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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곡례≫ 하편에는「천자에게는 후(后)가 있고, 부인(夫人)이 있고, 세부(世婦), 빈(嬪), 처(妻), 첩(妾)이 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천자의 정실부인을 후(后)라 하고, 부인(夫人)이하 첩(妾)까지는 모두 천자를 모시는 여인들의 등급이다. 또한 천자에게는 부인이 세 사람, 빈이 아홉 사람, 세부가 27명, 어처가 81명이며, 첩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흔히들 그것를 삼천궁녀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실로 천문학적인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중국의 역대 제왕(帝王)들은, 이토록 많고 많은 후궁(後宮) 비빈(妃嬪)들과의 무리없는 스케줄(?) 안배를 위하여 어떤 규칙을 적용하였을까? 주(周)나라 때의 사람들은 천체(天體) 음양(陰陽) 역수(曆數) 등으로 일의 순서를 결정하였으며, 심지어는 비빈과 제왕의 데이트 순서까지도 달(월/月)의 흐리고 맑은 것이나, 차고 기우는 것, 즉 음청원결(陰晴圓缺)에 의하여 결정하였다. 이른바 달의 음청원결(陰晴圓缺)이란, 달이 매월 초하루에서 보름까지 점점 차올랐다가 보름에서 그믐날까지의 15일 동안 점점 기우는 것을 말한다. 제왕과의 동상(同床)은 이러한 원칙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는데, 초하루에서 보름까지는 지위가 낮은 궁녀에서 시작하여 지위가 높은 비빈이나 정실(正室)로 안배하였으며, 보름을 기준으로 다시 지위가 높은 비빈부터 시작하여 지위가 낮은 궁녀를 배열하였다. 황후(皇后)와 세 명의 일품(一品)부인들은 절대적인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구빈(九賓)이하에 이르면 모두 아홉 명이 함께 황제를 모시고 잠을 자게 되어 있었다. 한 남자와 아홉 여자가 함께 잔다면 도대체 어떻게 자야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일단, 규정에 의한 황제의 잠자리 배정표(?)을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01일-09일 (9일동안) : 81명의 어처(御妻)들이 매일 밤 9명씩 1개조가 되어 동침(同寢) 10일-12일 (3일동안) : 27명의 세부(世婦)들이 매일 9명씩 1개조가 되어 동침(同寢) 13일 (1일동안) : 구빈(九賓)들이 돌아가며 동침(同寢). 14일 (1일동안) : 삼부인(三夫人)들이 돌아가며 동침(同寢). 15일 (1일동안) : 황후(皇后) 혼자서 동침(同寢). 16일 (1일동안) : 황후(皇后) 혼자서 동침(同寢). 17일 (1일동안) : 삼부인(三夫人)들이 돌아가며 동침(同寢). 18일 (1일동안) : 구빈(九賓)들이 돌아가며 동침(同寢). 19일-21일 (3일동안) : 27명의 세부(世婦)들이 매일 9명씩 1개조가 되어 동침(同寢). 22일-30일 (9일동안) : 81명의 어처(御妻)들이 매일 밤 9명씩 1개조가 동침(同寢). 한달 동안, 황후, 삼부인(三夫人), 구빈들은 이틀 밤을 황제와 함께 보낼 수 있고, 세부(世婦)들은 여섯 밤을, 어처(御妻)들은 열여덟 밤을 보낼 수 있다. 이러한 분배방식은 비빈들의 간의 갈등을 줄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황제가 특정된 아홉 여성에게만 관심을 갖게된다면 나머지 비빈들은 할 일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은, 비빈들의 입장에서 보면 유리하지만,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좋을 게 없다. 동침할 상대를 강제적으로 규정한 것은 아무래도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를 자기의 취향에 맞추어 자유롭게 고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황후가 매일 밤 황제와 동침(同寢)해야 했다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황후는 닷새 걸러 하루를 쉬게 되는데, 쉬는 날은 다른 비빈(妃嬪)들이 근무(=동침(同寢))를 하였다. 때문에, 아홉 비빈들은 45일이 지나야 비로소 한번의 기회가 오게 되었으며, 세부(世婦) 이하의 여인들은 반드시 아홉 비빈들을 따라 함께 황제의 시중을 들어야 했고, 단독으로 황제를 대면할 수는 없었다. 주나라 때의 각 제후(諸侯)들도, 닷새 만에 한번 기회가 주어지는 이러한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였다. 제후들에게는 모두 9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정실부인 한 사람을 제외한 8명의 측실(側室)들은 갑을병정(甲乙丙丁)의 4개 조로 나뉘어 매일 밤 정실 부인을 따라서 근무하거나, 다른 두명의 측실을 따라 근무하였다. 통상, 50세 이하의 측실이라야 군주와 동침(同寢)할 권리를 가질 수 있었는데, 이는 이러한 여성이 아직 회임(懷妊)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측실로서 50이 넘으면 다시는 군주와 동침할 수 없었는데, 이 역시 회임의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제한은 측실들에게만 적용되었으며, 정실부인은 50이 넘어도 남편인 군주와 동침할 수 있었다. 정실부인은 70이 넘어 성적 능력을 상실할지라도 여전히 남편과 밤을 보낼 수가 있었다. 대부(大夫)의 경우, 처첩의 수는 제후의 3분의1로서 1처2첩이었으며, 3일을 주기로 했다. 일반 사족(士族)들은 1처1첩만이 허용되었는데, 처와 첩의 자격에는 차이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처는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남편과 동침할 수 있었지만, 첩은 반드시 주군(主君)이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잠이 들면 방을 떠나야 했다. 이렇듯, 주군(主君)을 모시는 순서에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병이 나는 것은 피할 수 없으며, 생리(生理)를 맞을 수도 있으며, 황제와의 하룻밤을 기다리는 비빈(妃嬪)들의 숫자가 사실 엄청나게 많았던 게 현실이었다. 때문에, 이러한 복잡한 점을 고려하여 황제의 동침 스케줄을 안배하는 「여사(女史)」라는 관직도 생겨났다. 먼저, 여사(女史)는 비빈들에게 금(金) 은(銀) 동(銅) 등의 각기 다른 재질로 만든 반지를 끼게 함으로써 주군을 모실 순서를 구별하였으며, 비빈들의 일상 행동을 관찰*기록하여 순서 결정의 참고 자료로 활용하였다. 이밖에, 생리 중인 여성은 반드시 양볼에 붉은 색을 칠하여 자신의 신체 상태를 표시하여야만 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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