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홀아비가 내 친구와 열렬히 사귀고 있었다.
그런데 그 홀아비의 며느리가 매주 시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 ?” 라고 항상 똑같은 말로 물었다.
그때마다 그 홀아비는 "지난 밤에는 마지의 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었고,그 전날 저녁에는 우리 집에서 저녁을 함께 즐겼지”라고 대답했다.
어느 날 또 그런 전화를 건 며느리가 시아버지로부터 똑같은 대답을 듣자 이렇게 말했다.
“그러세요 ? 전 정신적인 사랑이라든가 불륜의 연애란 말은 들어 보았지만 주방의 사랑이란 말은 들어 본 적이 없거든요"
시가행진을 구경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인도에 진을 치고 있어서 깨끗한 사진을 찍기는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헛수고만 몇차례 되풀이하고 있는데 한 여자가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림없는 일이라고 내가 막 충고해 주려는 순간 그 여자는 “모두 고개를 숙여욧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여자 앞과 옆에 서있던 구경꾼들은 얼른 고개를 숙였고 지나가는 행렬의 모습이 깨끗하게 눈앞에 나타났다.
재빨리 셔터를 누른 뒤 어리둥절해하는 구경꾼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던지고는 자리를 뜬 그 여자는 모르긴해도 그날의 제일 멋진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의 휴가여행은 수년째 경험하지 못한 무척 더운 날에 끝이 났다.
짐을 꾸려 차의 지붕 위까지 실었다.
한 아이가 병이나 뒷 좌석에 누워 가야 했기 때문에 나머지 세 아이는 중간 좌석에 꼭 끼어 앉았고 나는 갓난 아이를 내 무릎에 앉혔다.
남편은 마지막 여행가방을 차 지붕에 묶은 다음 650km나 떨어져 있는 집으로 차를 몰기 위해 운전석에 앉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내게 돌리며 말했다.
“한가지 미리 말해둘 것이 있는데, 집까지 가는 도중 내가 신경질을 부리더라도 그건 내 진심은 아니니까 그렇게 알라구.”
어린아이 다섯을 이끌고 교외의 새 집으로 이사하자니 꽤 힘이 들었다.
이사한 뒤 어느 날 아침 다섯 살짜리 아들녀석이 학교에 입고 갈 바지를 찾으려고 이삿짐을 뒤졌지만 나오지 않아 더럽히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좋은 바지를 입혀 보냈다.
그날 오후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가 되었거니 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현관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마침 갓난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던 참이라 아래층에 대고, “어서 들어와서 바지를 벗어 !” 하고 소리질렀다.
현관에서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난 지 몇 분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어찌된 일인가 하고 내려가보니 우편물이 현관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타향에서 대학을 다니다 집에 온누이가 어느 날 저녁 애인을 집에 초대했다.
그들이 단 둘이만 있고 싶어한다는 것을 우리 가족들은 모두 알아차렸는데 유독 아버지만 눈치가 없었다.
아버지는 누이의 애인에게 새로 산 카메라를 보여주려고 두 사람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더니 아버지는 새로 산 낚싯대를 가지고 왔고 그 다음에는 새로 산 엽총을 들고 나왔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그런 새 '장난감들'에 대해 어쩌구저쩌구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아버지를 부엌으로 밀어넣고는 “오래간만에 만난 아이들인데 왜 단둘이 있게 내버려두지 않는거예요 ?” 하고 나무랐다.
“그건…..나도 저 친구를 오래간만에 만났다구 !"
장례식이 끝난 뒤, 어렸을 땐 손도 댈 수 없었던 아버님 책상을 정리하게 되었다.
아버님이 항상 지니셨던 다 해진 노트를 발견하고 '빨간 색 자전거' '롤러 스케이트' '탄생석 반지' '굽 높은 구두' 같은 것이 적혀 있는 그 노트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뭐든지 갖고 싶은 것이 생각나면 나는 아빠더러 그걸 사 달라고 했다.
아빠는 내 청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시다가 그 노트를 꺼내 원하는 물건의 빛깔, 크기, 값, 그리고 꼭 갖고 싶어하는 이유가 뭔가 등 자세한
내용을 모두 적으셨다.
그리고는 노트를 덮고 나를 빤히 바라보시며 말씀하시곤 했다.
“그럼, 다음 번 아빠가 뉴욕에 나가면 그걸 꼭 사 오마."
경제대공황이 휩쓸던 30년대에 시골 구석에서 조그만 농장 하나로 생계를 꾸려 나가야 했던 분께는 오만 가지 것을 다 갖겠다고 하는
딸아이의 욕심 정도는 하찮은 일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님은 그 조그만 꿈과 이야기들을 꼬박꼬박 듣고 적어 놓으심으로써 내 장래의 기틀을 잡아 주셨다.
나로 하여금 현실과 환상을 구별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이다.
아버님이 결코 뉴욕에 가지 못하시리라는 것을 나는 내심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아버님이 매사에 귀를 기울여 주셨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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