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미학 - 건축
오늘 첫 시간 강의 내용은 ‘산사의 미학’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여러분들에게 우리나라 고건축 특히 사찰건축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강의를 준비를 했습니다. 산사라고 했을 적에 ‘산사가 산이 있는 곳에 절이 있으면 산사고 그것이 일본의 경우에는 안 그런가. 중국의 경우는 안 그런가’ 뭐 이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지만 산사의 전통을 갖게 되는 것은 정확하게 얘기해서 9세기를 넘어간 다음의 일입니다. 황룡사는 시내, 다운타운에 있었던 절의 구조였기 때문에 주변에 회랑을 두르고 높은 탑을 중심으로 건축이 조형이 됐던 겁니다.
이것이 산으로 들어가면서부터 9세기에 하대 신라에 들어와서 구산서문이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산사가 전개됩니다. 그것보다 먼저 전개되는 것이 의상대사의 화엄시찰이라고 하는 그러니까 경주를 중심으로 해서 봤을 적에 화엄사나 부석사처럼 국경선 가까운 곳 쪽으로 큰 사찰을 지어서 국방의 목적으로 해서 대찰들을 지었던 것이 산사로 시작을 합니다마는 사실은 9세기에 하대 신라에 호족들이 발언을 해서 만들어 놓은 절들이 장흥 보림사의 대적광전 앞에 있는 9세기의 쌍탑 사찰인데 이와 같은 모습은 사실 해주에 있는 심원사처럼 산속에 그윽하게 들어가 있는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산사의 개념으로 바뀌게 됩니다.
한국 산사는 깊은 산 속, 중·일은 산 꼭대기에
중국이나 일본에도 산에 절이 있습니다마는 그 산사의 의미가 우리하고는 상당히 다릅니다. 우선 산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산사의 형태가 다르고, 선암사나 이런 절에서 보이는 것처럼 높은 산이 아니고 깊은 산 중에 들어가 있는 것이 우리 산사가 갖고 있는 특징이라고 얘기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에 있는 산사는 정말로 삼각형으로 서 있는 산 위에 꼭대기에 가서 있는 것인데 우리는 첩첩이 겹쳐져 있는 계곡을 따라 들어가서 아늑하게 자리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산사의 개념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절이 들어앉을 적에 이와 같이 중앙에 정원을 놓고 ㅁ자로 집을 배치하고 그 다음에 이에 따라서 그 전각들을 증축을 하고 절의 사세에 따라 가지고 전각들을 짓게 되는데 거기에는 일정한 룰이 있었습니다.
사천왕이 지키고 있는 천왕문을 들어가면 김봉렬 교수가 말하는 ‘산지 중정형, 산지에 있는 가운데 정원이 있는 형태다’하는 게 가운데 탑을 중심으로 해서 대웅전 앞에 만세루라고 하는 2층 누각이 있습니다. 이것은 야외 법당인데 때로는 거기에다가 불교 사물을 걸어놓고 북과 목어하고 운판을 걸어 놓은 경우가 있습니다마는 기본적으로는 만세루가 야외 법당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검당과 적묵당이 배치되는데 적묵당은 선방이고 심검당은 부엌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절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고 있습니다마는 기본적으로는 대웅전, 적묵당, 만세루, 심검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절의 기본입니다.
그러니까 사찰을 만들 적에 가장 기본적인 것은 대웅전 하나만 있으면 되고 대웅전과 심검당 요사체만 있으면 되고 또 선방이 있고 야외 법당이 있고 그 다음에 목적에 따라서 나한을 모시고 있는 응진전이 참선하는 기도처가 되고 그 다음에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셔 놓은 곳에서 극락세계에 가게 해 달라고 빌 적에 명부전으로 가고 또 관음전은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애로사항이 있으면 저분한테로 가서 빌고 그 다음에 조선 중기 이후에는 산신각을 뒤에 지어서 산신님, 칠성님 모시던 분들도 다 절로 흡합을 해서 불교가 끌어 앉게 되면서 사찰의 구조가 산의 산비탈을 이용하면서 자기 조형 사이트에 맞게 건물들을 배치를 해 놓아 가게 됩니다. 처음부터 마스터플랜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에 증축 사정에 따라서 지었는데 사실 이 현대 건축가들이 가서 봤을 적에는 가람배치가 아주 주변 환경과 잘 맞아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 많은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도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마는 청령에 있는 관룡사 같은 절에 가서 보면 계속해서 증축을 해 놓았던 그 집들의 모습이 레벨까지 계산을 하고 사이즈까지 해서 보면 현대 건축가들이 누가 디자인을 했는가 하는 그런 찬사를 보내는 곳이 상당히 많습니다.
큰 마당 만들며 주변 환경과 부조화
이런 좋은 전통을 갖고 있던 것이 20세기 그것도 20세기 후반 정확히 80년대 들어와서 다 망가져 버리기 시작합니다. 크고 호화로운 것을 좋아했던 그러한 풍조가 산사에 들어 와서 아늑한 공간으로 해서 아기자기하게 해 놓았던 것들을 전부 앞에다 큰 앞마당 심하게 얘기하면 군대 연병장처럼 엄청나게 큰 마당을 만들어 놓는 풍조가 들어오면서 우리 옛 사찰이 갖고 있었던 고즈넉한 맛을 다 죽이기 시작합니다.
진작에 문화재청에서 지정을 할 적에 부석사 무량수전을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석사 전체를 사적으로 지정을 하고 무량수전은 또 국보로 지정하는 방식으로 해서 이 사이트를 변경시키지 못하게 했으면 지금 우리가 많은 것을 구제할 수 있었을 텐데 또 중요한 사찰은 그렇게 해서 지금 보호를 했습니다마는 지정되지 않은 건물만... 지정된 곳도 무위사나 이런 곳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주변 건물과 주변 환경이 맞지 않은 것으로 변해진 것이 최근 20~30년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옛날 비탈이 있다는 전제 하에 건물을 배치해서 자연 속에 건물이 들어가 같이 조화하던 것을 비탈의 조건을 되도록이면 평지에 가깝게 만들어 놓고 집을 지어놓으니까 주변 사이트와 입지 조건하고 건물하고 괴리감이 생기는 그러한 일들이 생겼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영암 월출산 지나서 강진에 있는 무위사라고 하는 절이 이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주변에 동백나무라든지 느티나무로 짜여져 있는 것이 아주 단아한 맞배지붕 집으로 되어 있는 것이 지금은 양 옆을 다 터서 완전히 다 띄어 놓으니까 앞마당은 넓어졌지만 집은 덩그러니 허전하게 존재하고 있는 그런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집은 워낙 건물 자체가 오래 되어서가 아니고 건물 자체가 이 측면관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단아한 느낌을 주는 건물로서 가장 대표적인 건물의 위용이 있기 때문에 주변이 아무리 망가졌어도 무위사라고 하는 말 값을 하는데 여기 이 기울기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면 약간의 곡선이 보이고 있는데 이 측면관으로서 아름다운 것은 이것보다 예산에 있는 수덕사 대응전의 기울기가 고려시대 이 집이 훨씬 더 크기도 크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 앞에 있는 수덕사가 워낙에 제 책의 표현에 의하면 소림사 무대를 방불케 되어 있어서 그 쪽의 사진을 제가 쓰지를 않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이 기울기를 이렇게 지을 적에 보면 이따가 부석사의 무량수전의 경우에는 학이 날갯짓하고 올라갈 때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수덕사 대응전의 경우에는 학이 날갯짓하고 내려앉을 때에 그 날개의 모습이라는 표현을 써서 그래서 이것이 곡선이면서도 직선에 가까운 긴장감을 주게 됩니다.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제하면서 아래쪽으로 내려앉는 그러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수덕사 하고 무위사의 면 분할을 보면 디자인적인 면 분할 뿐 아니라 둥근 기둥과 각진 기둥이 서로 교차를 해가면서 3D로 입면체로 해서 두드러지고 벽에 붙고 하는 리듬감까지 같이 어울리고 있기 때문에 건축 부재를 그대로 다 드러내 주면서 그로 인해서 건물이 갖고 있는 견고함도 노출시켜 주면서 우리 고건축이 목조건축이 갖고 있는 서까래와 대들보 부위를 전부 노출해 주기 때문에 일본에 있는 사찰 건물은 밖에서 보면 크지만 안에 들어가면 천장이 낮게 깔려 있어서 집이 굉장히 작아 보입니다.
안에 들어가 보면 높은 천장이 "시원"
그런데 우리 건축은 밖에서 보면 작은 것 같아도 신을 벗고 안에 들어갔을 적에는 천장으로 뚫려 있는 공간감이 워낙에 크게 감싸기 때문에 우리는 더 큰 공간감과 함께 건축 부재가 갖고 있는 싱싱한 노출이 천연스러움이 우리 건축미의 자연미와 함께 중요한 특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이중 서까래를 엮을 적에도 둥근 것이 속에 있으면 바깥에는 각이 진 것으로 내고 또 반대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서까래를 낼 적에도 강약의 리듬 둥근 것과 또 각진 것의 리듬을 전부 보인 듯 보이지 않는 듯 활용을 해주는 것이 건축 낱낱부재에서도 특징입니다.
내소사에 들어가는 주차장에서 딱 보면 내소사 입구에 일주문이 보여 주고 안은 바로 보여 주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절이나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절들이 속이 깊기 때문에 처음에 보여 줄 적에는 그냥 와서 이 앞에서 딱 들어서게 되면 전나무 숲길로 1Km를 가고 그리고 가을에 가면 중간에 단풍나무들이 포진해 있고 저것이 끝나고 나면 벚꽃 나무 길을 지나서고 그 다음에 천왕문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자리에 부여의 군수님도 와 계신데 부여의 무량사에 딱 갔을 적에 매표소에서 표 사서 들고 일주문 딱 들어갔을 적에 이 꺾어서 들어가는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그때 기분이 산사로 진입 할 적에 우리에게 주는 감동과 편안함 사실 거기부터가 건축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서 들어가는 이 길에서부터 건축적인 컨셉을 가지고 조형화 한 것을 이것을 무시해 버리고 자동차로 해서 획 들어가 버리고 난 다음에 그것은 건축으로 이용을 하고 사용을 했다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거지요. 제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절에 갔을 적에는 여기에서부터 걸어가는 것으로 시작을 해야지 속세와 성역이 갖고 있는 시간적 공간적 거리감을 가지고 나갈 적에나 들어올 적에나 그것을 느끼는 데에서 우리는 사찰 건축이 가지고 있는 묘미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내소사의 경우에는 요즘에 현대 시설을 또 이용을 해야 되는 것이 추세니까 이 길은 그대로 놓고 이 옆으로 해서 자동차 길을 따로 해서 놨기 때문에 내소사 진입로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들어와도 바로 대웅전을 바로 보여주는 일은 없습니다. 돌계단을 지나서 봉래루라고 되어 있는 만세루 밑 계단으로 들어가면 이쪽에 심검당이 있고 저쪽에 적묵당이 있고 그리고 옆으로 이렇게 들어가면 대웅보전이 보이면서 이와 같이 앞마당에서 활짝 날개를 핀 팔자 지붕으로 만나는 게 뒤에 있는 능가산 그 중봉에 그 기세에 지지 않을 기세로 활짝 해서 뻗어 올리게 됩니다. 그것도 축대를 높이 쌓아 가지고서 번쩍 올려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에 만약에 이와 같은 산세 속에 무위사의 극락보존 같이 단아한 집을 놓았으면 집이 산세에 눌려서 아마 기운을 쓰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나라 사찰이 갖고 있는 것은 대개 한 네 가지 유형이 있는 중에 화엄사의 경우에는 각황전이 보여주는 것처럼 궁궐에 준할 수 있는 위엄을 갖추어 놓은 사찰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화엄사를 보면 마치 부처님을 왕과 같은 위상 속에서 궁궐에 모시는 것 같은 기분으로 모신 것입니다.
무위사 같은 절은 아주 고즈넉한 산사 속에서 선방과 함께 깊은 산속에 들어 가 있는 형상이 되고 그리고 부석사 같은 경우처럼 일망무제로 파노라마로 전개되어 있는 뷰를 전제로 해서 호방한 기상을 보여주는 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선암사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것이 마치 안동 민속마을이나 하회마을 같은 그 마을을 형성함과 같은 분위기를 해 준 것이 있습니다. 아마 이 네 가지 중에 한 가지가 우리나라 산사가 들어가 앉는 그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화엄사 각황전 오르는 첫 계단 왜 가파른지
화엄사에 가서 보면 아래쪽에 이쪽에 각황전이 있고 지금 이쪽에 대웅전이 있는데 이 5층탑이 있는 이 아래가 계단이 보이잖아요. 계단이 이렇게 낮습니다. 이 아래쪽에서 계단으로 올라와야 위쪽으로 각황전하고 대웅전이 있으니까 더 위를 치켜 보는 게 되겠죠. 그런데 아래쪽 탑이 있는 마당에서 각황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그냥 이렇게 되어 있지 않고 이렇게 가파르게 올라갔다 5, 6개 올라 갔다. 그 다음에 옆으로 이렇게 기울기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갖고 해석이 여러 가지가 있어요. 왜 처음부터 똑바로 쌓지 않고 한 5개의 계단은 이렇게 높이 쌓은 다음에 그 다음에 비스듬히 해 주었는가 그것을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법당으로 올라가는 그 길은 어찌됐든지 공경을 표현하기 위해서 외나무다리를 건넌다든지 이런 기울기가 있는데 뒤꿈치를 허공에 매달고 살살 가게 한다든지 만세루 밑으로 긴다든지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계단을 그냥 뒤퉁맞게 올라가지 말고 조심스럽게 올라갔다가 편하게 올라가는 장치였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있어요.
또 우리 문화에 대해서 뭔가 미심쩍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렇게 올라갔다 이렇게 된 것이 이렇게 쌓다 보니까 이렇게 쌓다가는 높아질 것 같으니까 이렇게 바꿨다’ ‘이렇게 처음에 5개 실수를 했다가 그 다음에 이렇게 바꿨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경우에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이 뭔가 다르게 알려주는 경우가 있거든요. 어떤 도자기의 아름다움도 미술사가가 얘기한 것 보다 그 도자기와 30년 동안 교감한 사람이 훨씬 더 멋진 얘기...제가 서산 마애불을 30년 지킨 아저씨 얘기가 어떤 미술사가의 얘기보다 더 우리에게 감동 있다고 얘기 하듯이 화엄사에 20몇 년 있었던 스님한테 물어봤어요. 만났을 적에 물어봤지요.
스님 화엄사 앞마당에서 각황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왜 가파르게 올라가다가 그 다음에 편안히 올라갈까요? 그랬더니 그 분 대답이 ‘아, 거기 계단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그러니까 그 분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20년 동안 산 건데. 이것은 그 사람의 감각이 그 만큼 둔했다는 얘기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그렇게 따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 계단의 구조였다고 하는 것인데 그 중에 어느 것이 답인지는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왜 그러한 이야기들이 우리들이 여태까지 화엄사에 관해서 쓴 책이라든지 답사기나 안내서 봤을 적에 그러한 이야기들은 빠져 있었는가. 이게 건축에 관한 이야기가 단지 기술적인 이야기들만 하고 있고 그것이 갖고 있는 전체, 거기에서 삶이 이루어지고 있고 종교 의식이 있고 하는 이러한 사용자 입장에서 이야기 했던 것이 없어지니까 우리들에게 그러한 섬세하게 읽혀지는 것이 누락된 것이 아니었나 하면서 저 자신은 질문으로 그것을 대신하겠습니다.
영암사 터가 갖고 있는 것은 지난 시간에 너무나도 드라마틱하고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었던 웅장한 산세 속에는 그것에 지지 않는 기세로 해서 들어갔던. 집은 없어졌지만 저 탑을 보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능히 알 수 있지요.
서산 개심사 윗쪽에 불만스러운 찻길
서산에 있는 개심사 세심동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이런 돌계단을 타고서 한 800미터를 계속계속해서 올라가는 거지요. 이게 지금 개심사의 경우에 이 위쪽으로 차길이 나있는데 지금 거기에도 저 자신은 조금 불만스러운 게 있습니다. 찻길을 내면서 좀더 바깥으로 더 뺐으면 좋은데 이 길을 올라가다 찻길하고 만나요. 그렇기 때문에 본래대로는 이 길로 쭉 올라가다 보면 대나무 신호대들이 있는 곳을 지나게 되면 바로 이런 길로 이 길로 해서 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들어가면 바로 만나는 것이 이 경지라고 하는 거울 鏡자에다가 못 池 자라고 해서 거울 못을 만나게 됩니다.
거울 못 鏡地 또는 映池 전부 다 거울 못이라는 뜻이고 이런 이름이 붙어있는 절에 거울 못이 붙어 있는 곳이 상당히 많습니다. 청평사에 영지가 있지요. 그 영지를 바라보면 청평산이 그 연못 속에 참 아름답게 비칩니다. 불국사의 전설로 되어 있는 아사달 아사녀의 전설이 있는 영지에 가면 거기에 엄청난 콘도미니엄 짓다가 부도난 집이 있어서 아주 흉악하게 되어 있는데 그 괘능 옆으로 가면 있는 그 영지에 보면 그 영지에 토함사 자락이 전부 그림자로 이렇게 지고 있습니다. 여기 거울 못도 상황산 그림자가 받쳐 주기 때문에 전부 거울 못이라는 뜻입니다. 그림자 영자나 겨울 경자나 여기에 들어오면 옆으로 해서 통나무 외나무 다리로 해서 이렇게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앞에 여름철에 배롱나무가 굉장히 아름답게 큰 배롱나무가 있는데 이런 식으로 점점 그윽하게 끌어 들여서 상왕산 개심사 해강 김규진이 쓴 만세루의 현판 이 안쪽에 보면 대웅보전, 심검당, 적묵당, 만세루로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앞에 있는 마당에는 꽃밭이 그냥 우리 학교나 집에서 보는 꽃밭과 같은 식의 아주 편안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뭐 절 집의 꽃밭이 다 그렇지 뭐 이 집만 그렇게 편한가 그렇게 또 반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불국사 앞마당에는 꽃밭이 없습니다. 아무데나 꽃밭을 만들어 놓는 것이 아니고 그 꽃밭을 만들어 놨을 적에는 그 꽃밭이 이 절이 지향하고 있는 것이 절대자가 갖고 있는 친절성을 극대화 할 것이냐 아니면 절대자가 갖고 있는 존엄의 가치를 극대화 할 것인가에 따라서 이 정원에 대한 플랜 자체가 달라져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개심사의 경우에는 경허스님이 썼던 선방 같은 데는 저 뒤로 산신각은 저 위에 느티나무 숲 위쪽으로 이렇게 퍼져 있게 되지요. 여기가 내장사인데 내장사 단풍이 이처럼 이발소 그림처럼 되어 있고 사실 이때에 가보면 사람만 바글거릴 뿐이지 이런 단풍은 못 봅니다마는 역시 만세루 밑으로 들어와서 대웅전하고 적묵당과 심검당으로 포치하고 있는 겁니다. 본래 여기 계단도 여기도 이렇게 평평하게 넓은 것이 아니고 중간에 꽃밭을 만들어서 배치를 했던 것인데 그것을 치웠습니다.
화려한 자연에는 화려하게 대응했던 가장 대표적인 게 내금강에 있는 보덕굴입니다. 이 외금강 옥류천 있는 금강산이 다 이렇게 생겼죠. 여기에 ‘이 산세에 지지 않을 암자 하나를 설계하시오’라고 했을 적에 조용하게 해야 될까? 아니면 보이지 않게 해야 될까? 여러 가지 조건이 있을 수 있지요. 언제 지었는지 모릅니다.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 때부터 내려오고 최소한도 익재 이제현 그 시절에는 분명히 지었던 집이지요. 보덕굴이라고 하는 세 사람 들어가는 암자인데 7.2미터 바지랑대 위에 여기 창문 열려있는 이것만이 암자입니다. 그리고 이 암자를 가려면 지금 저는 이쪽에서 사진을 찍는데 같이 방북했던 고은 선생님이 먼저 이렇게 돌아서 이쪽에 지금 내려가고 있어요. 멀리서 보면 3층 집이지만 위에 있는 집들은 멀리서 보여질 게 외롭지 않게 보기 위한 장치이고 또 빗물이 내릴 적에 물받이로 해오는 기능일 것이고 여기 내려가서 여기 3명 들어가게 되면 벌써 흔들거리기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철, 쇠줄을 가지고 허리띠를 양쪽으로 매가지고 집을 붙잡아 맺고 여기는 18개의 구리 동판을 가지고 이렇게 매어서 이렇게 바지랑대를 놓고 굴 자체는 암자 자체는 이 방 하나입니다. 옆에 이쪽 사진을 이렇게 해 놓으면 여기 ‘사회주의 건설만세’ 이렇게 큰 글씨가 쓰여 있습니다.
아늑하면서도 시야 툭터진 무량수전
이 집은 한옥 지붕이 어떤 식으로 지어도 네 가지 이상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 네 가지가 다 있습니다. 눈썹지붕, 팔작지붕, 맛배지붕, 우진각 지붕 그리고 단순하고 화려하고 단순하고 화려한 걸로 엮었습니다. 또 1층을 딱 올린 것은 우리가 3층 석탑이나 정림사탑처럼 1층은 껑충하게 올라가고 그 다음에 차곡차곡 해 주는 것과 같은 안정된 차감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게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잘 들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옛날 사람들이 한 것이 어쩌면 산에 가서 보면 좋은 절터는 다 스님들이 차지하고 있고 그리고 거기에 지어진 집들은 그 산세에 맞춰서 있었던가 하는 것에 대해 가지고 산사의 미학이라고 하는 우리 개념 체제가 일찍이 정립돼서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공유할 수 있는 미학이었다면 20세기 후반 21세기에 짓는 건축은 그 미학에 입각해서 지을 때 지금처럼 그냥 화려하고 큰 것만을 추구하지는 않았을 텐데 특히 우리에게 너무나도 편안하게 해 놓은 것이 어떤 면에서 건축적인 의장이 미흡하게 들어간 것으로 오해되어 왔던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참으로 아쉬움을 남깁니다.
무량수전에 올라와서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눈길이 가는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 된 듯 싶어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 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줄 수 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이게 3년전 수능 국어 시험에 나왔던 문장입니다.
무량수전이 여러분들이 가서 무량수전 팔작지붕의 기울기가 학이 날갯짓하고 올라가는 그 리드미컬 한 것을 보여주고 있고 그리고 여기에 주심포 집으로 해서 해놓은 것이 오직 필요한 것 이상의 군더더기는 하나도 붙여주지 않은 필요미 간결미가 지켜주고 있는 엄숙성. 이것이 이 건축의 요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건축에서 제일 중요한 하는 로케이션이지요. 싸이트이지요. 싸이트에서 자리잡음인데 최순우 선생처럼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섰기 때문에 이 아름다움이 들어오는 것이고 이 시야가 있다는 전제 하에서 무량수전이 이 자리에 세워 진 거지요.
교토에 가면 ‘기요미즈데라’ 라고 하는 청수사라고 하는 절이 있는데 그 청수사라고 하는 절이 유명한 것은 그 절보다도 그 절에서 내려다보는 교토의 경관을 보여주는 것 때문에 청수사가 유명했습니다. 교토의 호텔 50층 자리 짓는 것 하고 이 기요미즈데라를 비롯한 교토 사찰하고 싸워서 결국은 15층으로 낮춰 놓았지요.
그러니까 지금도 교토 같은 곳에 50층을 짓겠다는 문화가 있는데 결국은 싸워서 또 이기는 문화가 있는 게 일본입니다. 한편으로는 지어야 된다고 하는 문화가 있고 한편으로 그것을 못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부석사 우리가 간혹 가다가 우리의 건축을 얘기하면 스케일을 얘기하는데 부석사 보다 더 큰 정원을 갖고 있는 절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저것을 다 자기의 정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여기에다가 이것을 지은 겁니다.
경복궁을 보고 자금성의 뭐 뒷간만하다고 얘기하지만 자금성이 어디 북악산, 인왕산 같은 산이 있습니까? 그것을 전제로 해서 지은 것이고 자금성 가 봐요. 처음부터 끝까지 뭐 때문에 갔다 왔는지 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고 처음에 본거나 끝에 가서 본거나 똑같잖아.
우리가 갖고 있는 산사 중에서 이런 시원한 눈 맛을 갖고 있었던 것이 여러 절중에서 부석사 하나로서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 됩니다.
토사 막아주는 선암사 삼인당 연못
마지막으로 선암사를 가는데 선암사 입구에는 들어가면 삼인당이라고 하는 연못이 있습니다. 연못이 있는데 아직 일주문은 안 왔어요. 들어가는 진입로 자체가 건축이니까 이 연못이 있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토목공학적, 종교적, 미학적 여러 가지 조건이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이 연못이 있기 때문에 장마 때 물을 담가서 고아 가지고 속도를 줄여서 밑으로 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없으면 그 위에서 내려오는 경사 급한 데서 내려오는 물길에 그냥 토사가 생겨가지고 선암사 계곡으로 빠져 버렸을 거에요. 여기에 섬이 있는데 섬이 있기 때문에 물이 들어가서 한 대 때리면 물이 들어가서 때리면 여울이 져서 전체를 돌아 가지고서 나갑니다. 그러니까 물의 회로를 다 유도를 해주는 거지요. 또 섬이 있는 것은 섬이 있어야 연못이 커 보입니다. 이것이 섬이 없으면 연못이 요만한데 섬이 있음으로 해서 상상과 그 너머의 공간이 보이는 연출되는 겁니다.
조금 수준 높여서 얘기하면은 ‘루돌퍼 아르나이미’라는 사람이 쓴 ‘비주얼 퍼셉션’ 시각적 인식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을 보면 ‘인간의 시각적인 습성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한 자세한 얘기들이 나오는 데 여기 무대라고 할 적에 본래 무대에서 가운데 시선이 많이 오지만 그 다음번에 많이 오는 곳은 저쪽입니다. 여기보다도 그래서 하무레트나 이런 연극을 보게 되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뭐 하는 것은 저쪽 무대에서 이루어지고 칼 싸워서 죽이는 것은 다 이쪽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저쪽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제대로 오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고 이쪽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갑자기 무슨 사건이 나서 등장하는 사람. 이게 전부다가 오른쪽과 왼쪽에 대한 인간 심리에 대해서 나온 것을 그 사람이 그런 것을 다 분석을 한 분이에요. 그분이 ‘모든 물체는 공간 속에서 또 다른 공간감을 창출한다’ 서귀포 앞바다에서 그냥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 하고 거기에 참치잡이... 참치는 없겠지. 갈치잡이 배 세 개가 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공간감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여기에도 이 속에 섬 하나를 넣어주는 것 하고 이것이 없는 것하고의 그 공간감의 차이를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종교적으로는 옛날 판유리가 나오기 전에 청동거울 말고 판유리 유리 거울로 색경으로 자기 전신을 비쳐볼 수 있는 것은 연못뿐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을 비쳐볼 수 있는 거울이라는 뜻에서 心印 마음 心자에 도장印까지 포함해서 삼인당 이라고 하는 연못 이름을 갖고 있고 선암사에서는 이와 같은 연못이 6개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암사 일주문으로 들어서게 되면 그 바로 앞에는 ‘육조고사’라고 하는 만세루의 이름이 써 있습니다. 추사의 제자 추사풍으로 썼기 때문에 이렇게 아주 굳세면서도 아주 힘 있고 개성적인 글씨를 썼어요. 육조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절. 달마 시대에서부터 내려오는 절. 그런 뜻이겠지요.
본래 선암사의 지금 23채의 당우가 있고 본래 50여채가 있었던 것인데 이 집이 처음 시작은 이렇게 시작했어요. 대웅전, 만세루, 심검당, 적묵당 4개로 시작했다가 명부전, 관음전, 응진전, 선방으로 이렇게 계속해서 뒤에 무전 이렇게 퍼져나갔습니다. 본래 마당이 이만했어요. 여기에 한 채 한 채 절 집을 지어 들어갔는데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포치가 되어 있어서 선암사에 가서 봤을 적에는 어떤 유서 깊은 마을을 온 것 같은 그런 편안함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선암사 뒷간 보물이든 국보든 지정 조사
선암사에 뒷간이 있는데 이 선암사 변소 내가 하여튼 보물이 되든 국보가 되든 하여튼 지정을 해야 된다고 지정 조사가 나갈 겁니다. 일본의 동복사라고 하는 절은 절의 뒷간은 국보로 지정이 됐어요. 여기에 써 있잖아요. ‘대변소 뒷간’ 하고. 이것을 요새 애들이 한문을 잘못 읽어서 깐디라고 읽어 가지고 선암사 깐디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이 집은 지금도 사용을 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선암사에서는 화장실 냄새가 안 납니다. 그것은 그기류가 선암사 뒷간으로 해서 아래쪽으로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조계산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 그쪽으로 나지 선암사 안에서는 절대로 뒷간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선암사에는 천연덕스러운 데가 굉장히 많습니다. 선암사 저 위 달마전 위에 무락이 하나 있는데 동그란 무락이 하나 있었어요. 그걸로 사용했어. 그런데 당우가 늘어나고 사람이 늘어나니까 이 무락을 갈아야 되는 거에요. 그러면 요새 같으면 그거 걷어 내고서 이거 큰 것 놨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또 사람이 5채가 있다가 10채가 되고 20채가 됐다고 그럼 무락이 또 큰 거로 되어야 될 것 아니겠어요. 그거 선암사는 어렵지 않게 했어요. 그냥 처음에 이거 쓰다가 많으니깐 놓았다가 4단 석조로 해가지고 지금 쓰고 있는 겁니다. 그게 지금 유명한 선암사 달마전의 4단 석조에요.
이집트에 가면 핫셉슈트라고 발음하기 힘든 여자 왕의 제사 지내던 장제전이라고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계단이 하나인데 가까이 보면 둘로 끊어지면서 가는 곳이 있어요. 그것이 서양의 건축 속에서 제사 지내는 공간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 이집트의 3,500년 전에 핫셉슈트 장제전과 파르테논 신전 같은 석조 문화재로의 장엄미 단순성 속에서 필요한 부재 이상의 것은 들어가지 않는데 면 비례로도 그렇고 종묘를 보고 세계 건축가들이 놀랜 것이 기둥하고 지붕 벽면 외에 다른 공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단순한 공간으로 고요... 제사 지나는 공간이기 때문에 정밀하고 고요하면서도 엄숙해야 되는 것이거든요. ‘이 고요의 감정을 엄숙의 느낌을 건축으로 이와 같이 실현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여러분들이 종묘에 갔을 적에 보면 지금 박석이 깔려 있는데 종묘 문 앞에 딱 들어서면 이 종묘 앞에 월대라고 박석 깔려 있는 것이 우리 가슴 높이에서 옵니다.
여기 여러분이 서면 가슴 높이 내 가슴 높이에 묻혀 있는 거지요. 내가 섰는데 월대가 밑으로 있는 것 하고 내 가슴 높이에서 이렇게 전개되고 그 위에 지붕이 일직선으로 해서 쭉 단순하게 가는 것 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 선대를 제사 지내는 엄숙성을 그렇게 지켜왔어요. 가면 저기 혼유도 외에 옆에 박석들이 아주 울퉁불퉁 하게 된 것 가지고서는 사람들이 저걸 헐뜯어요. ‘한국 사람들 다 잘하는 마무리가 약해 갖고 이렇게 지저분하게 저것 반듯이 못 다듬는다’고 이렇게 얘기해요.
저 박석이 없어서 창덕궁 비원에 인정전 앞을 화강암을 돌을 짜 가지고서는 이렇게 쫙 깔려 있습니다. 가서 보십시오. 그 모양이 얼마나 못생겼는가. 또 경복궁에 한쪽에서는 거기에 이것을 화강암을 반듯하게 해서 놨다가 하루 만에 드러낸 일이 있어요. 눈이 부셔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박석은 난반사를 시켜 줍니다. 그리고 이 전체가 기울기가 있는데 근정전 앞에 있는 것도 그래요. 이 박석도 도로 포장하는 데 쓰는 네 치 두께의 판때기로 우리가 이번에 문화재청에서 강화도 석모도에서 박석 광산을 찾아 가지고 지금 우리가 전부 궁릉에 이것들을 전부다 보수할 계획인데 비가 왔을 적에 난반사를 시켜주기 때문에 경복궁이나 종묘 월대에 긍정전이나 월대에 갔을 때 종묘에 갔을 때 눈이 절대 부시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장마철에 비가 왔을 적에 얼마나 폭우가 쏟아집니까? 만약에 이게 화강암으로 쭉 했으면 하수도로 빠지지 못해서 역류 해 버릴 거에요. 그런데 이것은 박석을 따라서 꾸불탕 꾸불탕 이렇게 물길이 돌아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포장도로 10미터 갈 것을 비포장 도로 80미터로 돌려 가지고 물길이 고였다 넘어갔다 고였다 넘어갔다 유속을 죽여가면서 빨아가는 효과를 합니다. 조상들의 그 깊은 뜻은 모르고 ‘다 잘했는데 왜 박석은 왜 저렇게’ 서양건축가들은 저렇게 정제된 곳에 이쪽에 돌판을 깔면서 모더니즘적 감각으로 이렇게 무질서한 것을 짜깁기를 해서 질서를 놓은 것. 이렇게 칭찬을 해가는 것은 아주 한국에 대해서 감탄할 만반의 준비를 한 사람들이 해석한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에 존경심이 없는 사람들은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얘기를 해 왔던 겁니다. 종묘, 그것이 왜 세계문화유산으로 첫 번째 되어 있는가 이 다음에 한번 가 보십시오. 이러한 풍광을 우리는 잊어 버렸죠. 더 이상 찾을 길이 없지요.
13개 지구 왕릉 묶어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왕릉도 그냥 왕릉이라고 하면 옛날 임금 묻힌데 묏자리 좋고 뭐 이런 식으로 얘기할는지 모르지만 왕릉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죽음의 공간을 가장 장엄하게 연출해 놓은 것이 왕릉입니다. 왕릉을 축소해서 놓으면 일반 민묘와 같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 조선시대 사람들이 우리는 어차피 죽는데 그 죽음의 공간을 어떻게 장엄하는 것이 가장 성스럽고 그리고 망자에 대해서 살아남은 자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가를 연출 해 놓은 최고의 형태의 건축적인 장치인 것입니다.
이 왕릉이 13개 지구에 능원묘 다 해서 100개가 넘습니다. 이런 공간이 서울 주변에 수도권에 있는 것이 이게 다 묶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것이 저희 문화재청의 뜻이고 그것을 위해서 지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왕릉은 밑에서 쳐다보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고 능치 위에 올라가서 보게 되면 조각에서부터 묏자리가 앉아 있는 주변모습하고 해서 우리에게 또 다른 감동을 주기 때문에 어떤 능이든지 한군데는 능치 위로 올라가게 할 수 있는 개방시설을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구릉에 가서 아예 이쪽에 선조대왕 몽릉지구는 특별관람지역으로 천원 더 낸 사람은 그 속에 마음대로 가서 뒹굴든지 말든지 들어가게 개방을 할 생각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건축의 모든 제사 공간이나 능의 구조나 또는 절 집이나 다만 양반 가옥이나 이쪽에 대해가지고 제가 강의를 못했습니다마는 이런 시각 속에서 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건축이 산사의 미학이 주고 있는 게 우리 시대의 건축이 주는 그 의미가 살아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현대의 느낌과 또 한편으로는 전통이 갖고 있는 위대함. 이것을 우리의 삶 공간에서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한번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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