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전남 함평의 약 1300㎡ 규모 마늘밭에서 만난 농부 서병종(73)씨는 자잘한 마늘 뿌리들을 손에 쥔 채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마늘 줄기가 하나로 굵게 뽑히지 않았고, 대신 여러 줄기로 잘게 쪼개져 있다. 마늘 알도 자잘한 알갱이들에 그쳤다.
‘벌마늘’, 즉 마늘대가 ‘쩍 벌어졌다’는 뜻의 농사 망친 마늘이다.
올해 서씨 밭의 90%가 이 모양이다. 예년에는 밭의 5%도 벌마늘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서씨는 “40년 농사지으면서 이렇게 벌마늘이 많이 생긴 건 처음 있는 일”이라며 “(농사 망친) 마늘을 다 걷으려면 일당 15만원짜리 인부를 3명은 써야 한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고 했다.
<지난 10일 전남 함평 한 마늘밭에서 발견된 벌마늘.
줄기가 여러 갈래로 쪼개진 벌마늘은 알 크기가 자잘해 '농사 망친 마늘'에 해당한다.>
전남과 경남 등 남부지방과 제주 등지의 마늘 농가들에 올해 심각한 벌마늘 피해가 닥쳤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이달 초부터 벌마늘을 농업 재해로 인정하고 재난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고, 각 지자체는 피해 접수에 나섰다.
전남도와 경남도는 마늘 등 기후 피해 작물에 대한 신고 접수를 오는 20일까지 연장했다고 16일 밝혔다.
전남도 관계자는 “평년 전체 마늘밭의 2~3% 수준이던 벌마늘 신고가 올해 30% 이상으로 급증했다”고 했다. 남부 지역보다 수확 시기가 빠른 제주도에선 이미 벌마늘이 전체 마늘밭의 50% 이상 나타난 곳도 있다.
벌마늘은 점차 북상해 최근에는 전북 완주에서도 나타났다.
정상적인 마늘은 굵은 줄기 하나로 자라고, 알차다. 반면 벌마늘은 알이 다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2차 생장을 하면서 줄기가 벌어진다.
마늘은 한 번 생장해 6~9쪽으로 갈라져야 하는데, 두 번 생장하면 11~12쪽으로 분화해 자잘한 알이 다닥다닥 붙은 모양이 된다.
벌마늘은 먹어도 문제없지만 알이 작아 상품 가치가 크게 떨어진다.
최근 벌마늘이 늘어난 것은 고온다습했던 올겨울 날씨와 빈번한 봄비 등 이상기후 탓이다.
마늘은 보통 9월에 심어 다음 해 봄까지 겨울을 나는 월동 작물로, 겨울철 기온과 강수량에 무척 민감하다.
특히 남부 지역에서 주로 재배하는 난지형 마늘은 겨울 기온이 높으면 알이 잘 크지 않는다.
지난겨울은 기온이 계속 높았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 2월 광주광역시 평균 기온은 영상 6.1도로 최근 10년 새 가장 높았다.
여기에 최근까지 봄비가 내리는 등 흐린 날이 많아 일조량도 적었다.
지난 1월부터 지난 14일까지 광주의 누적 강수량은 400.3㎜로 2016년(439.6㎜) 이후 처음 400㎜를 넘었다.
농림부는 벌마늘 피해 농가에 피해 정도에 따라 1㏊(헥타르·1만㎡) 기준 농약값 250만원, 대체 파종비 550만원 등을 지원할 예정이다.
하지만 농민들은 “한 해 농사에 들인 비용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함평에서 밭 1만4200여㎡에 마늘 농사를 지은 김병덕(61)씨는 “들어간 비료값, 병해충 약값, 인건비 등이 막대하다”며 “직장인으로 치면 연봉을 통째로 못 받게 된 셈인데 정부가 피해 마늘을 수매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주면 좋겠다”고 했다.
최근 각종 농산물 가격 상승에 기후 피해까지 겹치자, 장기적인 농산물 수급과 비축 시스템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배정섭 전남서남부채소농협 조합장은 “당장 올해 국내 마늘 생산량이 줄면 중국산 수입을 늘릴 텐데 그렇게 되면 국산 마늘은 앞으로 계속 경쟁에서 밀리는 악순환에 처할 수밖에 없다”며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기후 재난에 대비해 농산물 비축 시스템도 다시 짜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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