 되어야 될 것 아니겠어요. 그거 선암사는 어렵지 않게 했어요. 그냥 처음에 이거 쓰다가 많으니깐 놓았다가 4단 석조로 해가지고 지금 쓰고 있는 겁니다. 그게 지금 유명한 선암사 달마전의 4단 석조에요.

이집트에 가면 핫셉슈트라고 발음하기 힘든 여자 왕의 제사 지내던 장제전이라고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계단이 하나인데 가까이 보면 둘로 끊어지면서 가는 곳이 있어요. 그것이 서양의 건축 속에서 제사 지내는 공간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 이집트의 3,500년 전에 핫셉슈트 장제전과 파르테논 신전 같은 석조 문화재로의 장엄미 단순성 속에서 필요한 부재 이상의 것은 들어가지 않는데 면 비례로도 그렇고 종묘를 보고 세계 건축가들이 놀랜 것이 기둥하고 지붕 벽면 외에 다른 공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단순한 공간으로 고요... 제사 지나는 공간이기 때문에 정밀하고 고요하면서도 엄숙해야 되는 것이거든요. ‘이 고요의 감정을 엄숙의 느낌을 건축으로 이와 같이 실현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여러분들이 종묘에 갔을 적에 보면 지금 박석이 깔려 있는데 종묘 문 앞에 딱 들어서면 이 종묘 앞에 월대라고 박석 깔려 있는 것이 우리 가슴 높이에서 옵니다.

여기 여러분이 서면 가슴 높이 내 가슴 높이에 묻혀 있는 거지요. 내가 섰는데 월대가 밑으로 있는 것 하고 내 가슴 높이에서 이렇게 전개되고 그 위에 지붕이 일직선으로 해서 쭉 단순하게 가는 것 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 선대를 제사 지내는 엄숙성을 그렇게 지켜왔어요. 가면 저기 혼유도 외에 옆에 박석들이 아주 울퉁불퉁 하게 된 것 가지고서는 사람들이 저걸 헐뜯어요. ‘한국 사람들 다 잘하는 마무리가 약해 갖고 이렇게 지저분하게 저것 반듯이 못 다듬는다’고 이렇게 얘기해요.

저 박석이 없어서 창덕궁 비원에 인정전 앞을 화강암을 돌을 짜 가지고서는 이렇게 쫙 깔려 있습니다. 가서 보십시오. 그 모양이 얼마나 못생겼는가. 또 경복궁에 한쪽에서는 거기에 이것을 화강암을 반듯하게 해서 놨다가 하루 만에 드러낸 일이 있어요. 눈이 부셔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박석은 난반사를 시켜 줍니다. 그리고 이 전체가 기울기가 있는데 근정전 앞에 있는 것도 그래요. 이 박석도 도로 포장하는 데 쓰는 네 치 두께의 판때기로 우리가 이번에 문화재청에서 강화도 석모도에서 박석 광산을 찾아 가지고 지금 우리가 전부 궁릉에 이것들을 전부다 보수할 계획인데 비가 왔을 적에 난반사를 시켜주기 때문에 경복궁이나 종묘 월대에 긍정전이나 월대에 갔을 때 종묘에 갔을 때 눈이 절대 부시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장마철에 비가 왔을 적에 얼마나 폭우가 쏟아집니까? 만약에 이게 화강암으로 쭉 했으면 하수도로 빠지지 못해서 역류 해 버릴 거에요. 그런데 이것은 박석을 따라서 꾸불탕 꾸불탕 이렇게 물길이 돌아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포장도로 10미터 갈 것을 비포장 도로 80미터로 돌려 가지고 물길이 고였다 넘어갔다 고였다 넘어갔다 유속을 죽여가면서 빨아가는 효과를 합니다. 조상들의 그 깊은 뜻은 모르고 ‘다 잘했는데 왜 박석은 왜 저렇게’ 서양건축가들은 저렇게 정제된 곳에 이쪽에 돌판을 깔면서 모더니즘적 감각으로 이렇게 무질서한 것을 짜깁기를 해서 질서를 놓은 것. 이렇게 칭찬을 해가는 것은 아주 한국에 대해서 감탄할 만반의 준비를 한 사람들이 해석한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에 존경심이 없는 사람들은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얘기를 해 왔던 겁니다. 종묘, 그것이 왜 세계문화유산으로 첫 번째 되어 있는가 이 다음에 한번 가 보십시오. 이러한 풍광을 우리는 잊어 버렸죠. 더 이상 찾을 길이 없지요.

 

13개 지구 왕릉 묶어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왕릉도 그냥 왕릉이라고 하면 옛날 임금 묻힌데 묏자리 좋고 뭐 이런 식으로 얘기할는지 모르지만 왕릉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죽음의 공간을 가장 장엄하게 연출해 놓은 것이 왕릉입니다. 왕릉을 축소해서 놓으면 일반 민묘와 같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 조선시대 사람들이 우리는 어차피 죽는데 그 죽음의 공간을 어떻게 장엄하는 것이 가장 성스럽고 그리고 망자에 대해서 살아남은 자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가를 연출 해 놓은 최고의 형태의 건축적인 장치인 것입니다.

이 왕릉이 13개 지구에 능원묘 다 해서 100개가 넘습니다. 이런 공간이 서울 주변에 수도권에 있는 것이 이게 다 묶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것이 저희 문화재청의 뜻이고 그것을 위해서 지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왕릉은 밑에서 쳐다보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고 능치 위에 올라가서 보게 되면 조각에서부터 묏자리가 앉아 있는 주변모습하고 해서 우리에게 또 다른 감동을 주기 때문에 어떤 능이든지 한군데는 능치 위로 올라가게 할 수 있는 개방시설을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구릉에 가서 아예 이쪽에 선조대왕 몽릉지구는 특별관람지역으로 천원 더 낸 사람은 그 속에 마음대로 가서 뒹굴든지 말든지 들어가게 개방을 할 생각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건축의 모든 제사 공간이나 능의 구조나 또는 절 집이나 다만 양반 가옥이나 이쪽에 대해가지고 제가 강의를 못했습니다마는 이런 시각 속에서 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건축이 산사의 미학이 주고 있는 게 우리 시대의 건축이 주는 그 의미가 살아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현대의 느낌과 또 한편으로는 전통이 갖고 있는 위대함. 이것을 우리의 삶 공간에서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한번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 문화재청
글쓴이 : 문화재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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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회연재_①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북악산 서울 성곽

-서울성곽-
글 : 유홍준 문화재청장

서울 성곽 (사적 및 명승 제10호)
1392년 7월17일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이 겨울철을 앞두고 공사를 일으킬 수 없다고 반대하자, 시기를 연기하여 궁궐과 종묘, 사직, 관공서 등을 건축한 뒤에 천도하기로 하였다.
이듬해(1393년) 정월에 권중화權中和가 풍수지리학상 계룡산이 새 도읍으로 가장 좋은 곳이라고 건의하자, 태조는 직접 무학대사無學大師와 지관들을 데리고 계룡산으로 내려가 신도新都를 정하고 각 도에서 인부를 차출하여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하륜河崙이 송나라 호순신胡舜臣의 지리서를 이용하여 계룡산 신도의 부당함을 상소하자 태조는 일단 공사를 중단하고 권중화, 정도전鄭道傳 등을 불러 하륜이 제기한 문제를 검토하도록 했다. 그 결과 계룡산이 신도로는 적절치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신도 후보지를 물색하기에 이르렀다.
[경복궁과 북악산]

신도 후보지가 저마다의 풍수 이론에 따라 이견이 크자 태조는 재위 3년(1394) 8월8일부터 13일까지, 무학대사를 대동하고 자신이 직접 현장을 시찰한 다음 지금의 서울 지역으로 천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태조는 곧바로 정도전을 한양에 파견하여 도시 건설 전체를 맡기고, 9월에는 신도조성도감新都造成都監, 신도읍 조성 임시 본부을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권중화 등과 협력하여 종묘, 사직, 궁궐, 도로, 시장 등 도시계획을 작성하였고 그해 12월에 종묘의 터 닦기를 시작으로 공사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약 10개월 후인 태조 4년(1395) 9월29일에 대묘와 새 궁궐이 완성되었다.(태조가 경복궁에 입주한 것은 12월 28일이었다.) 이 공사에 필요한 인력은 전국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충당하였고, 한양과 가까운 경기도, 충청도의 민간 장정들은 농한기인 1, 2월과 8, 9월 가을에만 동원하였다.
[북악산 촛대바위에서 내려다본 경복궁과 서울 시내]

경복궁, 종묘, 사직단 건립이 완성된 다음 달인 윤9월, 태조는 곧바로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함과 동시에 정도전에게 도성 축조 기본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이때에도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의견이 엇갈려 인왕산 선바위를 서울 성곽 안으로 할 것인가, 바깥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격렬히 대립하였다. 《조선불교통사》에 전해지는 일화에 의하면 양쪽의 주장이 너무 강하여 태조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어느 날 큰 눈이 내렸다. 이튿날 아침 한양의 안쪽은 눈이 녹은 반면에 바깥쪽은 여전히 녹지 않고 하얗게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그 눈 녹은 선을 따라 성곽의 선을 그었다고 한다. 그때 인왕산 선바위는 눈이 그대로 남아 있어 서울 성곽 바깥쪽으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결정된 서울 성곽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59,500척(약 18.2km)이었다. 서울 성곽은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축조하기로 계획되었는데, 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만 하기로 하고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시행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396년 1, 2월 49일 동안에 걸친 1차 공사에는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등에서 11만8천 명을 동원하였다. 이때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는 전 해에 궁궐 공사 때 차출되었기 때문에 면제시켰고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도 국방상의 임무를 고려하여 동원하지 않았다. 1차 공사에서 서울 성곽은 대부분 완공되었고, 다만 동대문 지역은 웅덩이로 되어 있어 말뚝을 박고 돌을 채워 기초를 다져야 했기 때문에 늦어질 수밖에 없어 미완성으로 남겨 두었다.
[수선전도, 1840년대(김정호 제작) 목판본,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성곽의 공사는 총 길이 59,500척을 600척(약 180m) 기준으로 모두 97구역으로 나누어 진행하였고, 각 구역을 북악산 산마루에서 동쪽으로 돌면서 천자문千字文의 천지현황天地玄黃의 천天 자부터 조민벌죄弔民罰罪의 조弔자까지 이름을 붙였다. 성곽 전체를 600척으로 나누면 97척 하고도 1,300척이 남는데 이는 인왕산 부근 자연 암반 절벽을 그대로 성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다시 가을 농한기인 8, 9월에는 49일 동안 7만9천4백 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고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준공하였다. 그리고 문루의 누각들은 공사 후 건축 기술이 뛰어난 승려들을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남대문은 2년 뒤인 태조 7년(1398)에야 준공되었다.
그후 27년이 지난 세종 4년(1422), 세종은 서울 성곽에 대한 전면적인 보수 정비 작업을 시행하였다. 이 공사는 결과적으로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 사업이었으며, 1, 2월 농한기 38일 동안 전국에서 약 32만 명의 인부와 2천2백 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약 1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공사였고, 사망자만 872명에 달했다. 이것이 지금 서울 성곽의 기본 골격이다.
[곡장에서 북악산 정상으로 길게 이어지는 서울 성곽]

이후 서울 성곽을 재정비했던 숙종 30년(1704)까지 260년 동안 성곽은 부분적으로 보수했을 뿐 크게 붕괴된 곳은 없었다. 본래 서울 성곽은 도성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았지만 정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구실을 하지 못했고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전란으로 인한 큰 피해는 없었다.
임진왜란의 경험을 토대로 인조는 서울 성곽과는 별도로 전쟁에 대비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과 강도성江都城, 강화도 산성을 수축하였다. 그러나 인조14년(1636)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에 맺은 ‘삼전도 맹약盟約’ 중에 ‘조선은 앞으로 기존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성곽을 쌓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서울 성곽은 방치된 상태로 놓아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근 70년 지난 숙종 30년(1704)에 이르러, 숙종은 일부 신하들이 청나라와의 조약을 들어 반대하는 것을 물리치고 서울 성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이 공사는 6년에 걸쳐 시행되었고, 서울 성곽이 정비되자 숙종은 이듬해인 재위 37년(1711), 곧바로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수축하여 도성의 방어체제를 정비하였다. 이것이 근대 사회로 들어오면서 의도적으로 헐어내기 이전의 서울 성곽이다.
[촛대바위에서 숙정문으로 이어지는 서울 성곽]

이후 고종36년(1899)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를 부설하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부근의 성곽 일부가 헐려 나갔고, 이듬해에는 용산과 종로 사이 전차를 부설하기 위해 남대문 부근을 철거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서대문과 혜화문동소문이 헐려 사실상 서울의 평지 성곽은 모두 철거되어 오늘날에는 총 길이 18.2km 중 산지 성곽 10.5km만 남게 되었다.
2006년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는 서울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서울 성곽을 가능한 한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그 정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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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발간한 [북악산 서울성곽]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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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회연재_② ] 북악산 서울 성곽, 성벽에 관하여 ...
글 : 유홍준 문화재청장


성벽에 새겨진 글자들
서울 성곽의 성벽 돌 중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들이 있다. 이는 대개 성벽 축조 당시 공사 구역을 표시한 것(천자문의 글자 劒, 崗, 辰 등), 공사 담당 군현(의령, 흥해 등), 그리고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 등을 표시한 것이다.
서울 성곽은 태조 5년(1396) 처음 쌓을 때부터 전체 59,500척(약18.2km)을 600척 단위로 나누어 총 97구역으로 구획하고 천자문 순서로 표시하였다. 북악산 정상에서 천지현황天地玄黃의 천天 자로 시작하여 낙산, 남산, 인왕산을 거쳐 조민벌죄弔民伐罪, 불쌍한 백성을 돕고 죄지은 자를 벌하다의 조弔 자에서 끝난다.
성벽 곳곳에는 ‘진자종면辰字終面, 진자 구역 끝지점’, ‘강자육백척崗字六百尺, 강자구역 600척’ 등 각 구역을 표시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 조선 팔도 각 지역에서 인원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도道 또는 현縣의 담당 지역을 표시하여 ‘의령시면宜寧始面, 경상남도 의령 시작 지점’, ‘흥해시면興海始面,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 시작 지점’ 등의 글씨가 성벽 돌에 새겨져 있다. 이러한 공사 실명제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후대에는 아예 감독관의 직책과 이름 및 날짜가 기록된 것도 있다.
가경 9년(1804년) 갑자 10월일嘉慶九年 甲子 十月日 패장牌將 오재민吳再敏, 감관監官 이동한李東翰 변수邊首, 기술자, 편수 용성휘龍聖輝 등을 기록한 글씨도 보인다.

[청운대 부근 성벽에 새겨진 글자들로, 공사를 감독한 사람의 이름과 날짜를 적어 공사 실명제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성벽 축조의 시대별 차이

[태조 5년(1396)의 성벽으로 큰 메주만 한 크기의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다.]


[세종 4년(1422)의 성벽으로 장방형 돌을 기본으로 하면서 사이사이에 잔돌을 섞어 쌓았다.]


[숙종 30년(1704)의 성벽으로 2자×2자의 석재를 정사각형에 가깝게 규격화하여 튼튼하게 쌓았으며, 장정 4명이 들 수 있는 무게이다.]


성벽의 구조
[ 곡장曲墻 또는 치성雉城 ]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 시설로 성곽 중 일부를 자연 지세에 맞추어 돌출시킨 것을 치 또는 곡성이라고 부른다. 치雉는 생김새가 꿩의 머리처럼 돌출되었다고 해서 붙인 것이며, 각이 진 것을 치성이라고 하고 반원형으로 굽은 것을 곡장이라고 한다.

[반원형 곡장, 각형 치]


[ 여장女墻 ]
성곽 위의 담장을 여장 또는 성가퀴라고 부른다. 아군의 몸을 가리면서 적을 총이나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로 총격전이 잦아지면서 많이 축조되었다. 1개 여장을 1타라 부르며 1타에는 3개의 총 쏘는 구멍이 있다. 가까운 곳을 쏘는 근총안近銃眼 1개가 한가운데 있고, 양옆에는 먼 데를 쏘는 원총안遠銃眼 2개가 설치되어 있다. 원총안은 대개 구멍을 수평으로 뚫은 반면 근총안은 비스듬히 아래쪽을 향하고 있다.

[ 촛대바위와 청운대 사이 길게 돌출된 곡장]


[곡장 위의 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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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발간한 [북악산 서울성곽]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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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이 뽑은 작품 톱

폴 들라로슈 Paul Delaroche,

 

[어린 순교자]The Young Martyr

원제목:A Christian Martyr Drowned in the Tiber During the Reign of Diocletian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us)왕조 하에서 티베르강에 던져저 죽은 그리스도 순교 소녀

 

 

(12)Andrew Wyeth, 

Master Bedroom

 


(13)고흐 Vincent van Gogh,

[밤의 카페 테라스]Cafe Terrace at Night

Café Terrace at Night


(14)W.H. Beard .,

[춤추는 곰]Dancing Bears 

 


(15)Edward Hopper

Nighthawks

Nighthawks


 

(16)Pablo Picasso,  

Blue Nude

 

Blue Nude, 1902 Framed Art Print by Pablo Picasso


(17)El Greco,  

View of Toledo

View of Toledo

 

 

(18)Vincent van Gogh

Starry Night over the Rhone

  Image:Starry Night Over the Rhone.jpg


 
(20) Waterhouse

The Lady of Shalott


출처 : ronaldo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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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기업’을 가다]⑨유리공예품제조 기타이치 가라스


①기타이치 가라스 3호관의 ‘와후()’ 매장. 일본적인 색채를 살린 제품들을 전시해 놓은 매장으로 상대적으로 비싼 상품들이 적지 않다. ②기타이치 가라스의 장인이 유리 장식품을 만들고 있다. ③아사하라 겐조 사장이 유리 공예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오타루=서영아 특파원

석유램프 수요 줄자 수제 유리공예품으로 승부

발상의 전환이 ‘오타루=유리’ 낳았다

《“기타이치 가라스는 오타루에서만 팝니다”. 일본 홋카이도() 서쪽의 항구도시 오타루(). 메이지() 말기의 흔적이 잘 보존돼 있는 인구 15만의 이 도시는 연간 700만∼8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관광지이자 일본 최고의 유리제품이 생산되는 고장으로 유명하다. 가스등과 운하, 역사적 건축이 즐비한 거리에서는 ‘기타이치 가라스()’라는 간판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12일 오타루 관광의 필수 코스가 된 기타이치 가라스 3호관을 찾아 창업자의 3대손인 아사하라 겐조(·61) 사장을 만났다.》

“오타루에 와야만 살 수 있다” 아예 통신판매도 안 해

관광객 ‘쇼핑 필수품’ 인기… 지역 경제 부흥 이끌어

○ 지역 명물 상품으로 우뚝

창업자 아사하라 히사키치()는 오사카()에서 유리공법을 배운 뒤 1901년 오타루로 터전을 옮겨 석유램프를 만들었다. 오타루가 홋카이도 개척의 관문으로 번성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회사 이름은 ‘아사하라 가라스’.

그 뒤 그는 청어 잡이에 사용하는 ‘우키타마(부낭)’를 개발해 홋카이도 어업의 역사를 다시 쓰게 했다는 평을 얻었다. 낙농 농가를 돌며 개량을 거듭한 뒤 내놓은 우유병은 공급이 달려 1911년에는 대량생산하기 위해 공장을 세웠다.

2대 히사시게()가 판매부문 책임자가 된 1940년대, 회사는 홋카이도 일대에 공장을 5개나 운영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는 법. 전기 보급과 함께 가정에서 석유램프가 밀려났고 어업이 쇠퇴하면서 부낭 수요도 격감했다. 플라스틱과 종이팩의 공습에도 속수무책이었다. 오타루 경제도 차츰 쇠퇴해 갔다.

1970년, 25세에 가업을 잇게 된 현 사장 겐조 씨는 중대 결단을 내렸다. 악화된 경영을 타개하기 위해 문을 일단 닫고 새 출발을 하기로 한 것.

주변에서는 반대가 극심했지만 그는 “회사의 존재 방식이 변하고 있다”며 밀어붙였다.

“새 회사 이름은 듣기 쉬우면서도 강한 느낌을 주는 ‘기타()’를 넣기로 했습니다. ‘’이란 한자가 좌우대칭이라 유리에 새기면 뒷면에서도 읽힌다는 것도 큰 이유였죠.”

1971년 ‘기타이치 가라스’가 탄생했다. 주력 상품도 램프가 아니라 도시생활인을 겨냥한 고급 수제 유리공예품으로 전환했다. 자신은 판매를 맡고 과거의 장인들에게 납품을 의뢰했다. 고객이 직접 램프 불빛의 장점을 체험케 하기 위해 찻집과 레스토랑을 열고 그 귀퉁이에서 유리공예품을 팔았다.

마침 전국에 배낭여행 바람이 불었다. 오타루의 유리제품은 배낭족의 선물용으로 팔려나가 전국에 전파됐다.

이렇게 해서 차츰 늘려간 매장이 현재 10곳, 총 6600m²의 공간에서 340여 명의 종업원이 일한다. 매출은 철따라 들쭉날쭉한 관광객 수와 정확하게 비례한다고 한다.

○ 오타루와 운명을 같이하다


영화 ‘러브레터’의 배경으로도 널리 알려진 오타루지만 관광도시로 부상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의 일이다. 오타루 시민들이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는 ‘마을 만들기’ 노력을 한 결과다. 이 과정에서 기타이치 가라스는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회사의 외형이 변하는 가운데서도 창업자로부터 겐조 씨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고객의 생활과 밀착한 제품을 만든다’는 ‘모노즈쿠리(제조업)’ 정신.

“회사도 시대와 함께 변해야 합니다. 세상에 필요한 것을 찾아 끊임없이 스스로 변신하는 것, 저는 그것이 창업자의 정신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타이치 가라스의 제품은 오타루 한정 판매를 원칙으로 한다. 통신판매도 하지 않을뿐더러 아예 제품 카탈로그도 없다. 고객이 직접 와서 보고 골라 달라는 것.

“도쿄() 같은 곳에 매장을 내는 방안을 검토한 적도 있지만 무엇보다 고객들이 반대합니다. 기타이치 유리제품은 오타루에 와서 사는 게 좋다는 겁니다.”

3호관 내에서도 167개의 석유램프만으로 조명을 갖춘 레스토랑 ‘기타이치 홀’은 아사하라 사장의 자랑거리다.

“전국에서 찾아오는 단골들이 ‘오타루에 램프가 없다면 온기가 느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분들의 마음만큼 소중한 게 없죠.”

기타이치 가라스 개요
구분 내용
창업연도 1901년
설립자 아사하라 히사키치()
업종 유리제품 제조 및 판매, 수입, 찻집 및 레스토랑 경영
연매출액 약 30억 엔
종업원 수 346명(정규사원 139명)
본사 소재지 홋카이도 오타루
홈페이지 www.kitaichiglass.co.jp
특기사항 10개 매장은 모두 오타루 시내에 있음
수상 1989년 제1회 오타루 도시경관상
1989년 노동대신상
1990년 제4회 도쿄 크리에이션 대상 개발상
1991년 통상산업대신상
2003년 홋카이도 지역문화장려특별상, 기업시민문화상

 


출처 : ronaldo200
글쓴이 : 이기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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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가 밝히는 것은 근거가 있다.




첫 아기를 낳은 뒤부터 아내가 `잠자리 관심`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를 흔히 듣는다.
신혼기의 `수줍음`을 버리고 `밤을 밝히게` 되었다는 것.

남편은 좋기도 하고 부담도 되겠지만 이는 의학적으로 확실한 근거가 있는 변화란다.
성감만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명기`로 변신하는 예도 많다고.
 
출산 때 일어나는 `자궁탈로현상`은 원상회복이 되지 않고 마치 혀처럼 음부에 남게 된다.
이 `혀`는 신경이 아주 예민한 생체조직이기 때문에 질벽보다 훨씬 민감한 것이 특징.
서양에서는 이를 `님프의 혀`로 부르는데, 호색한 여인의 대명사가 되기도 한다.

자궁탈로현상은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혀가 한개로 끝나지 않고
두세개가 되는 예도 있다.
 
결국 출산 경험이 있는 여자는 `님프의 혀`의 도움으로 섹스에 눈을 뜰 뿐 아니라
남편에게도 자극의 즐거움을 배가시켜주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발휘한다고.
그래서 조강지처를 끝까지 사랑하면 복을 받는다는 속담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옛 황제들은 3천 궁녀와 이렇게 잤다!!!

 




≪예기*곡례≫ 하편에는「천자에게는 후(后)가 있고, 부인(夫人)이 있고, 세부(世婦),
빈(嬪), 처(妻), 첩(妾)이 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천자의 정실부인을 후(后)라 하고,
부인(夫人)이하 첩(妾)까지는 모두 천자를 모시는 여인들의 등급이다.

또한 천자에게는 부인이 세 사람, 빈이 아홉 사람, 세부가 27명, 어처가 81명이며,
첩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흔히들 그것를 삼천궁녀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실로 천문학적인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중국의 역대 제왕(帝王)들은, 이토록 많고 많은 후궁(後宮) 비빈(妃嬪)들과의
무리없는 스케줄(?) 안배를 위하여 어떤 규칙을 적용하였을까?

주(周)나라 때의 사람들은 천체(天體) 음양(陰陽) 역수(曆數) 등으로 일의 순서를
결정하였으며, 심지어는 비빈과 제왕의 데이트 순서까지도 달(월/月)의
흐리고 맑은 것이나, 차고 기우는 것, 즉 음청원결(陰晴圓缺)에 의하여 결정하였다.

이른바 달의 음청원결(陰晴圓缺)이란, 달이 매월 초하루에서 보름까지 점점 차올랐다가
보름에서 그믐날까지의 15일 동안 점점 기우는 것을 말한다.

제왕과의 동상(同床)은 이러한 원칙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는데, 초하루에서 보름까지는
지위가 낮은 궁녀에서 시작하여 지위가 높은 비빈이나 정실(正室)로 안배하였으며,
보름을 기준으로 다시 지위가 높은 비빈부터 시작하여 지위가 낮은 궁녀를 배열하였다.

황후(皇后)와 세 명의 일품(一品)부인들은 절대적인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구빈(九賓)이하에 이르면 모두 아홉 명이 함께 황제를 모시고 잠을 자게 되어 있었다.
한 남자와 아홉 여자가 함께 잔다면 도대체 어떻게 자야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일단, 규정에 의한 황제의 잠자리 배정표(?)을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01일-09일 (9일동안) : 81명의 어처(御妻)들이 매일 밤 9명씩 1개조가 되어 동침(同寢)
10일-12일 (3일동안) : 27명의 세부(世婦)들이 매일 9명씩 1개조가 되어 동침(同寢)
13일 (1일동안) : 구빈(九賓)들이 돌아가며 동침(同寢).
14일 (1일동안) : 삼부인(三夫人)들이 돌아가며 동침(同寢).
15일 (1일동안) : 황후(皇后) 혼자서 동침(同寢).
16일 (1일동안) : 황후(皇后) 혼자서 동침(同寢).
17일 (1일동안) : 삼부인(三夫人)들이 돌아가며 동침(同寢).
18일 (1일동안) : 구빈(九賓)들이 돌아가며 동침(同寢).
19일-21일 (3일동안) : 27명의 세부(世婦)들이 매일 9명씩 1개조가 되어 동침(同寢).
22일-30일 (9일동안) : 81명의 어처(御妻)들이 매일 밤 9명씩 1개조가 동침(同寢).

한달 동안, 황후, 삼부인(三夫人), 구빈들은 이틀 밤을 황제와 함께 보낼 수 있고,
세부(世婦)들은 여섯 밤을, 어처(御妻)들은 열여덟 밤을 보낼 수 있다.

이러한 분배방식은 비빈들의 간의 갈등을 줄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황제가 특정된 아홉 여성에게만 관심을 갖게된다면 나머지 비빈들은
할 일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은, 비빈들의 입장에서 보면 유리하지만,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좋을 게 없다.
동침할 상대를 강제적으로 규정한 것은 아무래도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를
자기의 취향에 맞추어 자유롭게 고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황후가 매일 밤 황제와 동침(同寢)해야 했다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황후는 닷새 걸러 하루를 쉬게 되는데, 쉬는 날은 다른 비빈(妃嬪)들이
근무(=동침(同寢))를 하였다.

때문에, 아홉 비빈들은 45일이 지나야 비로소 한번의 기회가 오게 되었으며,
세부(世婦) 이하의 여인들은 반드시 아홉 비빈들을 따라 함께 황제의 시중을 들어야 했고,
단독으로 황제를 대면할 수는 없었다.

주나라 때의 각 제후(諸侯)들도, 닷새 만에 한번 기회가 주어지는 이러한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였다. 제후들에게는 모두 9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정실부인
한 사람을 제외한 8명의 측실(側室)들은 갑을병정(甲乙丙丁)의 4개 조로 나뉘어
매일 밤 정실 부인을 따라서 근무하거나, 다른 두명의 측실을 따라 근무하였다.

통상, 50세 이하의 측실이라야 군주와 동침(同寢)할 권리를 가질 수 있었는데,
이는 이러한 여성이 아직 회임(懷妊)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측실로서 50이 넘으면 다시는 군주와 동침할 수 없었는데,
이 역시 회임의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제한은 측실들에게만 적용되었으며, 정실부인은 50이 넘어도 남편인 군주와
동침할 수 있었다. 정실부인은 70이 넘어 성적 능력을 상실할지라도 여전히 남편과
밤을 보낼 수가 있었다.

대부(大夫)의 경우, 처첩의 수는 제후의 3분의1로서 1처2첩이었으며, 3일을 주기로 했다.
일반 사족(士族)들은 1처1첩만이 허용되었는데, 처와 첩의 자격에는 차이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처는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남편과 동침할 수 있었지만,
첩은 반드시 주군(主君)이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잠이 들면 방을 떠나야 했다.

이렇듯, 주군(主君)을 모시는 순서에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병이 나는 것은 피할 수 없으며, 생리(生理)를 맞을 수도 있으며,
황제와의 하룻밤을 기다리는 비빈(妃嬪)들의 숫자가 사실 엄청나게 많았던 게 현실이었다.
때문에, 이러한 복잡한 점을 고려하여 황제의 동침 스케줄을 안배하는
「여사(女史)」라는 관직도 생겨났다.

먼저, 여사(女史)는 비빈들에게 금(金) 은(銀) 동(銅) 등의 각기 다른 재질로 만든
반지를 끼게 함으로써 주군을 모실 순서를 구별하였으며, 비빈들의 일상 행동을
관찰*기록하여 순서 결정의 참고 자료로 활용하였다.

이밖에, 생리 중인 여성은 반드시 양볼에 붉은 색을 칠하여 자신의 신체 상태를
표시하여야만 하였다고 한다.

 

     


    ♣ 중년 및 초로의 남자가 바람 피우고 싶는이유? ♣


    당신 나한테 애인이 생기면 어떻게 할래?”
    0.05초만에 용수철같이 튀어나오는 아내의 대답.
    “배 나오고, 나이 들고,
    돈 없는 당신 같은 남자를 누가 좋아하기나 한대요?”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날카로운 말의 비수는 그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고,
    어느날 그 배 나오고 돈 없고 나이든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

    이를 알게 된 아내는 미칠 듯이 괴로워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후다.
    결혼 후 나이들음에 여자는 점점 강하고 당당해지는데
    남자들의 목소리는 작아진다.

    멀쩡하게 일을 잘하던 남자들도
    도대체 내가 이 일을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서 회의를 갖기도 한다.

    여자는 그 반대다.

    결혼 초에는 남편이 몇 시에 들어오는지,
    요즘 사랑한다는 말을 몇번 했는지,
    나를 몇번 만져줬는지에 관심을 집중하고 살다가
    나이가 들면서는 점점 자기주장이 강해진다.

    좋게 말하면 독립적이고 뒤집어보면 공격적이다.
    그래서 이때 남자들은 전보다 강해진 아내에게
    약한 남자로 비춰지면서 비난을 당하기 쉽다.

    고단한 세상살이에 지친 남자들은

    자신에게 공감적이고 인정해 주는
    따뜻한 아내를 기대하고 집으로 들어가지만
    남자가 남자다움의 굴레를 벗고 싶은 그 시기에
    여자도 여자다움의 굴레를 벗으려 한다.

    한 남자가 자주 가는 술집 아가씨에게 2장짜리

    팬티세트를 선물했다.
    손님을 모시고 가면 늘 잘해준 것이 고마워서였다.
    술집 아가씨는 선물을 받고는
    “어머, 사장님(또는 ㅇㅇ님) 고마워요.
    이거 너무 예뻐요” 라면서 연신 감탄을 한다.

    순간 그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속옷가게에 가서 더 화려하고 비싼 무지개 빛깔 팬티를
    무려 7장이나 사서 호기롭게 아내에게 내밀었다.
    “아니, 내가 이런 걸 어떻게 입는다고 사와요.

    얼마 주고 샀어요?
    어디서 샀어요? 가서 바꿔오세요.”

    아내에게 무지개 팬티를 입혀보고 싶었던
    그의 마음은 구겨진 휴지뭉치 같이 되었다.
    밖에서 만나는 여자들은 작은 일에도

    고마워하고 감탄할 줄 안다.

    그래서 그런 여자와 같이 있을 때 남자는

     ‘나도 진짜 멋있는 남자일지도 몰라’ 하는 자신감이 생긴다.
    그러한 인정이나 칭찬의 파급효과로 인해
    실제로 더 능력있고 멋진 남자가 된다는 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피그말리온 효과’의 원리다.

    남자들이 외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성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사내들이 신선하고 자극적인 젊은

    여자에게 눈 돌리는
    한눈팔기 같은 것일까.

    천만의 말씀. 만만에 콩떡이다
    대부분의 남자가 외도에서 찾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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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란 우리말의 의미는 "얼"은 영혼이라는 뜻이고 

 "굴" 은 통로라는 뜻이 있읍니다

 멍한 사람을 보면 얼빠졌다라고 합니다
 죽은 사람의 얼굴과 산 사람의 얼굴은 다릅니다.

 기분 좋은 사람의 얼굴과 아주 기분나쁜 사람의 얼굴이 다릅니다
 
 
얼굴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니 사람의 얼굴은 마치 영혼이 나왔다 들어왔다 하는 것처럼 바뀝니다 

그러기에 변화무쌍한 것이 얼굴입니다.
 
첫인상이 결정되는 시간은 6초 정도라고 합니다.
 첫인상을 결정하는 요소는 외모, 표정, 제스처가 80%를 차지하고 

목소리의 톤, 말하는 방법이 13% , 그리고 나머지 7%가 인격이라고 합니다
 
 
"표정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 고 합니다.

 표정과 감정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사람의 얼굴 근육은 80개로 되어 있는데

그 80개의 근육으로 7000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신체의 근육 가운데 가장 많이 가지고 있고

가장 오묘한 것이 바로 우리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인상 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이처럼 시시때때로 변화되어지는 것...우리의 모습 이겠지요!

 또한 변화 될수 없는것도 우리들의 모습이겠지요.
 
얼굴이란 우리말의 의미는??

 사랑이 잘 통하는 얼굴, 영혼이 잘 통하는 얼굴,

 생명이 잘 통하는 얼굴, 기쁨이 잘 통하는 얼굴,
 감사가 잘 통하는 얼굴, 희망이 잘 통하는 얼굴,

이런 얼굴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루에 한두번이라도 거울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시고

표정 관리를 해 보시는건 어떨까 싶네요.

 늘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셨으면 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되세요!
 

 
 
누구의 발인지 짐작이나 하시겠습니까...
희귀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발이 아닙니다.
사람의 발을 닮은 나무뿌리도 아니고 사람들 놀래켜 주자고 조작한 엽기사진 따위도 아닙니다.
예수의 고행을 좇아나선 순례자의 발도 이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명실공히 세계 발레계의 탑이라는 데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을,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입니다.
그 세련되고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세계 각국의 내로라 하는 발레리노들이 그녀의 파트너가 되기를 열망하는, 강수진 말입니다.
처음 이 사진을 보았을 때 심장이 어찌나 격렬히 뛰는지 한동안 두 손으로 심장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답니다.
하마터면 또 눈물을 툭툭 떨굴 뻔 하였지요. 감동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예수가 어느 창녀의 발에 입 맞추었듯, 저도 그녀의 발등에 입맞추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마치 신을 마주 한 듯, 경이로운 감격에 휩싸였던 것이지요.
그녀의 발은, 그녀의 성공이 결코 하루 아침에 이뤄진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루 열아홉 시간씩, 1년에 천여 켤레의 토슈즈가 닳아 떨어지도록, 말짱하던 발이 저 지경이 되도록...
그야말로 노력한 만큼 얻어낸 마땅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녀의 발을 한참 들여다 보고.. 저를 들여다 봅니다.
너는 무엇을.. 대체 얼마나... 했느냐...
그녀의 발이 저를 나무랍니다. 인정합니다.. 엄살만 심했습니다.. 욕심만 많았습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 고은님 작가의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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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사용되기 쉬운 成語들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성어(成語) 중 잘못 전해지고 사용되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성어들은 본래의 뜻을 잃어버리고 마치 하나의 단어로 고착화되기도 합니다. 
  문자를 올바르게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잘못 사용하기 쉬운 성어들입니다.
  
   * 풍지박산, 풍지박살 → 풍비박산(風飛雹散)
  
   풍(風), 날 비(飛), 우박 박(雹), 흩어질 산(散)
   풍비박산(風飛雹散)의 자의(字義)는 바람이 흩날리고, 우박이 흩어지는 형상을 의미합니다. 
   곧 사방으로 날아 흩어진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인 활용의 의미로는 '사물이나 일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흩어지고 망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언어생활 속에서 발음의 순화로 인해 혹 "풍지박산(이 때의'지'는 한글)"이라고 사용되기도 하지만 
   본래의 성어 의미대로 '풍비박산'이라고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풍지박살"은 '박살(撲殺:때려죽이다)'의 의미를 확대하여 '박산(雹散)'의 발음과 의미로 오용(誤用)
   한 것입니다.
    (예) 암행어사 출두로 변사또 생일잔치 자리는 풍비박산되었다.
  
   * 홀홀단신 → 혈혈단신(孑孑單身)
  
   외로울 혈(孑), 홑 단(單), 몸 신(身)
  혈혈단신(孑孑單身)은 '외롭고 외로운 홀 몸'이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의미는 의지할 곳이 없는 외로운 홀몸으로 혹 고아(孤兒)의 의미로도 쓰입니다.
  "홀홀단신"으로 잘못 사용되는 것은 '홀홀'이 물건을 날리는 모양을 의미하는데, 단순하게 '가볍고 혼자'라는 
  의미로 오용(誤用)되어 '홀홀'처럼 사용된 것입니다.
  (예) 한국전쟁 당시에 혈혈단신으로 월남을 했다.
  
  * 참고 혈(孑)과 유사한 한자
    了(료)마치다. 孑(혈)외롭다. 子(자)아들. 予(여)나. 矛(모)창.
     (예) 終了(종료). 孑孑單身(혈혈단신). 父子(부자).
          予與汝(여여여;나와너). 矛盾(모순)
  
   * 야밤도주 → 야반도주(夜半逃走)
  
   '夜半(야반)의 의미는 '밤의 반'이라는 한밤중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결국 야반도주는 한밤중에 도주(도망)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밤이라는 뜻의 '夜(야)'자를 혼용해서 '야밤'으로 표현되는 말을 야반도주로 오용(誤用)한 것입니다.
  (예) 악덕 사업주가 고의로 부도를 내고 야반도주를 했다.
  
    * 성대묘사 → 성대모사(聲帶模寫)
  
   모사(模寫)와 묘사(描寫)로 잘못 사용되고 있는 성어입니다.
   모사(模寫)는 '본따서 그대로 베끼는 것'이고 묘사(描寫)는 '객관적으로 그대로 그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방(模倣), 모조(模造), 모형(模型) 등에서 '본뜬다'는 의미로 쓰인 '模(모)'를 사용한 
   '성대모사(聲帶模寫)'가 "타인의 목소리나 어떤 소리를 흉내 내는 일"의 올바른 표현입니다.
   '성대묘사(聲帶描寫)'를 성어로 사용했다면 회화나 문학에서 소리 내는 기관(목청)을 그리거나 표현한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 ○○○개그맨은 특히 정치인들의 성대모사(聲帶模寫)가 장기이다.
   
  * 산수갑산(山水甲山) → 삼수갑산(三水甲山)
  
  "흔히'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일을 꼭 해야겠다'고할 때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일을 꼭 해야겠다'고 
  말할 때가 많다. 
  그런데 '삼수갑산(三水甲山)'을'산수갑산(山水甲山)'으로 잘못 알고 쓰는 경우가 꽤 많다.
  아마도'삼수갑산'을 경치가 좋은 곳으로 잘못알아 듣고 '산수갑산'일 거라고 생각하고 쓰는 것 같다. 
  그러나 '삼수갑산'의'삼수'는 한자의 '석삼(三)'자와 '물 수(水)'로 이루어진 말이다. 
  원래 '삼수갑산'이라는 말은 '삼수'와 '갑산'이라는 고장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모두 함경남도에 있는 오지로 매우 춥고 또 교통도 불편한 지역이었다. 
  옛날부터 중죄인들을 이곳으로 귀양 보냈기 때문에, 이곳은 한 번 가면 살아 돌아오기가 힘든 곳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자기 일신상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각오하고 어떤 일에 임하려고 할 때'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라는 표현을 쓰게된 것이다. 
  따라서 어떤 힘든 일을 각오하는 마당에 경치가 좋은 산수갑산에 간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다. 
  '삼수갑산'의 '삼'은 '뫼산(山)'자가 아닌 '석 삼(三)'자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산수갑산'이라는 
  잘못된 표현은 쓰지 않아야겠다.
  자료참조 :이야기 한자여행,KBS 아나운서실 사이트
  단순한 몇 가지 예를 살펴보았습니다.
  성어(成語)가 잘못 사용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한자(漢字)는 각각의 글자가 의미를 가지고 있는 표의(表意)의 
  특성을 지니고 있고, 그로 인해 왕성한 조어력(造語力)으로 만들어진 성어들을 한자 본래의 의미로 
  활용하지 않고 언어생활 속에 그대로 내던져 버린 결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제는 하나의 언어적 습관에 의해서 사용하는 한자가 아닌 문자(文字)로서의 의미를 지닌 한자성어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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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연령의미
지학(志學) 15세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

약관(弱冠) 20세

남자 나이 스무살을 뜻함

이립(而立) 30세

모든 기초를 세우는 나이

불혹(不惑)40세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

상수(桑壽) 48세

상(桑)자를 십(十)이 네 개와 팔(八)이 하나인 글자로 파자(破字)하여 48세

지명(知命) 50세

천명(天命)을 아는 나이. 지천명(知天命)이라고도 함

이순(耳順) 60세

인생에 경륜이 쌓이고 사려와 판단이 성숙하여 남의 말을 받아드리는 나이

환갑(還甲) 61세

일(一) : 갑자(甲子)가 돌아왔다고 해서 환갑 또는 회갑이라하고 경축하여 華甲(화갑) 이라고도 한다

종심(從心)70세

뜻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나이, 고희(古稀)라고도 한다

희수(喜壽)77세

희(喜)자를 칠(七)이 세변 겹쳤다고 해석

산수(傘壽)80세

산(傘)자를 팔과 십의 파자(破字)로 해석

미수(米壽)88세

미(米)자를 팔과 십과 팔의 파자(破字)로 해석

졸수(卒壽)90세

졸(卒)자를 구와 십의 파자(破字)로 해석

망백(望百)91세

91세가 되면 100살까지 살 것을 바라본다 : 하여 망백

백수(白壽) 99세

일백 : 백자(百)에서 한일자를 빼면 흰백자(白)가 된다하여 99세로 봄

상수(上壽) 100세

사람의 수명중 최상의 수명이란 뜻. 左傳에는 120세를 상수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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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立春)  02월 04일 : 봄의 시작 
우수(雨水)  02월 18일 : 얼음이 녹고 초목이 싹트는 시기
경칩(驚蟄)  03월 05일 : 개구리가 깨어나는 시기 
춘분(春分)  03월 20일 :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짐
청명(淸明)  04월 05일 : 날씨 맑고 청명. 논농사 준비 
곡우(穀雨)  04월 20일 : 봄비가 내려 백곡이 윤택해짐
...............................................................................
여름

입하(立夏)  05월 05일 : 여름의 시작 
소만(小滿)  05월 21일 : 모내기 시작
망종(芒種)  06월 05일 : 보리 수확, 모심기 시작 
하지(夏至)  06월 21일 : 낮이 가장 긴 시기
소서(小署)  07월 07일 : 더위와 장마 시작 
대서(大暑)  07월 23일 : 더위가 가장 심한 시기
.....................................................................................
가을

입추(立秋)  08월 07일 : 가을이 시작되는 시기 
처서(處暑)  08월 23일 : 더위 가고, 일교차가 커짐
백로(白露)  09월 07일 : 이슬이 내리는 시기 
추분(秋分)  09월 23일 :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시기
한로(寒露)  10월 08일 : 찬이슬이 내림 
상강(霜降)  10월 23일 : 서리가 내리기 시작함
...........................................................................................
겨울

입동(立冬)  11월 07일 :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 
소설(小雪)  11월 22일 : 얼음이 어는 시기
대설(大雪)  12월 07일 : 눈이 많이 오는 시기 
동지(冬至)  12월 22일 : 낮이 짧고 밤이 제일 긴 시기
소한(小寒)  01월 05일 : 겨울 중 가장 추운 때 
대한(大寒)  01월 20일 : 추운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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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분 더 공부하면 남편(아내) 얼굴이 바뀐다.

 

2.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다.

 

3.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성공은 성적순이다.

 

4. 최선은 나를 절대 배반하지 않는다.

 

5. 10분 뒤와 10년 후를 동시에 생각하라.

 

6.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

 

7. 지금 흘린 침은 내일 흘릴 눈물이 된다.

 

8. 눈이 감기는가? 그럼 미래를 향한 눈도 감긴다.

 

9.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10. 남보다 더일찍 더 부지런히 노력해야 성공을 맛볼 수 있다.

 

11. 죽어라 열심히 공부해도 죽지는 않는다.

 

12. 가장 위대한 일은 남들이 자고 있을 때 이루어 진다.

 

13.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공부를 하면 꿈을 이룬다.

 

14. 포기하지 마라. 저 모퉁이만 돌면 희망이란 녀석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15. 실패는 용서해도 포기는 용서 못한다.

 

16. 개같이 공부해서 정승같이 놀자.

 

17. No pains No gains.

 

18. 꿈이 바로 앞에 있는데 ,당신은 왜 팔을 뻗지 않는가?

 

19. 공부할 때의 어려움은 잠깐이지만, 성공한 후의 즐거움은 일평생이다.

 

20. '할수 없다'고 생각 하는 것은 '하기 싫다'고 다짐하는 것과 같다.

 

21.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22.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23.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그런데 인생의 전부도 아닌 공부조차도 정복하지 못한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24. 어리석은 사람은 기적을 바라고 현명한 사람은 기적을 만든다.

 

25. 오늘 보낸 하루는 내일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26. 성적은 투자한 시간의 절대량에 비례한다.

 

27. 불가능이란 노력하지 않는 자의 변명이다.

 

28. 지금 안 하면 영원히 못한다.

 

29. 한계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30. 꿈이 없는 십대는 틀린 문장의 마침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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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어(侵漁)' –서시의 미모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은 체 물밑으로 가라앉다.

서시는 춘추말기의 월나라의 여인이다. 어느 날 그녀는 강변에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 을 비추었다. 수중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래서 서시는 침어(浸魚)라는 칭호 를 얻게 되었다. 서시는 오(吳)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範려)가 보복을 위해 그녀에게 예능을 가르쳐서 호색가인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어 마침내 월나라에 패망하였다한다..

원본 서시(西施)
 
 
'낙안(落鴈)'_왕소군의 미모에 기러기가 날개짖하는 것조차 잊은 채 땅으로 떨어졌다.
 
한(漢)나라 왕소군은 재주와 용모를 갖춘 미인이다. 한나라 원제는 북쪽의 흉노과 화친을 위해 왕소군을 선발하여 선우와 결혼을 하게 하였다. 집을 떠나가는 도중 그녀는 멀리서 날아가고 있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생각이나 금(琴)을 연주하자 한 무리의 기러기가 그 소리를 듣고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에 왕소군은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원본 왕소군(王昭君)
 
 
 
'폐월(閉月)'_초선의 미모에 달도 부끄러워 구룸속으로 숨어 버렸다.
 
초선은 삼국지의 초기에 나오는 인물로 한나라 대신 왕윤(王允) 의 양녀인데, 용모가 명월 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 어느 날 저녁에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을 때에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웠다. 왕윤이 말하기를 : "달도 내 딸에 게는 비할 수가 없구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 고 하였다. 이 때 부터 초선은 폐월(閉月)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초선은 왕윤의 뜻을 따라 간신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 시키며 동탁을 죽게 만든 후 여포의 부인이 되어 산다. 여포와 살면서 초선은 나약한 아녀자로 변해버리고, 그래서 진궁의 계책도 반대했다가 결국에 여포는 패망하고 만다.
 
 
 
원본 초선(貂婵) 

 
 
 
 
'수화(羞花)'_양귀비의 미모에 꽃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당대(唐代)의 미녀 양옥환(楊玉環)은 당명황(唐明皇)에게 간택되어져 입궁한 후로 하루 종일 우울했다. 어느 날 그녀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중에 함수화(含羞花)를 건드렸다. 함수화는 바로 잎을 말아 올렸다. 당명황이 그녀의 '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 에 찬탄하고는 그녀를 '절대가인(絶對佳人)'이라고 칭했다.
 
원본: 양귀비(楊貴妃) (본명 楊玉環)
 


 
 
'연수환비(燕瘦環肥), 그녀가 바로 조비연(趙飛燕)이다. 그녀의 특징이 아름다움보다 가벼움에 치우쳤기 때문인 듯,
 
그녀를 지칭할 때는 항상 양귀비와 더불어 거론된다. 바로 '연수환비(燕瘦環肥)'라는 성어인데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조비연(趙飛燕)은 말랐으나[瘦] 미인이었고, 양귀비[본명: 양옥환(楊玉環)]는 뚱뚱했으나[肥] 미인이였다. 또한 흔히 일컬어 조비연(趙飛燕)은 날씬한 미인의 대명사로 임풍양류(臨風楊柳)형 미인, 양귀비(楊貴妃)는 풍만한 미인의 대명사로 부귀모란(富貴牡丹)형 미인.이라 한다.
 
원본 조 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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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경매된 그림중 최고가.10위 그림  

1위... 파이프를 든 소년(Garcon a la pipe ) / 파블로 피카소 
 
1905년작. 캔버스 유화. 99.7cm x 81.3cm
2004년 5월 5일 7:00 pm 뉴욕
소더비에서 1억416만 달러에 경매됨.
현재 세계 최고가의 기록.

2위... 의사 가셰의 초상 / 빈센트 반 고흐
 
1990년 8,250만 달러

3위
... 영아구타 / 피터 폴 루벤스
 
2002년 7,350만 유로

4위...물랭 드 갈레트의 무도회/ 삐에르 오귀스트 르느와르
 
1990년 7,810만 달러

5위... 수염없는 자화상 / 빈센트 반 고흐
 
1998년 7,150만 달러

6위... 무고자의 도살 / 피터 폴 루벤스
| 
며칠 전 런던에서 4,950만 파운드에 낙찰

7위... 가슴을 감싸안은 여인 / 파블로 피카소
 
2000년 5,560만 달러

8위... 자주붓꽃 / 빈센트 반 고흐
 
1988년 5,300만 달러

9위... 꿈 / 파블로 피카소
 
1997년 4,840만 달러

10위... 정물 / 폴 세잔느
 


1999년 6,050만 달러





          ** 누드 첼리스트 나탈리망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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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꽃 보셨나요?

▲ 좀처럼 보기 힘들다는 고구마 꽃이 강원 양양지역에서 연이어 피어 화제가 되고 있다.

고구마 농사를 짓는 농부라 할지라도 평생 한번 보기도 힘들다는 고구마 꽃 이 23일 양양읍 포월리 황달현(70.남)씨 밭에서도 만발해 이목을 끌고 있다.

연보라색을 띠고 있는 나팔꽃 모양을 하고 있는 고구마 꽃이 발견되자 주민들은 길조로 생각하고 ‘여러사람이 보면 행운을 나눌 수 있다’는 속설에 너도 나도 반기면서 꽃구경 잔치가 한창이다.

특히 이번 황씨의 200여펑 고구마 밭에서는 줄기마다 잎 겨드랑이에서 핀 수백송이의 꽃이 만발해 사람들이 놀라워 한다. /뉴시스
 

以上 출처ㅣ 조선닷컴 포토뉴스(2006.8.24)
 
촌놈생인 나?
고구마를 主食처럼 먹었어도,
어린 시절 고구마 밭에 산 기억은 나도, 
아직 고구마꽃을 본 기억이 없다.
 
너무 오래된 희미한 어린시절이라
당시 기억을 못하는 겐지,
무심히 봐 넘겼을 수도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하겠지만,
 
고구마 농사꾼도 평생 보기 힘들다 하니,
고구마꽃이 당시에 안 피었을 테지?
현재 내 기억속에는 '고구마 꽃이 있다'는 소리마저
들은 기억이 없다.

나도, 여기서, 고구마꽃은 물론이고, 고구마꽃이 있다는 소리도 처음인데,
나팔꽃이 고구마 줄기에서 피어난 것 같네
 
참 희귀하고 기이한 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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