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형 할인점 트레이더스에서 최근 한 달(4월 21일~5월 26일) 동안 매출이 70%가량 급증한 품목이 있다. 칼과 도마다.
지난 13일 롯데홈쇼핑에선 방송 시작 25분 만에 준비한 수량 8700개, 5억원어치가 완판된 품목이 나왔다. 주방 가위였다. 셋 모두 부엌에서 쓰인다는 게 공통점이다.
부엌이 부활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엌의 실종’이 화두였다.
배달 음식이나 간편식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아파트 평면에서 부엌이 추방되고 대신 거실이 확장됐다.
부엌에서 음식을 안 해먹다 보니 불[火]이 사라져 “요즘 가정집에선 케이크 초 꽂을 때 정도만 불을 피운다”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외식 물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자 ‘외식 포비아(공포증)’를 호소하는 사람이 늘면서 부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유통 업계 입장에선 부엌 관련 매출이 급증하면서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는 미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 폭스비즈니스는 지난 24일 “미국인 68%는 가격 부담 탓에 외식 대신 식재료 구입을 택하고 있다”는 설문 결과를 보도했다.
29일 롯데홈쇼핑에 따르면 지난 1~2월 대비 3~4월 주방용품 주문액은 80% 이상 증가했다.
지난달 27일 오전 9시 20분에 압력솥을 파는 방송을 했는데, 60분 동안 15억원어치가 완판됐다.
생활용품점 다이소에 문의해보니 올해 칼과 도마 판매량은 작년과 비교해 각각 30%, 20% 늘었다.
칼·도마·주방 가위 같은 주방용품만 잘 팔리는 게 아니다. 식재료도 마찬가지다.
대용량 제품을 주로 파는 트레이더스의 4월 1일~5월 26일 매출을 분석해보니 당근은 127.9%, 오이와 팽이버섯은 각각 44%, 40.8% 늘었다. 잡곡 매출도 43% 뛰었다.
같은 기간 이마트에서도 양배추 매출은 88.8%, 냉동 채소 61%, 닭다리 살 77.1%, 찹쌀 65.9% 늘었다. 집에서 직접 밥을 해먹지 않으면 살 필요가 없는 품목들이다.
대형 마트 관계자는 “과거에는 식재료를 사봤자 버리는 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며 “채소 값 인상 뉴스에 사람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그 증거”라고 말했다.
최근 식재료 값도 많이 올랐다. 그래도 외식 물가 오른 것과 비교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대형 마트 관계자는 “식재료 가격보다 외식 물가 상승 폭이 더 크다 보니 간단하게라도 집밥을 해먹는 트렌드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외식 물가 상승률은 3.0%로 소비자물가 상승률(2.9%)보다 0.1%포인트 높았다.
외식 물가 상승률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웃도는 현상은 2021년 6월 이후 35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자취를 감출 것 같았던 ‘집밥 트렌드’가 돌아오면서 유통 업계는 분주하게 대응하고 있다.
롯데마트는 30일 의왕점을 새로 단장해서 선보이는데, 기존 절반 정도였던 식품 매장 면적을 70%로 확대했다.
온라인 반찬 배송 업체 집반찬연구소는 최근 멸치볶음, 메추리알 간장조림, 볶음김치 등 9종을 묶은 상품을 내놓았다.
이 회사 박종철 대표는 “원래는 4인 가구에 맞춰 반찬을 준비하고 판매를 해왔는데, 최근 배달 주문이나 외식을 주로 하던 1~2인 가구에서도 집밥 트렌드가 나타나 새 상품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유튜브에선 직장인들이 3~5일 치 식사를 미리 준비해 놓는 이른바 ‘밀프렙(meal prep)’ 영상이 쏟아지고 있다.
집밥을 찾는 현상은 글로벌 트렌드다.
미국 폭스비즈니스가 보도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18~42세 중 71%는 “집에서 식사하는 횟수를 늘리고 외식을 줄였다”고 답했다.
지난달 미국의 식료품 가격은 1.1% 올랐는데, 외식 물가는 4.1% 오른 것으로 집계됐다.
세계 최대 소매 업체 월마트는 월가의 예측을 뛰어넘는 호실적을 내고 있다.
지난 16일(현지 시각) 열린 콘퍼런스콜에서 월마트 CFO 존 데이비드 레이니는 “외식 대신 집에서 요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 실적에 도움이 되고 있다”며 “외식을 하는 건 집에서 밥을 먹는 것보다 4.3배 비싸다”고 말했다.
월마트는 지난달 30일 자체 식료품 브랜드를 공개하기도 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저성장 속에서 실질소득이 오르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상당 기간 내식 트렌드가 이어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24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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