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김종태



달래 비슷하지도 않으면서

진짜 달래라고 진달래?

이름만 그럴싸한 것은

말만 그럴싸한 것보다 본질적 사기이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떠벌리는 철부지보다는

우린 사랑하잖아요 라고 명패를 목에 매달고

제 할일 다 했노라 하는 것은

철부지보다 미운 개구쟁이이다


짧은 봄밤 

선홍빛 물드는 그리움은 나 몰라라 하고

그 진달랫빛 석 달 갈 줄 알고 나물만 캐는 사람은

진달래보다도 더 미운 개구쟁이 사기꾼이다




진달래 [korean rosebay] 

Rhododendron mucronulatum

진달래과 낙엽관목

참꽃 또는 두견화라고도 한다. 산지의 볕이 잘 드는 곳에서 자란다. 높이는 2∼3m이고 줄기 윗부분에서 많은 가지가 갈라지며, 작은가지는 연한 갈색이고 비늘조각이 있다. 잎은 어긋나고 긴 타원 모양의 바소꼴 또는 거꾸로 세운 바소꼴이며 길이가 4∼7cm이고 양끝이 좁으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잎 표면에는 비늘 조각이 약간 있고, 뒷면에는 비늘 조각이 빽빽이 있으며 털이 없고, 잎자루는 길이가 6∼10mm이다.

꽃은 4월에 잎보다 먼저 피고 가지 끝 부분의 곁눈에서 1개씩 나오지만 2∼5개가 모여 달리기도 한다. 화관은 벌어진 깔때기 모양이고 지름이 4∼5cm이며 붉은빛이 강한 자주색 또는 연한 붉은 색이고 겉에 털이 있으며 끝이 5개로 갈라진다. 수술은 10개이고 수술대 밑 부분에 흰색 털이 있으며, 암술은 1개이고 수술보다 훨씬 길다.


열매는 삭과이고 길이 2cm의 원통 모양이며 끝 부분에 암술대가 남아 있다. 관상용으로 심기도 하고, 꽃은 이른봄에 꽃전을 만들어 먹거나 진달래술(두견주)을 담그기도 한다. 한방에서는 꽃을 영산홍(迎山紅)이라는 약재로 쓰는데, 해수·기관지염·감기로 인한 두통에 효과가 있고, 이뇨 작용이 있다.

한국·일본·중국·몽골·우수리 등지에 분포한다. 흰색 꽃이 피는 것을 흰진달래(for. albiflorum)라고 하고, 작은 가지와 잎에 털이 있는 것을 털진달래(var. ciliatum)라고 하며 바닷가와 높은 산에서 흔히 자란다. 털진달래 중에서 흰색 꽃이 피는 것을 흰털진달래(for. alba)라고 하며 해안 근처에서 간혹 볼 수 있다. 잎이 둥글거나 넓은 타원 모양인 것을 왕진달래(var. latifolium)라고 한다.


바닷가 근처에서 자라는 것 중에서 잎에 윤기가 있고 양면에 사마귀 같은 돌기가 있는 것을 반들진달래(var. maritimum)라고 하고, 열매가 보다 가늘고 긴 것을 한라진달래(var. taquetii)라고 한다. 키가 작고 꽃도 작으며 5개의 수술이 있는 것을 제주진달래(R.saisiuense)라고 하며 한라산 정상 근처에서 자란다.





진달래를 지칭하는 이름은 여러 가지이다. 연달래, 꽃달래, 얀(온)달래, 반달래, 진달래 수달래 등 모두 달래자가 붙어 있다. 같은 진달래이지만 꽃의 느낌에 따라 다르게 불렀던 것 같다. 달래꽃보다 꽃빛깔이 진하다고 하여 진달래가 되었다고도 한다.

사람마다 그 때 그 때의 느낌에 따라 연달래, 얀달래라고 해도 옆에서 듣는 사람은 모두 진달래로 들을 수 있었으리라.

남도지방 은어에 앳된 처녀를 일컬어 연달래라 하고 성숙한 처녀는 진달래, 그리고 과년한 노처녀는 난달래라 한다. 나이에 따라 변하는 젖꼭지 빛깔에 비유한 짓궂은 표현이라고 하나 믿을 것이 못된다.


강원지방에서는 물가에서 자라는 산철쭉을 수달래라 한다. 물에서 자라는 진달래를 뜻하지만 진달래는 독성이 적어 먹을 수 있어도 산철쭉은 먹지 못한다.

진달래는 우리 땅 어디든지 자라지 않는 곳이 없다.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폭넓은 서식지를 갖고 있는 우리의 자생식물이다. 그래서 한 때는 우리 나라꽃으로 하자는 운동이 벌어진 때도 있었고, 북한의 경우 함박꽃나무(木蘭)로 바꾸기 전까지는 상징화로 아낌을 받았던 나무이다.


진달래는 확실히 아름다운 나무다.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란다. 진달래가 많은 땅은 그만큼 땅이 척박한 곳이다. 강 산성 토양에서도 견디는 수종이 바로 진달래과 식물이다. 다른 수종이 척박지를 피해 기름진 땅에 뿌리를 내리지만 진달래는 오히려 붉은 색채가 더욱 짙어져 동국의 봄을 장식한다.

진달래는 줄기를 꺾어 주면 도장지가 자라 오히려 더 많은 꽃이 핀다. 진달래는 가지 끝에 꽃눈이 밀집해 달린다. 늙은 나무는 가지가 섬세하고 끝에 한 두 송이의 꽃눈이 달리지만 도장지 끝에서는 십여 송이의 꽃눈이 달린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가지를 꺾인 등산로 주변의 진달래가 휠씬 탐스러운 꽃으로 피는 것이다.


진달래는 먹는 꽃이다. 그래서 진짜 꽃이라는 뜻으로 참꽃이라 부른다. 참꽃에 대해 못먹는 철쭉은 개꽃이라 부른다. 독성이 적은 진달래는 꽃잎을 먹을 수 있지만 독성이 강한 철쭉은 개꽃이라는 이름의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진달래로 국수까지 빚어 먹었던 우리 선조들은 음식의 맛 뿐만 아니라 멋까지 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동국세시기에 진달래로 국수를 뽑아먹는 과정이 소개돼 있어 눈길을 끈다.



진달래는 우리 땅 어디든지 자라지 않는 곳이 없다.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폭넓은 서식지를 갖고 있는 우리의 자생식물이다. 그래서 한 때는 우리 나라꽃으로 하자는 운동이 벌어진 때도 있었고, 북한의 경우 함박꽃나무(木蘭)로 바꾸기 전까지는 상징화로 아낌을 받았던 나무이다. 진달래는 확실히 아름다운 나무다.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란다. 진달래가 많은 땅은 그만큼 땅이 척박한 곳이다. 강 산성 토양에서도 견디는 수종이 바로 진달래과 식물이다. 다른 수종이 척박지를 피해 기름진 땅에 뿌리를 내리지만 진달래는 오히려 붉은 색채가 더욱 짙어져 동국의 봄을 장식한다.


진달래는 줄기를 꺾어 주면 도장지가 자라 오히려 더 많은 꽃이 핀다. 진달래는 가지 끝에 꽃눈이 밀집해 달린다. 늙은 나무는 가지가 섬세하고 끝에 한 두 송이의 꽃눈이 달리지만 도장지 끝에서는 십여 송이의 꽃눈이 달린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가지를 꺾인 등산로 주변의 진달래가 휠씬 탐스러운 꽃으로 피는 것이다.

정원에 심어진 진달래도 가지를 잘라줄 필요가 있다. 도장지가 우뚝하면 봄철에 보다 탐스러운 짙은색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우리 주위에서 보는 관상식물이란 수백년 또는 수천년 동안 재배해 오는 동안 내병성, 내한성, 내습성 등 필요에 따라 환경에 적응하도록 개량한 것들이다. 또 향기가 더욱 짙게 했거나 꽃이 탐스럽고 더 많이 달리도록 개량한 것들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원예식물이 되었다. 진달래는 개량하지 않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관상가치를 지니고 있다. 지금 당장 정원에 심어도 그 어떤 나무보다 화려한 꽃을 피워 매년 봄소식을 알린다.

진달래는 먹는 꽃이다. 그래서 진짜 꽃이라는 뜻으로 참꽃이라 부른다. 참꽃에 대해 못먹는 철쭉은 개꽃이라 부른다. 독성이 적은 진달래는 꽃잎을 먹을 수 있지만 독성이 강한 철쭉은 개꽃이라는 이름의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3월 삼짇날 진달래꽃으로 화전을 붙여 먹는다고 했다.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하여 둥근 떡을 만들고 기름에 지져 먹는 먹는 것을 화전(花煎)이라 한다."

옛날에는 음력 삼월 삼짇날을 전후하여 마음에 맞는 친구들이나 가족끼리 또는 이웃끼리 가까운 산을 찾았다. 계곡에 솥뚜껑을 걸고 나뭇가지를 지펴 불을 붙인다. 따온 진달래꽃을 찹쌀반죽에 섞어 전을 붙이거나 찹쌀반죽 위에 꽃잎을 얹어 지져낸다.

남자들이 솥이며 그릇들을 지게에 져다 취사 준비를 마쳐주고 산을 내려가면 여인들의 오붓한 시간이 된다. 서로 시를 지어 노래하면 댓구에 따라 다른 사람이 시를 짓는다. 이런 놀이를 화전놀이라 했다.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도 삼월 삼짇날(重三)에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하여 둥근 떡을 만든다. 이것을 참기름에 지져내면 화전(花煎)이 된다."고 했다. 진달래로 국수까지 빚어 먹었던 우리 선조들은 음식의 맛 뿐만 아니라 멋까지 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동국세시기에 진달래로 국수를 뽑아먹는 과정이 소개돼 있어 눈길을 끈다.


오미자를 우려낸 붉은 국물에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힘 것을 잘게 쓸어 넣는다. 거기다 꿀을 타고 잣과 진달래 꽃잎을 뛰운 것을 화면(花麵)이라 한다. 혹은 진달래꽃을 녹두가루와 반죽하여 국수를 만들기도 한다. 또 녹두로 국수를 만들어 붉은색으로 물들이기도 하는데 꿀물에 띄운 것을 수면(水麵)이라 한다. 시절 음식으로서 제사에 쓴다.


삼월 삼짇날의 화전놀이는 집안에만 갇혀 지내는 부녀자들에게 이날 하루 소풍을 보내 그간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억압된 조선시대의 폐쇄 사회에서도 삼월 삼짇날의 진달래 화전, 사월 초파일의 느티떡(楡葉餠), 오월 단오에는 수리취떡, 유월에는 장미꽃전, 구월구일 중양절에는 구절초나 국화로 국화전을 부쳐 먹었다.

또 겨울에는 호박떡, 무시루떡, 곶감떡 같은 것을 쪄 시절음식으로 즐겼다. 그외 쑥이나, 미나리, 달래 같은 나물로 전을 붙여 먹기도 했다. 진달래 뿐만 아니라 계절에 따라 나는 갖가지 꽃과 나물로 시절음식을 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나주 선비 임백호(林白胡)는 멋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송도 명기 황진이(黃眞伊)의 무덤에 찾아가 제사를 지낸 분이다. 그의 화전놀이를 읊은 시에


개울가 큰 돌 위에 솥뚜껑 걸어 놓고

흰가루 참기름에 꽃전부쳐 집에 드니

가득한 봄볕 향기가 뱃속까지 스민다.


얼마나 운치있는 노래인가.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부녀자들에게 널리 불리워졌던 〈영남대가 내방가사(嶺南大家內房歌辭)〉 화전가(花煎歌) 편에는 "꽃술일랑 고이 두고 꽃잎만 따서 지져 먹고, 배부르면 진달래 꽃술로 꽃싸움(花戰)하자"고 노래하였다. 꽃술을 걸어 서로 잡아당겨 꽃밥이 떨어지는 쪽이 지게 된다. 편을 갈라서 하게 되는데 마지막까지 남은 쪽이 이기게 된다. 이긴 쪽에서는 춤을 추고 진쪽은 벌로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진달래꽃이 필 무렵이면 절을 찾아가 탑돌이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 때 성벽을 걷거나 다리를 밟으며 탑 주위를 도는 것은 무병 장수를 위한 기원의 뜻이 담겨 있다.

탐스럽게 핀 진달래 가지를 꺾어 꽃방망이(花棒)처럼 만들어서 앞서 가는 사람들을 때리면서 놀았는데 이 꽃다발을 여의화장(如意花杖)이라 했다. 진달래 꽃으로 선비의 머리를 치면 과거에 급제하고 기생의 등을 치면 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 믿었다.


경상도에서는 진달래 나무 숲에 꽃귀신이 산다고 하여 봄철 진달래가 필 때는 어린이들을 산에 가지 못하게 말렸다. 또 얼굴이 뽀얀 문둥이가 진달래꽃을 먹고 사는데 어린이들이 다가와 꽃을 따면 잡아서 간을 내어 먹는다고도 했다. 아마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위험한 산에 함부로 가지 못하도록 이런 이야기를 꾸며낸 것으로 여겨진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진달래꽃이 피면 이름 없는 무덤에도 꽃다발이 놓인다. 시집 못가고 죽은 처녀 무덤에는 총각들이, 총각 무덤에는 처녀들이 진달래 꽃을 꽂아준다. 이렇게 하여 처녀, 총각 귀신을 달래지 않으면 원혼이 나타나 혼사를 망쳐 놓는다고 믿었던 때문이다.


진달래의 한자 이름은 두견화(杜鵑花) 또는 척촉(척촉)이다. 여기에는 형을 그리워 하는 동생의 애틋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척=擲+躪 촉=觸+躪

옛날 중국의 촉(蜀)나라에 의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자 계모가 들어 왔다. 게모의 학대로 형은 집을 쫓겨나고 말았다. 나중에는 동생도 견디다 못해 집을 나오고 말았다.

어느 따뜻한 봄날 동생은 굶주림에 지쳐 쓰러지게 되었다. 그리고는 한 마리 새가 되었다. 그 새가 바로 두견새이다. 형를 찾아 헤매던 두견새는 매년 진달래꽃이 필 때면 고향을 찾아와 언제나 형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슬피 울었다.

촉나라로 돌아 갈꺼나! 촉나라로 돌아갈거나!

귀촉도(歸蜀道)! 귀촉도(歸蜀道)!


목이 찢어져라 슬피 울다가 마지막에는 피를 토하고 말았다. 그래서 진달래와 철쭉에는 지금도 붉은 피가 점점이 묻어 있다. 고사에서 말하는 두견화는 철쭉을 지칭하는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달래는 분명 아니다.

새 이름 두견은 두견이를 말한다. 우리 말이 한자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귀촉도는 소쩍새를 말한다. 같은 여름 철새이긴 하지만 분명 다른 새이다. 옛 사람들이 진달래와 철쭉을 따로 구분해서 쓰지 않았듯 새도 서로 다른 종으로 보지 않은 것 같다.


두견화 전설에 대해 중국의 문호 임어당(林語堂)은 "두견화는 지극히 아름다운 꽃이지만 일반인들은 비극의 꽃으로 여긴다. 그 이유는 뻐꾸기의 피눈물 나는 울음 속에서 핀 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는 두견이도 소쩍새도 아니고 뻐꾸기로 기술돼 있다.


진달래 뿌리 삶은 물에 베를 물들이면 파르스럼한 잿빛으로 염색이 된다. 스님들의 정갈한 승복은 진달래 뿌리로 물들인 것을 으뜸으로 쳤다. 이러한 전통 염료기법이 어느 깊은 산의 암자에나 남아 있을까, 지금은 여간해서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술은 진달래꽃으로 빚은 두견주(杜鵑酒)이다. 진달래꽃을 따다 꽃술을 따내고 독에 담고 찹쌀 고두밥과 누룩을 버무려 그 위에 켜켜이 넣는다. 100일 쯤 지나면 향기가 물씬 풍기는 두견주(되강주)가 된다. 당진 면천의 되강주가 가장 이름났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중양절(重陽節)에 국화와 함께 진달래 뿌리로 술을 담궈 진달래 피는 삼월 삼짇날 마시는 술을 두견주라 한다"고 했다.


봄에 진달래꽃을 소주에 담가 두면 붉은 꽃물이 우러나와 맛과 빛이 우아하다. 한 컵을 불쑥 마시면 심한 현기증이 일어나면서 혼미에 빠진다. 반드시 1개월 이상 숙성시킨 뒤 마셔야 한다.


진달래꽃은 약재로도 쓰였다. 꽃을 말려서 가루로 만든 것을 꿀에 개어 환을 만든다. 이것을 하루 서너 알씩 먹으면 오래된 기관지염을 다스린다. 한방에서는 기관지염, 고혈압, 기침에 좋고 혈압을 내려주며, 신경통 루머티즘을 낫게 한다고 했다.




 진달래


              이영도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 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진달래산천 


   신동엽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에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진달래


                    박노해



겨울을 뚫고 왔다

우리는 봄의 전위


꽃샘추위에 얼어 떨어져도

봄날 철쭉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 외로운 겨울 산천에

봄불 내주고 시들기 위해 왔다


나 온몸으로 겨울 표적되어

오직 쓰러지기 위해 붉게 왔다


내 등뒤에 꽃피어 오는

너를 위하여


현실에서 보란 듯이 이루어낸

지난날 뜨거웠던 친구들을 보면

해냈구나 눈시울이 시큰하다


이런 중심 없는 시대에는

세상과의 불화를 견디기도 어렵겠지만

세상과의 화해도 그리 쉽지만은 안겠지


지금도 난 세상과 불화 중이지만

나 자신과는 참 고요하고 따뜻해

그래서 다시 길 떠나는가 봐


세상과의 화해가 자신과도 화해일 수 있다면

세상과 화해한 넌 지금

너 자신과 화해가 되니?



진달래 사연


봄바람이 들어 들뜬 아가씨를 두고 ‘참꽃’(진달래)에 볼때기 덴 년’ 이라는 속된 말이 있다. 만산홍(滿山紅)의 진달래로 두 볼에 화상을 입었다는 것이니 진달래에 관한 이보다 감각적인 표현이 어느 다른 나라에 있을까 싶다. 이렇게 볼을 덴 처녀들은 진달래 한아름씩 꺽어들고 ‘진달래 무덤’을 찾아가 꽃을 꽂아주는 것이 진달래철 아가씨들의 은밀한 의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달래 무덤은 그 이름처럼 낭만적이진 못하다. 장가 못 가고 죽은 총각으로 외지에서 머슴살이 하다가 죽거나 객사한 소금장수 같은 연고 없는 무덤이다. 돌보지 않아 황폐해진 그 무덤에 연중 한 번 진달래철에 꽃무덤이 된다 하여 그런 고운 이름을 얻었을 뿐이다. 꽃을 꽂지 않은 처자에게는 장가 못 가고 죽은 이 몽달귀신의 해코지를 받는다는 금기가 없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장가 못 가고 죽은 원령에 대한 예쁘디예쁜 봄의 풍속이 아닐 수 없다.

진달래 약탈이라는 신나는 풍속도 있었다. 이 철이면 젊은나무꾼들은 나믓짐에 진달래를 촘촘히 꽂아 꽃짐을 지고 내려오게 마련이다. 짐짓 마을 여인네들이 모여 있는 동네 샘가 앞을 지나간다. 그중 왈가가닥 아줌마가 진달래 꽃짐 뒤로 슬금슬금 다가가서 이 젋으 ㄴ나무꾼의 바짓가랑이를 끌어내린다. 못 보일 것이 드러나 허둥지둥하면 샘가의 부녀부대가 폭소를 터뜨리며 습격하여 그 진달래꽃을 약탈해 간다.

이런 약탈을 당해야 장가를 갈 수 있고 또 품삯도 반품에서 온품으로 받을 수 있었으니 성인식(成人式)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역시 의식화된 진달래 약탈 습속이었다.

진달래 무덤이나 진달래 약탈은 심층에 섹스를 암시하는 감각적인 풍습이란 차원에서 공통되고 있다.

정신적 차원에서도 진달래는 선택 받았다. 옛 우리 선조들은 꽃을 볼 때 그 아름다움이나 현란함을 천하게 보고 그 기절(氣節)이나 지조를 귀하게 보았다. 그래서 마치 벼슬에 품작을 매기듯이 꽃에도 일품(一品)에서 구품(九品)까지 품작을 매겨 가까이하거나 멀리하기도 했다.세조 때 재상인 강희안 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 보면 진달래는 정오품(正五品)에 랭킹되어 있으며 그만한 품작을 내린 이유는 이러하다. 진달래는 메마른 땅이나 바위 틈을 골라 피고 또 북향일수록 잘 피고 꽃빛깔도 진하다는 것을 든다. 곧 절신(節臣)이 궁지에서 임 향한 일편단심으로 붉게 간직하는 기절을 이꽃에서 보아낸 것이다.

진달래가 한국인의 정서에 차지해온 비중도 대단하다.


창밖에 우는 새야

어느 산에서 자고 왔느냐

응당 그 산중 일은 잘 알 터이니

진달래가 피었던가 피지 않았던가.

이것은 판서(判書) 서기보(徐箕輔)의 첩 죽서(竹西)가 열 살 때 지은 시다.


봄맞이 나른한 몸 가눌 길이 없어

진달래 꽃가지 아래 게으르게 앉아

꽃수염 헤아리고 다시 한 번 헤아린다.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김씨라는 규수 시인의 <춘사시春事詩>다.

이렇게 이 꽃에 사랑을 심고, 이 꽃에 품작을 주고, 이 꽃에 정을 태우는 것만으로 성에 차지않아진달래로 화전(花煎)을 부치고, 진달래로 화면(花麵)을 빚으며, 진달래로 화주(花酒)까지 담가먹었을까.

출처 : [기타] 이규태의 진달래 [신원문화사]뽑내고 싶은 한국인중에서...



북한의 나라꽃을 진달래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민중화가들이 북한의 국화 진달래를 그렸다고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북한의 국화는 진달래 가 아니고 등산인들이 산목련이라 부르는 함박꽃나무다.

출처 : 닥터상떼
글쓴이 : 닥터상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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