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용 비행기를 가진 사람들이 자주 위스컨신주 다지빌공항에 날아와 내가 일하고 있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곤 했다.
한번은 한가족 네 사람 一 남자 어른, 그의 부인,아들,그 남자의 어머니一이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왔다.
그 사람들이 숙박기록을 하고 있는 동안, 내가 남자에게 혹시 비행기 연료가 필요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조종사가 아니라서 알 수 없노라고 대답했다.
나는 내가 실수를 했구나 생각하고 부인 쪽을 보며 “제가 잘못 알았군요” 했더니 그 부인이 “나도 조종사가 아네요” 했다.
이때 조종사가 자기 소개를 했다.
조종사는 바로 할머니였다.
아내와 두 살난 딸을 데리고 백화점에 갔다.
계산대에서 일하는 젊은 여직원은 가슴이 깊게 파인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고 눈에 띄게 풍만한 가슴의 소유자였다.
수표를 내자 그 여직원은 나의 운전면허증에 적힌 이름과 주소 등을 적기 위해 몸을 앞으로 굽혔고 터질 것 같은 젖가슴은
더욱더 내 눈길을 끌었다.
바로 그때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것을 보는 것은 괜찮지만 만져서는 안돼 ! ”
이크 하고 돌아보니 아내는 가까운 진열대에 쌓아둔 물건을 만지려는 딸 아이를 타이르고 있는 게 아닌가.
남편 마이클과 내가 레스토랑에서 남편의 직장상사와 식사를 함께 했을 때의 일.
그 상사는 다소 엄격한 인상의 나이든 사람이었다.
남편이 전에 했던 이야기를 또 꺼내길래 나는 식탁 아래로 남편을 한번 찼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어 또 한번 발로 쿡 찔렀다.
그래도 남편은 그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그이는 갑자기 얘기를 멈추더니 쑥스러운 둣 웃으며 말했다.
“오,이 이야기는 전에 했던 것이군요, 그렇죠 ? ”
우리는 그냥 웃어 넘기고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나중에 그이와 춤을 출 때 왜 말귀를 알아듣는데 그렇게 오래 걸렸느냐고 물었다.
“무슨 소리야?” 남편이 대꾸했다.
“당신이 발로 찼을 때 금방 그만두었잖아. ”
"그렇지만 두 번이나 찼는데도 그만 둘 때까지는 또 한참 걸렸잖아요. ”
우리는 갑자기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깨닫고 겸연쩍은 얼굴로 다시 테이블로 돌아갔는데 남편의 상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두번째 찼을 때 나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소. 그래서 내가 마이클에게 패스했지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어느 날 밤이었다.
친구와 함께 대학에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휘발유가 떨어지고 말았다
눈 속에서 덜덜 떨면서 무한정 기다린 우리는 지나가는 차를 간신히 얻어타고 주유소로 갔다.
우리의 궁한 사정을 이야기 하고 휘발유 한 통을 구하여 대금을 치르는데 주유소 종업원이, “통값의 보증금으로 5달러를 더 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사람을 믿지 않는 데 화가 났지만 마지 못해 5달러를 더 지불하고,다시 우리 차가 있는 곳까지 가야할 일을 걱정하면서 문쪽으로 향했다.
그때 눈보라가 날리는 바깥 풍경을 응시하던 그 종업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날씨에 나들이를 해서는 안되지.”
그리고는 우리쪽으로 돌아서며 자기 주머니에서 꺼낸 열쇠를 내밀었다.
“내 차를 타고 가시오"
미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항공여행중 나는 한 친구가 가르쳐준 대로 비행공포증을 잊는 방법을 시험해 보았다.
스튜어디스에게 잡지 한 권과 종이 몇 장, 연필 한 자루를 달라고 해서 잡지 기사의 단어 하나 하나를 종이에 베끼기 시작했다.
지루한 일이었으나 두려움을 잊는 데는 그만이었다.
몇 개의 기사를 베끼고 나자 그 스튜어디스가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손님의 절약 정신에 탄복했습니다. 그 잡지를 그냥 갖고 가세요. 저희 회사에서 기증하겠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조그마한 농가에서 열 한 남매 가운데 한 아이로 태어나셨다.
문자그대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는 가정인지라 아이들의 생일까지 신경쓸 형편이 못되었다.
우리 어머니의 생일은 기록되지 않았고 따라서 어머니는 정확한 나이를 모르셨다.
연로해지신 어머니는 우리 내외와 함께 살러 오셨는데 우리는 어머니가 한번도 생일잔치상을 받아보지 못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파티용 뿔 피리, 모자,양초 따위를 마련했고 아이들은 선물을 준비했다.
모든 준비를 조용히 끝낸 다음 어머니께 아래층으로 내려 오시라고 했다.
“놀라셨지요 ! 생일 축하 합니다 ! ” 우리들은 환성을 질렀다.
어머니는 생일상 앞에 앉아 기쁨을 못 이기고 눈물을 흘리셨다.
일흔이나 되어서 처음으로 생일상을 받으신 것이었다.
그 이후 우리는 적당한 때라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생일잔치를 열어 드렸다.
어떤 때는 일 년에 두 번이나 열어 드렸다.
그럴 때 어머니는 은근한 어조로 항의하시곤 했다.
"벌써 올해 생일상을 받았잖니.”
“그렇지만 어머니, 이제까지 못받으신 것을 다 메꾸어 드려야지요.”
우리는 이렇게 말씀드리곤 했으나 실행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흔 살에 돌아가셨고 우리는 생일잔치를 25번밖에 열어드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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