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부터 55년 동안 한반도 영공을 수호한 ‘하늘의 도깨비’ F-4 팬텀 전투기가 다음 달 7일 퇴역을 앞두고 지난 9일 국토순례비행을 했다. 
수원 기지에서 출발해 대구에서 재급유를 하고 대구에서 다시 수원으로 돌아오는 약 3시간 15분 동안 팬텀은 그동안 지켜온 한반도에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앞으로 자신을 대신해 우리 영공을 수호할 KF-21 ‘보라매’와 편대 비행을 하며 임무 교대를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본지를 포함해 취재진 4명이 팬텀의 고별 비행에 탑승했다.

 

 


<55년 영공 수호 임무 끝냅니다, 굿바이 팬텀 - '하늘의 도깨비' F-4 팬텀 편대 4기가 9일 국토 순례 비행 중 부산 송정해수욕장 상공을 날고 있다. 
1969년 도입 후 55년 동안 우리 영공을 지켜온 팬텀은 다음 달 퇴역을 앞두고 고별 비행에 나섰다. 
한국은 당시 세계 최강 전투기였던 팬텀의 4번째 운용국이 되며 북한 공군력을 압도할 수 있었다. 
이날 본지 기자가 탑승한 팬텀기는 1975년 국민들이 낸 방위 성금으로 구입했을 당시 모습인 정글 위장 무늬로 도색했다.>

 



비행이 시작된 경기도 수원의 공군 10전투비행단 기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활주로에 늘어선 회색 F-4E 팬텀 사이에서 정글 위장을 한 4호기가 눈에 띄었다. 
1975년 전 국민이 모은 방위성금 71억원으로 미군에서 인수한 F-4D 5대를 기리는 뜻으로, 당시와 똑같은 무늬로 새로 도색한 것이다. 
IMF 금 모으기 운동 20여년 전에 우리 국민은 국토를 지키겠다고 십시일반 돈을 모았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 돈으로 1969년부터 미국으로부터 우리 공군이 무상임대 중이었던 F-4D 6대 중 5대를 구입했다. 
당시 F-4D는 현재의 F-35 스텔스 전투기에 비견되는 압도적 능력으로 남북한 공군 전력을 역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후로 우리 군은 팬텀 계열 기체(F-4D·F-4E·RF-4C) 190여 대를 운용해왔다. 
이번에 마지막으로 퇴역하는 F-4E는 ‘노인 학대’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을 정도로 40년 넘게 현역으로 뛰었다.


사다리를 올라 후방석에 앉자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계기판, 백미러, 레이더 스위치 및 각종 결속 도구는 때가 타고 도색이 벗겨져 있었다. 
이 후방석에 전천후 전폭기 팬텀이 당시 ‘게임체인저’로 우리 공군력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한 이유가 담겨 있다. 
무기통제사로 불리는 후방석 조종사는 레이더 운용, 좌표 입력, 공대지 레이저 유도 폭탄(LGB) 조준 등 무장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는다. 
팬텀 후방석 조종사로 830시간을 비행한 이성진 대구 제11전투비행단 부단장(대령)은 “공대지 미사일 팝아이를 비롯해 최대 8480kg의 무장을 탑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공군 관계자는 “팬텀이 수원 기지에 배치된 이후 북한이 전투기의 도발이 크게 위축됐다”고 했다.

 

 




이날 비행은 팬텀 4기 편대가 과거 팬텀이 활약했던 전적지를 찾는 것으로 시작했다. 
소련 폭격기 TU-16(1983년), TU-95와 소련 핵잠수함(1984년) 등 공산 세력이 우리 동해를 침범했을 때 맹활약을 펼쳤던 동해, 1971년 국토 최서남단 가거도(소흑산도)에 출현한 북한 간첩선 격침 작전에 참가했던 남해 등을 두루 찾았다.

 

 

<F-4 팬텀 편대 4기와 국산 초음속 전투기 KF-21 2기가 9일 델타(Δ) 대형으로 남해 상공을 비행했다. 
좌우 꼭짓점에 있던 KF-21 2기가 전남 고흥 앞바다에서 각각 급선회하며 대형에서 이탈하자 팬텀 편대가 플레어(미사일 회피 섬광)를 발사해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대구에서 연료 재급유를 마치고 다시 날아오른 사천에서 펼쳐졌다. 
대구에서 이륙하고 10분가량이 흐르자 경남 사천에서 날아오른 한국형 초음속 전투기 KF-21이 팬텀 편대에 합류했다. 
수신기 너머로 KF-21을 뜻하는 ‘보라매’라는 콜 사인이 들려왔다. 팬텀과 KF-21은 델타(Δ) 대형을 이뤘다. 
팬텀 편대장 ‘파파1′이 선두에, KF-21이 좌우 꼭짓점에 섰다. 가운데에서는 방위성금 헌납기 도색을 한 팬텀4호기가 비행했다. 
국토순례비행 장면을 촬영하기 위한 F-15K 2기는 수시로 위치를 바꿔가며 이 장면을 촬영했다.


공군의 과거(팬텀), 현재(F-15K), 미래(KF-21)가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1969년부터 한반도를 지켜온 팬텀, 팬텀이 은퇴하면 장거리 공대지 타격 역량을 물려받아 북핵을 억지하는 ‘킬체인’의 핵심 역할을 수행할 F-15K, 앞으로 팬텀의 빈자리를 채울 우리 기술로 개발한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 KF-21 8대가 경남 합천에서부터 사천을 거쳐 고흥 나로도까지 함께 날았다. 
눈 아래로는 삼천포대교, 여수 거북선대교, 한려수도가 펼쳐졌다.



 

<'하늘의 도깨비' 탄 기자 - 본지 양지호 기자가 정글 도색을 한 팬텀에 타고 국토 순례 비행을 마친 뒤 수원 기지에 착륙해 손을 흔들고 있다.>


고흥 상공에서 KF-21은 우측으로 급선회하며 이탈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조심히 복귀하십시오.” 대선배에게 후배가 보내는 헌사로 들렸다. F-4는 떠나가는 KF-21에 플레어(미사일 회피용 섬광)를 사출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가거도에서 서해를 따라 북상한 팬텀 편대는 새만금방조제를 지나 군산앞바다에서 수원 기지를 향해 동쪽으로 마지막 급선회에 나섰다. 팬텀 편대는 급선회와 함께 축포처럼 플레어를 터뜨렸다.


대구 기지에서 이륙한 지 약 1시간 30분 만에 공군 수원 기지에 착륙했다. 
기지를 둘러싼 아파트 숲이 눈에 들어왔다. 공군 관계자는 “도시가 확장하며 대구기지·수원기지 인근까지 아파트가 들어섰다. 팬텀 도입 이후 우리가 이뤄낸 번영의 방증인 셈”이라고 했다.


퇴역한 팬텀은 전국 곳곳에서 전시되거나 적 세력의 유도탄이나 각종 탐지 장비를 교란하기 위한 디코이(유인물)로 활주로 인근 등에 배치될 예정이다. 
퇴역식은 다음 달 7일 수원 기지에서 열린다.(24051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