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밭에서 당신께 띄웁니다.
추억이란, 다른 말로는 아픔일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갈대는 봄이나 여름보다는 가을이나 겨울에 어울려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갈대가 가을만을 그리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월 막바지, 이곳 전남 순천만 대대포구에는 봄 갈대가 한창입니다.
키가 껑충한 겨울 갈대 사이로 올봄에 싹틔운 연녹색 새 줄기들이 올라옵니다.
미처 꽃 피우지 못한 봄 갈대는 작은 손길에도 파르라니 예민합니다.
전남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에 둘러싸인 순천만, 이곳에 서니 갈대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바람은 차지 않고 햇볕은 적당히 따사로운 이 계절, 쓰라린 이별 선언은 가을 갈대밭에서 할지언정 가슴 설레는 고백만큼은 봄 갈대밭에서 할 일입니다.
단, 개펄에 너무 깊이 들어가면 발이 푹푹 빠지니 조심하십시오.
아이들과 같이 온 가족들, 갈대숲 개펄에 숨어 있는 게를 재미나게 찾고 있습니다.
진흙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곳을 막대기로 들추니 흙덩이와 분간이 잘 안 되는 주먹만한 게들이
꼼지락거립니다.
게들은 구경만 하고 놓아 주세요.
대대포구에서 순천만호라는 이름의 작은 배를 타고 물 쪽으로 들어갑니다.
갈대밭 속에 새들이 숨어서 저를 구경합니다.
순천이 품고 있는 보석이 몇 가지 있다면, 조계산 선암사가 빠지지 않을 겁니다.
선암사는 승선교(보물 제400호)가 놓인 길목에서부터 그 운치가 시작됩니다.
조선 숙종 때 호암대사가 백일기도 끝에 관세음보살을 만나고 세웠다지요.
냇돌로 쌓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유연합니다.
흰 거품을 내던 개울물은 승선교 둥근 아치 밑을 지나면서 숨소리가 잦아들고, 산바람도 한결 순해집니다.
청춘남녀가 함께 건너면 사랑이 이뤄진다고 하던가요.
절은 조계산 동쪽 자락에 새초롬히 들어앉았습니다.
백제 성왕 때까지 유래가 거슬러 올라가는 태고종의 본찰입니다.
단아한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화장기 없는 대웅전 처마 밑 풍경은 바람이 불면 댕그렁 댕그렁 천오백년 세월을 추억합니다.
수려한 풍광 덕에 영화촬영장소로 애용되는 절, 그리고 사시사철 꽃이 지지 않기로 유명합니다.
산수유, 벚꽃이 지나간 지금도 대웅전 계단 앞엔 키 큰 수국이 등불처럼 환하게 서 있습니다.
원통전 뒤에는 600살 먹은 매화나무도 건재합니다.
야트막한 담장 아래 자리잡은 작약은 또 어찌나 색이 고운지요. 봄이 유난히 짧았던 올해, 꽃구경 한번 못해 속상해 하는 당신, 얼른 선암사로 오세요.
절 전체가 정원을 이어붙인 듯이 오밀조밀해 길목마다 쭈그리고 앉아 꽃구경하기엔 그만입니다.
또 있습니다. 저녁 6시, 저녁예불을 알리는 법고가 울립니다.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그 북소리, 꼭 들으셔야 합니다.
선암사까지 와서 해우소(解憂所)에서 몸과 마음을 비우지 않았다면, 로마에서 트레비 분수에 동전 안 던지고 간 셈입니다.
해우소, 그러니까 화장실이지요.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선암사 해우소는 안에선 밖이 잘 보이고 밖에선 안이 잘 안 보이는 희한한 곳입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라’고 정호승 시인이 노래했던가요.
누각처럼 번듯한 지붕 아래 자랑스레 ‘뒷간’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습니다.
문화순례꾼들은 그 건축미학에 홀려 머물고, 저는 내려쬐는 볕이 좋아 오래 머뭅니다.
자, 마지막 여정입니다.
백제와 고려의 여운을 품은 선암사에서 857번 도로를 따라 고개 하나를 넘으니 조선시대가 펼쳐집니다. ‘대장금’과 ‘허준’을 찍은 낙안읍성입니다.
조선시대 마을 경관이 그대로 보존돼 있습니다.
올망졸망한 초가집 안에는 아저씨도 살고 할머니도 삽니다.
동헌에 방앗간, 서당, 베짜는 집까지 들어앉아 있습니다. 사람 냄새가 풀풀 납니다.
어느 집 마당에선 소가 여물을 먹고 있고, 돌담 밑에선 목끈도 없는 개들이 볕을 쬐며 졸고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성곽 위 따뜻한 돌 위에 앉아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노라면, 아차 하는 사이 수백년이 훌쩍 흘러버릴지도 모릅니까요.
이렇게 5월 어느날 저는 남도(南道)에 있습니다.
갈대밭에서 당신을 떠올렸고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맺습니다.
[여/행/수/첩]
▷ 가는 길 :①손수운전(서울 기준):호남고속도로 승주IC → 857번 지방도로 죽학삼거리 → 선암사 방면 우회. 857번을 계속 이으면 낙안읍성 민속마을이 20분. 여기서 58번 도로 여수 방향은 순천만 대대포구.
②대중교통: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5시간, 부산에서 3시간.
순천시외버스터미널(061-744-8877)에서 선암사행 버스 수시.
순천시청 앞에서 선암사와 낙안읍성 등을 둘러보는 무료 시티투어버스(061-749-3328)가 매일 오전 출발.
▷ 먹을 곳 : ①조계산 보리밥집 (061-754-3756): 큰굴목재와 송광굴목재 사이. 콩보리밥(5000원)을 나물과 된장국에 슥슥 비벼 먹어볼 것.
②윤씨네 버섯골 (061-745-3008):버섯 넣은 간장게장(5000원). 반찬도 푸짐. 15번 도로 대대포구 방면, 상사호 지나 흘산교 옆.
③ 일품매우 (061-724-5455):광양 청매실농원의 매실을 먹여 키운 ‘웰빙’ 한우고기. 분위기도 정갈하다. 예약 필수. 순천시내.
④선각당 (061-751-5654):선암사 앞 전통찻집. 스튜어디스 출신 윤보미나씨가 직접 덖어 만든 햇차.
▷ 묵을 곳 :선암사 가는 길에는 식당을 겸한 민박집이 많다.
형제가 운영하는 대락골 (061-754-6021)과 쉬가 (061-751-9131)는 집도 깔끔하고
주인도 친절하다.
상사호 주변 모텔로는 아젤리아호텔 (061-754-6000), 장군봉모텔 (061-754-5415), 로즈모텔 (061-751-9171) 등.
낙안읍성 인근에 새로 지은 낙안민속 자연휴양림 (www.huyang.go.kr·061-754-4400)에선 야영장을 4000원에 사용할 수 있다.
휴양관은 7평형 방이 4만4000원. 낙안읍성 안에 있는 초가집들도 대부분 민박을
겸한다.
857번 도로변에 낙안온천 (061-753-0035)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