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원에서 미용실을 하는 박모(65)씨는 요즘 자신의 미용실이 아닌 인근 미용 학원으로 출근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월급을 받는다. 미용실은 6개월째 ‘개점휴업’이다. 
미용실 월세와 대출 원금·이자 상환에 매달 600만원이 들어가는데 워낙 장사가 안되니 인근 미용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다. 박씨는 “가게 문 닫고 싶은데 돈이 없어 못 한다”고 했다. 
폐업하면 대출금 일부를 조기 상환해야 하는 데다가 앞으로 정부의 원리금 상환 유예 같은 소상공인 금융지원도 못 받기 때문이다. 
박씨는 “매장 철거 비용도 수백만 원이고, 집기를 팔아봤자 10분의 1 가격밖에 못 받아 월세를 내더라도 가게를 그대로 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고 했다.

 

 


<17일 경남 창원시 성산구의 한 미용실 입구에 신용카드 명세서, 관리비 고지서, 대출 전단 등이 놓여 있다. 
6개월째 휴업 상태인 이 미용실처럼 더는 가게를 운영할 수 없는 상황에도 대출 상환이나 정부의 금융 지원 중단, 철거비 같은 비용 부담 때문에 폐업하지 못하는 ‘좀비 자영업자’가 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란 전례 없는 위기를 겨우 넘기고 엔데믹을 맞은 소상공인들이 더욱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다. 
대출받고, 원리금 상환을 유예하며 간신히 버텼지만,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자영업자 대출 연체율은 2년 새 3배 이상으로 뛰었고, 연체액은 1년 만에 10조원 가까이 급증했다. 폐업도 역대 최대다. 
소기업‧소상공인을 위한 공적 공제제도 ‘노란우산’의 폐업 사유 공제금 지급 건수는 지난해 11만15건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자영업자의 현실은 이런 지표보다 훨씬 심각하다. 
장사를 접을 만큼 상황이 안 좋지만, 폐업조차 못 하는 자영업자가 급증하고 있다. 
이들은 폐업도 못 하는 스스로의 처지를 ‘좀비’에 비유하기도 한다. 
대출금 상환 부담, 고물가로 늘어난 폐업 비용 탓에 적자를 감수하면서 가게를 유지하는 것이다. 
영업시간을 줄여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손해를 보면서 가게 문을 여는 예비 폐업자도 많다. 
자영업자들 사이에선 “링거 맞다가 인공호흡기로 연명했는데, 이젠 호흡기 뗄 날만 기다린다”는 말까지 나온다.

 

 




세종시에서 노래방을 하던 A(41)씨는 올 초 노래방을 접고 푸드 트럭을 운영 중이다. 
지난해 노래방을 폐업하려 했지만, 건물 복구를 위한 철거 비용만 500만원이었고, 대출 연체금 갚을 형편도 안 돼 월세를 내며 수개월을 버틴 끝에 겨우 인수자를 찾았다. 
A씨는 “폐업도 자금 사정이 좋아야 할 수 있는 배부른 소리”라며 “운 좋게 노래방 인수자를 찾아 넘길 수 있었지만, 대출금은 수개월째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될 위기”라고 했다.



자영업자들이 장사가 안되는데도 폐업을 못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출금 때문이다. 
상당수 자영업자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쏟아진 정부와 시중은행의 저리 대출로 연명하며 영업을 이어 왔다. 
‘대출 돌려막기’로 버텨온 자영업자도 상당수다. 
폐업해도 정부나 시중은행의 정책 자금 대출은 일시 상환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자영업자 중에선 정책자금 외에 제2금융권 같은 곳에서 돈을 빌린 경우가 많다. 
또 폐업 이후에는 낮은 금리로 자영업자에게 대출해 주는 상품이 나와도 ‘갈아타기’가 어렵고, 사업자 대출은 더 이상 받을 수 없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한꺼번에 대출금 전부를 갚지 않더라도 폐업하면 정부가 수시로 내놓던 ‘자영업자 금융 지원’ 혜택을 받을 수 없고, 신규 대출도 막혀 당장 생활비나 재기 비용을 마련하기 어렵다”고 했다.

 

 




자영업자 대출 잔액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또 금융회사 3곳 이상에서 대출을 받은 다중 채무 자영업자, 수개월 이상 연체한 자영업자도 급증하는 추세다. 
양경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NICE평가정보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3월 기준 자영업자 대출 잔액은 1113조원으로 코로나 직전인 2019년 말보다 50% 늘었다. 
이 중 3개월 이상 연체된 금액은 계속 증가해 31조원에 달했다. 
자영업자들이 갚지 못한 대출을 신용보증재단이 대신 갚아준 금액도 지난 한 해 1조7126억원으로 전년(5076억원)의 3배 이상으로 불었다.


물가 상승 탓에 폐업에 드는 비용도 늘었다. 
시설 철거 비용과 함께 밀린 임차료나 원재료비, 키오스크·공기청정기 등 렌털 기기 위약금까지 부담해야 한다. 

서울의 한 철거업체 김지한(42) 대표는 “10평 카페 철거 비용이 100만~150만원인데, 임대인 요구에 따라 전기 공사, 벽면 페인트 공사까지 하면 600만~700만원이 들기도 한다”며 “정부가 철거 지원금 일부를 지원하지만, 턱없이 부족하다”고 했다. 
대구의 한 철거업체 권모(44) 대표는 “1t 폐기물을 트럭으로 옮기는 비용이 지난해 25만원에서 올해 40만원이 됐다”고 했다. 
서울 동대문구의 한 라멘집 사장은 “리스한 키오스크 한 대 계약을 조기 해제하겠다고 하니 위약금 200만원을 내라고 하더라”라고 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 따르면, 소상공인 폐업 비용은 2022년 평균 2323만8000원으로, 전년(557만원)의 약 4배로 늘었다.


‘좀비 자영업자’는 폐업 대신 영업시간을 단축하고 다른 곳에서 아르바이트하거나, 개점휴업 상태로 월세를 내며 새로운 직장을 찾는다. 
대출 문제에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업종을 바꿔 개인사업자 자격을 유지하기도 한다. 

서울 송파구에서 12년째 찌개 전문 음식점을 운영하는 이모(62)씨는 “지난해 직원을 다 내보냈고, 아내와 둘이 일하는데 올해 초부터 점심이 지나면 아내는 인근 식자재 마트에서 일한다”고 했다. 
자영업자들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오후 일찍 가게 문을 닫고, 저녁엔 다른 곳에서 일을 한다”며 “폐업하지 않고 다른 곳에 이력서 넣으며 버티겠다” 같은 글이 올라오고 있다.


중기중앙회의 노란우산 공제는 폐업 이후 삶을 준비하기 위한 자영업자 퇴직금인데, 줄곧 연간 3만건대에 머물던 해약 건수가 2022년 4만4295건, 지난해 7만1461건으로 증가했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수출 경기가 살아나면서 대기업 중심으로 상황이 나아지고 있지만, 소상공인·자영업자 관련 지표는 계속 나빠지고 현실은 더 심각하다”며 “자영업자가 폐업하면 당장 생활비 문제뿐 아니라 친구 등 사회적 관계가 모두 단절돼 큰 어려움을 겪는데, 이들의 재기나 재창업을 돕는 지원책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말했다.(24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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