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낮 12시 5분 전북 완주군 이서면 행정복지센터.
이곳에 인감증명서를 떼러 왔던 서모(40·회사원)씨는 ‘점심시간 휴무제 실시’라는 안내문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
이서면 행정복지센터는 낮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 민원실 운영을 전면 중단하는 ‘점심시간 휴무제’를 이날부터 시작했다.
이 시간에는 무인 민원 발급기가 업무를 대체했다.
서씨는 “점심시간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엔 공감하지만 인감증명서는 무인 발급기에서 뗄 수 없어 다음에 따로 시간을 내야 하기 때문에 번거로운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이날 일부 공무원은 낮 12시 이전에 와 있던 민원인을 상대하느라 12시 20분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한 공무원은 “이미 와 있는 민원인을 나가라고 할 수 없는 일”이라며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발생하면 제도 도입 취지가 무색해질 것”이라고 했다.
<지난 2일 낮 12시 25분쯤 전북 완주군 이서면 행정복지센터 민원실에 ‘점심시간 휴무제 실시‘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근무하는 공무원들도 보이지 않는다. 이서면 행정복지센터는 이날부터 점심시간 휴무제를 시작했다>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점심시간 휴무제를 도입하는 곳이 늘면서 찬반 논란도 커지고 있다.
공무원들은 점심시간을 온전히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하고 있다.
하지만 점심시간 외에는 관공서를 방문하기 힘든 민원인이나 무인 민원 발급기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층 등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지방공무원 복무 규정에 따르면 공무원의 점심시간은 낮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 1시간 보장된다.
그동안 지자체 민원 부서 등은 업무 특성에 따라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2시까지 점심시간을 유동적으로 운영하며 교대 근무를 했다.
하지만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편하게 점심 먹는 게 어렵다는 불만이 계속 제기됐다.
이에 일부 지자체는 휴식권을 제대로 보장한다는 취지에서 지자체장의 재량에 따라 점심시간 휴무제를 도입했다. 현재는 지자체장의 재량에 따라 할 수 있지만 ‘민원 처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으로 올해 4월 1일부터는 조례를 개정해야만 점심시간 휴무제를 할 수 있다.
3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에 따르면 지난 2017년 경남 고성군에서 처음으로 점심시간 휴무제를 도입한 뒤 지금까지 기초자치단체 226곳 중 64곳(28.3%)에서 점심시간 휴무제를 전면 또는 부분 시행하고 있다.
올해 들어 도입한 곳도 많다.
전남 목포시와 울산 동구가 지난 1월부터 이 제도를 도입했고, 부산 강서구도 지난달부터 동참했다.
경남 창원시, 충남 서천군은 다음 달 시행을 앞두고 있다.
지자체 공무원들은 도입을 반기고 있다.
전북 지역 한 공무원은 “그동안 민원인 편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법에서 보장하는 휴식권을 빼앗겼다”며 “무인 민원 발급기나 인터넷을 이용해 비대면으로 처리할 수 있는 업무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초기에 혼란이 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조창현 전공노 대구지역본부장은 “점심시간에 교대 근무를 한다고 공무원들이 1~2명만 남아있을 경우 악성 민원에 노출될까 불안해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시민들에게 보다 질 좋은 민원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점심시간 휴무제는 필요하다”고 했다.
반면 반대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전북 완주에 사는 이모(75)씨는 “무인 민원 발급기 이용에 어려움을 겪는 노인들은 어떻게 하나”라며 “노인이 많은 시골 지역에서는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했다.
송모(60·완주)씨도 “그동안 점심시간을 이용해 관공서 업무를 봤다”며 “이제는 업무 중에 눈치 봐서 회사를 일찍 빠져나오거나 휴가를 내야 할 판”이라고 했다.
인감증명서 등 비대면으로 처리할 수 없는 민원 업무가 있다는 것도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런 논란 때문에 제도 도입을 검토하다 중단한 지자체도 있다.
대구 지역 8개 구·군은 당초 4월부터 9월까지 점심시간 휴무제를 시범 실시한 뒤 10월에 지속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었다.
하지만 대구 구청장·군수협의회는 지난달 21일 회의를 열고 반대 여론을 고려해 점심시간 휴무제 시행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반면 점심시간 휴무제가 자리를 잡은 곳도 있다.
전북 남원시는 2021년 1월부터 읍·면 지역부터 시작해 지난해 7월에는 전 지역으로 확대했다.
무인 민원 발급기를 빠르게 보급하고 고령층에게 사용법을 안내해주면서 혼란을 막았다.
남원시 관계자는 “점심시간에 관공서를 이용하는 민원인이 많이 줄었다”고 했다.
임성진 전주대 행정학과 교수는 “공무원들에게 무조건 봉사만을 강요할 수는 없다”면서도 “점심시간 휴무제 시행 전 민원인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는 조치가 우선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23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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