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사 연구를 업으로 하는 서생이었던 내가 문화재청장을 맡을 때는 당연히 개인적인 욕심도 조금은 있게 마련이었다. 내게 그 욕심이란 문화재청이나 국립박물관에서 유물들을 움켜쥐고 ‘출입금지’ ‘들어가지 마시오’ 등 빨간 글씨의 경고문으로 일반인은 물론이고 학자들에게도 좀처럼 공개하지 않고 있는 유물들을 내 맘껏 조사하고 싶은 바람이었다.
더욱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피력했던 “모든 건축물, 특히 목조건축물은 사람이 살아야 제대로 보존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출입금지를 문화재 보존의 능사로 삼고 있는 문화재 행정을 혁신해 보겠다는 뜻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문화재청장이 되면 우선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써 있는 문화재들이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 보겠다, 그리고 미술사학도로서 유물을 면밀히 조사하는 특권도 누려 보겠다는 두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2004년 9월 3일 부임하자마자 이른바 초도순시를 하면서 경복궁을 찾아갔을 때 나는 아무 예고 없이 출입금지를 몇 개씩 달아놓은 경회루를 올라가 보자고 했다. 경복궁 관리소장은 매우 당황해 하면서 “먼지가 많을 텐데요”라며 나중에 올라갈 것을 권했다.
문화재 보존, 출입금지가 능사 아니다
나는 괜찮다며 쇠줄을 넘어 경회루 안쪽으로 들어갔다. 경회루에 오르는 순간 나는 피어오르는 먼지에 얼른 손으로 코를 막지 않을 수 없었다. 먼지의 두께는 최소 10cm는 되는 것 같았다. 이것이 출입금지를 능사로 삼은 보존책의 실태였다.
미술사학도로서 생전 처음 대한 경회루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누대의 넓이가 280평이나 되다니, 그 스케일에서 오는 장대함은 가히 감동적이었다. 더욱이 누대가 3단으로 구성되어 미닫이문, 여닫이문 그리고 분합문들이 갖가지로 연출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 공간감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경회루만의 자랑이었다. 이 엄청난 공간을 40년간 묵혀 놓았다니!
그날 이후 경복궁 직원들은 일주일을 두고 먼지를 쓸고 닦았다. 먼지를 제거하고 보니 경회루 마루의 나무판들이 모두 말라비틀어진 죽음의 잿빛이었다. 더더군다나 군사독재 시절에 대통령의 연회를 연다고 마루에 카펫을 깔아 그 밑으로 좀이 슨 자국들이 처참하게 남아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목조건축이 어떻게 병들고 죽어가는지를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나는 우선 궁궐지킴이, 궁궐길라잡이, 아름지기 등 문화재 자원봉사자들과 경회루 대청소와 마루바닥 길들이기를 공개행사로 벌였다. 자원봉사자들은 모두들 이 아름답고 황홀한 공간에 감탄하며 정성껏 물걸레, 마른 걸레로 닦았다. 나이 든 분들은 모두 초등학교 시절 교실 복도 마루 길들이기를 연상하며 즐거워했다. 그렇게 한 달간 갈고 닦은 결과 경회루 마루는 죽은 잿빛에서 짙은 갈색의 나무빛깔을 띠기 시작했다.
사람들 드나들자 생기 되찾은 경회루
나는 경회루를 국민들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경회루의 잃어버린 담장을 복원한 다음, 2005년 4월부터 일반에게 개방하였다.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경회루 건물은 출입금지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기를 얻게 되었다. 모든 건물은 사람이 살고 있을 때 제대로 보존된다는 대원칙, 특히 목조건축은 사람의 손길과 살내음이 배어야 생기를 얻는다는 교훈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옛 정자 중에서 진주의 촉석루가 가장 잘 보존되고 있는 이유는 그 곳에서 항상 수십 명의 진주 시민과 답사객들이 쉬어가기 때문이다. 수많은 옛 가옥 중 종손과 종갓집 며느리가 지키고 있는 종택만은 고스란히 보존된 반면 빈집으로 남은 고가들은 해마다 보수 정비를 해도 을씨년스럽게 여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후 문화재청에서는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을 관람객들에게 개방했고, 창덕궁의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권역을 잇달아 개방했다. 도배장판을 해놓고 사람이 살지 않아 한 해 여름만 지나면 곰팡이가 피고, 한 해 겨울만 지나면 장판이 들고 일어서던 피해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런데도 일반인들은 아직도 ‘출입금지’가 만능의 보존책인 줄로 알고 문화재청은 옛 건물을 보존할 생각은 안하고 활용만 강조한다고 비판할 때면 정말로 속이 답답하다.
얼마 전 창덕궁의 내병조 구역의 건물에 사무실과 당직실 그리고 관리소장의 관사가 있는 것을 한 방송국에서 무슨 큰 문화재 파괴를 한 것인양 보도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좋게 말해서 견해 차이였고, 어떤 면에서는 일방적인 보도였다.
그것은 목조건축의 이런 생리를 모르고 보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실 자체가 왜곡되어 있었다. 창덕궁에 사무실과 당직실, 관사가 들어 있는 내병조 건물은 새로 지은 지 10년 밖에 안 되는 건물이다. 이 건물들은 창덕궁 인정전 주변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그런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장기적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사람(직원)들이 드나들고 숙직하며 살내음을 심어 넣기 위한 것이었다.
고궁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재예방이다. 그래서 숙직자를 반드시 두고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관리소장이 창덕궁의 관사에서 산다는 것은 책임 있는 숙직자가 상근한다는 셈이다.
그런데 방송은 마치 몇 백년 된 건물에 살림집을 차린양 보도했다. 이후 문화재위원들이 와서 조사하고는 별 문제 없다는 의견을 내놓으면서 다만 “언론에서 또 뭐라고 할지 모르니 관사로 사용하는 것은 중지하자”고들 했다. 나는 마지못해 내 뜻을 접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도 승복한 것은 아니었다.
누가 뭐라 하든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문화재청은 지금이나 앞으로나 “모든 건축물은 사람이 살고 있을 때 제대로 보존된다”는 대원칙에서 우리의 옛 목조문화재들을 소중히 보존해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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