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읊어 보니2995 [1169] 물미 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 고두현 물미 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고두현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 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 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 2011. 11. 19. [1168]무식한 놈 / 안도현 무식한 놈 안도현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絶交다 2011. 11. 18. [1167] 별 만드는 나무들 / 이상국 별 만드는 나무들 이상국 설악산 수렴동 들어가면 별 만드는 나무들이 있다 단풍나무에서는 단풍별이 떡갈나무에선 떡갈나무 이파리만한 별이 올라가 어떤 별은 삶처럼 빛나고 또 어떤 별은 죽음처럼 반짝이다가 생을 마치고 떨어지면 나무들이 그 별을 다시 받아내는데 별만큼 .. 2011. 11. 17. [1166]상 위의 숟가락을 보는 나이 / 배영옥 상 위의 숟가락을 보는 나이 배영옥 사람들은 가까운 사이임을 강조할 때 그 집 숟가락 숫자까지 다 안다고들 한다 그 말이 단순히 숟가락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마흔 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 생애는 두레밥상 위에 숟가락을 놓으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사라지고.. 2011. 11. 16. [1165]가을이 가는구나 / 김용택 가을이 가는구나 김용택 이렇게 가을이 가는구나 아름다운 시 한편도 강가에 나가 기다릴 사랑도 없이 가랑잎에 가을 빛 같이 정말 가을이 가는구나 조금 더 가면 눈이 오리 먼산에 기댄 그대 마음에 눈은 오리 산은 그려지리 2011. 11. 15. [1164]등 / 서안나 등 서안나 등이 가려울 때가 있다 시원하게 긁고 싶지만 손이 닿지 않는 곳 그곳은 내 몸에서 가장 반대편에 있는 곳 신은 내 몸에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을 만드셨다 삶은 종종 그런 것이다, 지척에 두고서도 닿지 못한다 나의 처음과 끝을 한눈으로 보지 못한다 앞모습만 볼 .. 2011. 11. 14. [1163]낡은 의자 / 김기택 낡은 의자 김기택 묵묵히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늦은 저녁, 의자는 내게 늙은 잔등을 내민다. 나는 곤한 다리와 무거운 엉덩이를 털썩, 그 위에 주저앉힌다. 의자의 관절마다 나직한 비명이 삐걱거리며 새어나온다. 가는 다리에 근육과 심줄이 돋고 의자는 간신히 평온해.. 2011. 11. 12. [1162]아이를 키우며 / 렴형미 아이를 키우며 렴형미 처녀시절 나 홀로 공상에 잠길 때며는 무지개 웃는 저 하늘가에서 날개 돋쳐 훨훨 나에게 날아오던 아이 그 애는 얼마나 곱고 튼튼한 사내였겠습니까 그러나 정작 나에게 생긴 아이는 눈이 크고 가냘픈 총각애 총 센 머리칼 탓인 듯 머리는 무거워 보여도 물.. 2011. 11. 11. [1161]늦가을 살아도 늦가을 / 문태준 늦가을 살아도 늦가을을 문태준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몰랐지 늦가을을 제일로 숨겨놓은 곳은 늦가을 빈 원두막 살아도 살아갈 곳은 늦가을 빈 원두막 과일을 다 가져가고 비로소 그 다음 잎사귀 지는 것의 끝을 혼자서 다 바라보는 저곳이 영리가 사는 곳 살아도 못 살아본 .. 2011. 11. 10. [1160] 무등茶(차) / 김현승 무등茶(차) 김현승(1913∼1975)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십일월의 긴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 갈가마귀 울음소리로 보아 겨울 문턱이다. 스산한 .. 2011. 11. 9. [1159]구절초의 북쪽 / 안도현 구절초의 북쪽 안도현 흔들리는 몇 송이 구절초 옆에 쪼그리고 앉아본 적 있는가? 흔들리기는 싫어, 싫어, 하다가 아주 한없이 가늘어진 위쪽부터 떨리는 것 본 적 있는가? 그러다가 꽃송이가 좌우로 흔들릴 때 그 사이에 생기는 쪽방에 가을햇빛이 잠깐씩 세들어 살다가 떠나는 .. 2011. 11. 8. [1158]벼 / 이성부 벼 이성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 2011. 11. 7. [1157]사랑했다는 사실 / 이생진 사랑했다는 사실 이생진 사랑에 실패란 말이 무슨 말이냐 넓은 들을 잡초와 같이 해지도록 헤맸어도 성공이요 맑은 강가에서 송사리같은 허약한 목소리로 불러봤다 해도 성공이요 끝내 이루지 못하고 혼자서 맘 타는 나무에 매달려 가는 세월에 발버둥쳤다 해도 성공이요 꿈에서.. 2011. 11. 5. [1156]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 최두석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최두석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무슨 꽃인들 어떠리 그 꽃이 뿜어내는 빛깔과 향내에 취해 절로 웃음짓거나 저절로 노래하게 된다면 사람들 사이에 나비가 날 때 무슨 나비인들 어떠리 그 나비 춤추며 넘놀며 꿀을 빨 때 가슴에 맺힌 응어리 저절로 풀.. 2011. 11. 4. [1155]쑥부쟁이 / 박해옥 쑥부쟁이 박해옥 저녁놀 비끼는 가을언덕에 새하얜 앞치마 정갈히 차려입은 꼬맹이 새댁 살포시 웃음 띤듯하지만 꽃빛을 보면 알아 울음을 깨물고 있는 게야 두 귀를 둥글게 열어 들어보니 내 고향 억양이네 정성스레 냄새를 맡아보니 무명적삼서 배어나던 울엄니 땀내 울먹대는.. 2011. 11. 3. [1154]가을의 시 / 김초혜 가을의 시 김초혜 묵은 그리움이 나를 흔든다 망망하게 허둥대던 세월이 다가선다 적막에 길들으니 안 보이던 내가 보이고 마음까지도 가릴 수 있는 무상이 나부낀다 2011. 11. 2. [1153]그 저녁바다 / 이정하 그 저녁바다 이정하 아는지요? 석양이 훌쩍 뒷모습을 보이고 그대가 슬며시 손을 잡혀 왔을 때, 조그만 범선이라도 타고 끝없이 가고 싶었던 내 마음을. 당신이 있었기에 평범한 모든 것도 빛나 보였던 그 저녁바다, 저물기 때문에 안타까운 것이 석양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지.. 2011. 11. 1. [1152]바코드 / 허영숙 바코드 허영숙 간단한 자기소개서와 이력을 제출하라 한다 A4 용지 한 장의 분량으로 써라 하니 웃음이 나온다 마흔 해의 이력을 A4 용지 한 장에 어떻게 다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초등학교 졸업이 언제였더라 손가락으로 꼽다가 책상 한 쪽 구석에서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는 먹.. 2011. 10. 31. [1151]목수의 손 / 정일근 목수의 손 정일근 태풍에 무너진 담을 세우려 목수를 불렀다. 나이가 많은 목수였다. 일이 굼떴다. 답답해서 일은 어떻게 하나 지켜보는데 그는 손으로 오래도록 나무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못 하나를 박았다. 늙은 목수는 자신의 온기가 나무에게 따뜻하게 전해진.. 2011. 10. 29. [1150]숲과 나 / 류등성 숲과 나 류등성 나는 숲에 들어서면 “나 아닌 나”가 된다. 진한 풀 섶 향기와 솔잎 향기가 되고 날개 짓에 날아오르는 천년의 신비가 되고 인간사 근심 걷어내며 흐르는 청량한 물소리가 된다. 그리하여 몇 발자국 더 들어서면 안개를 지펴내는 햇살의 두런거림이 되고 솔가지 틈을 헤.. 2011. 10. 28. 이전 1 ··· 94 95 96 97 98 99 100 ··· 15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