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의 미학, ‘미니멀리즘’의 대표 주자 jasper morrison
영국 런던 고성연 기자 / 2010년 2월 vol.39
넓혀가는 디자이너는 흔치 않다.
의자로 대표되는 그의 디자인 세계는 첨단 디지털 기기부터 가전은 물론 주방 소품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다채로운 편이다.
삼성전자와의 작업 덕에 한국이 무척 친숙하다는 모리슨과의 인터뷰는 영국인 특유의 자조적 유머가 가미된 그의 명쾌한 언변으로
인터뷰 내내 적당한 긴장감과 함께 유쾌함을 자아냈다.
평범함 속에 빛나는 비범한 아름다움, ‘슈퍼 노멀(Super Normal)’의 이상을 추구하다
재스퍼 모리슨(50)은 어떨 땐 ‘참 수수하다’ 싶을 정도로 극도로 절제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디자이너다.
의자든 그릇이든 냉장고든 그의 디자인에선 기교 어린 장식이나 무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군더더기 없는 그의 디자인을 놓고 ‘심심하다’는 둥 ‘평범하다’는 둥 비판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회의론자들보다는 ‘재스퍼 모리슨표’ 디자인에 오랜 연정을 품어온 추종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그의 팬들이 주장하듯 언뜻 보기엔 소박하지만 매일 마주해도 질리지 않은 순도 높은 정겨움과 우아한 단순미를 표출해내는 건 결코 녹록한 경지가 아니다.
그가 즐겨 쓰는 표현대로라면 바로 ‘슈퍼 노멀(Super Normal)’에 근접하는 수준일 터다.
‘평범 속의 비범’을 뜻하는 슈퍼 노멀은 모리슨이 자신의 친구이자 명성 높은 일본의 산업디자이너 후쿠사와 나오토와 함께 설파해온 개념이다.
의도적인 외형상의 화려함을 배제하고 형태와 기능, 감수성의 삼박자를 균형 있게 갖춰 일상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는 디자인을 지향하자는 데
뜻을 모은 이들은 2006년 도쿄와 런던에서 <슈퍼 노멀>전(展)을 공동 개최했고 동일한 제하의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한국에도 최근 번역서가 출간됐다).
모리슨에게 직접 설명해 달라고 하니 “동시대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영향을 준 건 기쁘지만 사실 슈퍼 노멀은 이미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라며 “우리가 한 일은 이름을 붙인 것뿐”이란다.
최근 런던의 새로운 문화 중심지로 떠오른 북동부 해크니에 자리 잡은 그의 스튜디오는 ‘주인’의 디자인을 닮아서인지 정갈하고 세련된데다
편안한 느낌이 묻어났다.
그야말로 ‘슈퍼 노멀’의 강력한 지지자답다고나 할까. 하나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그가 디자인한 작품들을 볼 때) 공간의 고아한 품격보다는
그 공간을 소유한 인물이 선사하는 즐거움이 훨씬 컸다.
조용하고 느릿한 말투지만 상당히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모리슨은 좋고 싫음이 분명해 약간은 당황스럽기까지 한(물론 인터뷰하는 입장에서는 기꺼운) 대상이었다.
영국인 특유의 자조적 유머가 가미된 그의 명쾌한 언변은 인터뷰 내내 적당한 긴장감과 함께 유쾌함을 자아내는 효과를 빚어냈다.
결함까지도 용서하게 만드는 디자인의 힘
재스퍼 모리슨의 작품 가운데 현재는 시판되고 있지 않지만 한때 열성 팬을 양산했던 가전제품이
하나 있다.
바로 2003년 세상에 첫선을 보인 독일 로벤타(Rowenta) 브랜드의 전기 주전자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세련된 담백함’이 주 무기인 이 제품은 흰색과 은회색의 조화와 깔끔한 디자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문제는 이 주전자가 제조상의 결점 때문인지 자주 고장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이젠 시중에선 볼 수 없는 제품인 만큼 그의 심정이 못내 궁금했다.
다소 껄끄러운 질문이었을 텐데도 그는 “누가 잘못했든 제조업체도, 우리 스튜디오도 불평을 많이 받았던 게 사실”이라고 솔직하게 답하며
“그런데 답답하게도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았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잦은 고장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제품은 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기를 끌 정도로 존재감이 강한 제품은 그리 흔치 않다.
모리슨이 디자인한 주전자의 경우 고장이 나도 돈을 내고 다시 구매하거나 애정을 갖고 꾸준히 문의하는 소비자들이 많았다.
그는 “그것도 맞다”며 아쉬운 표정으로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디자이너 본인만큼은 아니겠지만 제품 생산이 중단된 뒤에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디자인만큼은 엄청난 매력을 발산했다는 얘기다. 그 매력에 사로잡힌 이들 중엔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도 포함돼 있다.
이 회장은 2005년 밀라노 출장을 갔다가 우연히 이 주전자를 보고는 한눈에 반해버렸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삼성전자와 함께 일하게 된 모리슨은 장식적 요소를 과감히 생략하는 그의 색깔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양문형 냉장고와 휴대폰을 선보였다.
유럽의 프리미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만든 냉장고는 일본 최고 권위의 디자인 공모전 ‘굿 디자인 어워드 2007’에서 금상을 받았다.
이 같은 인연 덕분에 그에겐 한국이란 나라가 낯설지 않다.
그는 “삼성과 진행한 휴대폰과 냉장고 프로젝트는 특별한 경험이었고, 서울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며 “서울에 대한 기억이 굉장히 좋아
지금도 꽤나 그리워할 정도”라고 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의자와의 인연
그의 디자인 세계는 휴대폰과 같은 첨단 디지털 기기부터 가전은 물론 주방 소품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다채로운 편이다.
그래도 ‘재스퍼 모리슨’이라고 하면 역시 의자를 빼놓을 수는 없을 듯하다.
의자는 30년 가까운 세월에 걸친 그의 디자인 행보 속에 가장 뚜렷한 자취를 남긴 품목이다.
1980년대엔 플라이우드 체어(Plywood Chair), 1990년대엔 에어 체어(Air Chair)와 로패드 체어(Low-pad Chair), 2000년대 들어서는 폴딩 에어체어(Folding Air-Chair)와 코르크 패밀리(Cork Family)….
영국의 디자인 박물관에서 선정한 ‘세기의 의자들(A Century of Chairs)’ 목록을 보면 모리슨의 작품이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무려 다섯 차례나 등장할 정도로 그는 의자 디자인에서 탄탄한 아성을 구축해왔다.
2004년 스위스의 가구 브랜드 비트라(Vitra)와 손잡고 내놓은 코르크 패밀리의 경우엔 재미난 탄생 일화도 있다.
포도주 사업자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코르코 마개 대신 플라스틱이나 금속 마개를 선택하고 있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코르크를 소재로 삼기로 한 것이다.
소재의 기능성과 질감을 위해 플라스틱의 한 종류인 폴리프로필렌을 재료로 사용해온 그이기에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 선택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플라스틱으로 의자를 만들 때 나무보다 에너지가 적게 든다”고 설명하며 “핵심은 어떤 소재를 택하든 수명이 길어야 한다는 점”이라 했다.
“어떤 재료가 환경을 위해 최적인지 선뜻 결정하긴 곤란해요. 하나 30년 뒤에도 쓸 수 있는 의자를 만드는 건 아주 중요하죠.”
모리슨은 의자에 대한 ‘의지와 정열’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내게 의자를 디자인하는 건 이미 습관과도 같은 일이지요. 일간지에 나오는 십자 말풀이를 매일같이 하는 거랑 비슷해요.
산업디자이너로서 훌륭한 의자 디자인을 선보이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난 그 일상적인 작업을 진심으로 즐깁니다.
물론 의자만 디자인해야 한다면 정말 지겹겠지만.”
그가 다른 디자이너의 작품 중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의자 중 하나는 덴마크 출신 한스 베그너의 1950년대 작품 CH-24.
알파벳 ‘Y’를 연상케 하는 등받이의 모양새 때문에 일명 ‘Y 체어’라고 불리는 의자로 역시 간결한 우아함이 느껴지는 디자인을 갖췄다.
할아버지의 거실에서 싹튼 단순미에 대한 매혹
도대체 그는 언제부터 단순함의 미학에 매료됐을까?
초기 작품부터 미니멀리즘과 실용주의에 입각한 그의 디자인 성향은 한 번도 비뚤어지지도 않고 줄곧 일관성을 띠어왔다.
“복잡하면 쓸모가 없어지는 게 많지 않나요?” 그는 장난기 어린 미소와 함께 이렇게 반문하며 “사실 디자인에 대해선 어린 시절 실용적인 단순미가 돋보이는 스칸디나비안 스타일로 꾸민 할아버지의 거실을 보기 전까지는 별로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고 말했다.
“채광 효과를 고려해 설계된 그 거실에는 현대적인 느낌의 나무 소재 가구가 하얀 카펫 위에 놓여 있었는데, 빛이 들어오면 정말 아름다웠죠.
당시 영국에선 그런 인테리어가 흔치 않았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디자이너를 직업으로 꿈꾸지는 않았다.
게다가 특별히 재능이 있다고 여겨본 적도 없었다고 한다.“어릴 때 학교에서 예술 분야에 소질을 드러낸 기억은 전혀 없어요.
조각과 그래픽 디자인을 즐기긴 했지만.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결심한 중대한 계기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디자인 공부를 하는 사촌의 작품을 보고 흥미를 느낀 것,
그리고 또 하나는 16세 때 런던 사우스켄싱턴에 있는 빅토리아 & 앨버트에서 열린 아일린 그레이(Eileen Gray, 1878~1976: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의 전시회를 보고 반했기 때문이죠.”
그는 한 인터뷰에서 아일린 그레이의 작품을 보고 ‘자신이 이해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발견했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그리하여 그는 킹스턴의 폴리테크닉 디자인 스쿨과 왕립예술학교(RCA)에서 본격적으로 디자인 공부를 하고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주위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의 외가 쪽 인척(정확히 말하자면 모리슨의 이모가 영국 리빙업계의 ‘큰손’ 콘란 경의 전처였다.)이었던 테렌스 콘란 경조차도 고개를 가로저었다고 한다.
그는 “테렌스 이모부가 ‘우리 집안에 또 다른 디자이너는 바라지 않는다(Not another designer in the family)’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며 “부모님도 결국에는 내 결정을 존중해주셨지만 가구를 스케치하면서 생활을 유지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지 우려해 처음엔 별로 내켜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다문화적 시야와 호기심 어린 관찰이 창조성의 바탕
다행히 그에겐 풍부한 문화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감성적 자산이 있었다.
‘런던 토박이’지만 어릴 적부터 해외 경험을 풍부하게 한 편이라 일찍이 시야가 트인 것이다.
“네 살 때인가, 아버지가 전근 가시는 바람에 가족이 모두 뉴욕으로 떠났는데, 당시 우린 거의 5일 정도 걸려 배를 타고 갔어요.
상당히 근사한 방식으로 뉴욕이란 도시에 첫인사를 한 거죠. 허드슨 강가에 있는 석조 주택에서 몇 년간 살았어요.
어린 시절, 이동이 잦고 바쁜 아버지 때문에 학교를 자주 옮겨 다녔는데, 그 때문에 아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내게 세상은 광활하기보다는 오히려 작고 친근하게 느껴졌죠.”
게다가 그는 대학원(RCA) 시절 베를린에서 장학금을 받고 수학하며 다문화적 시야를 보다 더 넓히는 기회도 가졌다.
졸업한 뒤 1986년 런던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차린 그는 독일의 세계적인 미술 행사인 카셀 도큐멘타 전시회에서 로이터 뉴스센터를 디자인하는 작업으로 인정을 받으며 국제적인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독일의 문 손잡이 제조사인 FSB을 비롯, 하노버의 새로운 도시 교통 시스템인 위스트라(Ustra)에 참여해 버스 정류장 설계 컨설팅(1994)을 하고 하노버의 트램 디자인 프로젝트(1995) 계약까지 체결하는 등 독일과의 인연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카펠리니, 마지스, 플로스, 알레시 등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명품 가구업체들과도 왕성한 활동을 벌이게 됐다. 그러나 그는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 시기에 디자이너로서의 작업을 즐기지 못한 건 당연한 후유증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이처럼 심각한 슬럼프를 극복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은인’을 만났다.
그 인물은 이탈리아 디자인계의 거목이자 RCA의 명예교수를 지내기도 했던 비코 마지스트레티(Vico Magistretti, 1920~2006).
그는 어느 날 비행기에 오르는 계단 위에서 모리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 아나? 우리는 정말로 행운아들일세. 이처럼 즐거운 일을 할 수 있는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지.”
창조적 결과물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다
지금은 고인이 된 마지스트레티의 조언에 영향을 받아 그는 언제나 디자인 작업을 진지하게 대하면서도 그 과정을 진심으로 즐기는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비교적 젊을 때부터 주목을 받고 성공을 이룬 이들이 어느 시점에 이르면 흔히 그러듯이 모리슨도 작품에 대한 압박감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나 보다.
그는 창의력이 남다르게 뛰어난 아이디어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떨쳐버리고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 지가 불과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이젠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영감이 떠오를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돼 한결 편해졌다”고 설명했다.
슈퍼 노멀에 대한 생각이 점차 정리되고 굳어지면서 스스로에게서도 자유로워진 눈치다.
그렇지만 행동 양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원래부터 여행을 다니면서 세상의 다채로운 사물을 흡수하고 사람들을 관찰하는 게 자신의 취미이자 특기라고 설명했다.
“별것 아닌 듯한 사물과 문제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거죠. 진부한 말 같지만 모든 사물은 영감을 줍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나름 쓸모가 있죠. 예컨대 좋은 의자가 있고, 나쁜 의자가 있다고 칩시다.
일상에서 늘 접하는 의자가 도대체 왜 나쁜지에 대해 고민하면 아주 중요한 디자인의 단서가 되곤 한다는 겁니다.”
군더더기를 빼고 기본을 생각하라
세상엔 단순미를 내세우는 디자이너들이 많지만 모리슨처럼 평상심에서 우러나온 정제된 감성을 디자인에 투영시키는 ‘슈퍼 노멀’의 차원에서 진득하게 고민하고 운신의 폭을 넓혀가는 이들은 흔치 않다.
어찌 보면 그러기가 힘든 세상이다. 제품의 홍수 속에서 디자인으로 승부하려면 ‘일단 튀어야’만 경쟁에서 치고 나갈 승산이 높아지는 게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요즘은 학교에서조차 학생들에게 미디어의 관심을 끄는 법을 가르치는 것 같다”며 “하루빨리 인정받고 무대에 뛰어들기를 원하는 예비 디자이너들 입장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이해하면서도 안타깝다”고 개탄해 마지않았다.
“디자인의 기본은 내구성, 유용성과 같은 속성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혁신’이니 뭐니 떠들어대면서 그 도구로 디자인을 이용해 과도하게 실험적인 모양새를 만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유명세를 위한 쓸데없는 과욕과 허식을 버리고 기본에 충실할 때 진정 훌륭한 디자인을 창조할 수 있다는 신념을 거듭 강조하는 그는 디자이너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 일본의 생활용품 브랜드 무인양품(無印良品, Muji)을 이상적인 예로 꼽는다.
그래서 자신의 스타 브랜드가 전혀 부각되지 않는 무인양품의 디자인 작업에 신나고 기쁘게 임하고 있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 ‘이름값’을 둘러싼 모든 게임은 뒤로 접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없앤 실용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평범 속의 비범’을 뜻하는 슈퍼 노멀은 모리슨이 자신의 친구이자 명성 높은 일본의 산업디자이너 후쿠사와 나오토와 함께 설파해온 개념이다. 의도적인 외형상의 화려함을 배제하고 형태와 기능, 감수성의 삼박자를 균형 있게 갖춰 일상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는 디자인을 지향하자는 데 뜻을 모은 이들은 2006년 도쿄와 런던에서 <슈퍼 노멀>전(展)을 공동 개최했고 동일한 제하의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한국에도 최근 번역서가 출간됐다).
모리슨에게 직접 설명해 달라고 하니 “동시대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영향을 준 건 기쁘지만 사실 슈퍼 노멀은 이미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라며 “우리가 한 일은 이름을 붙인 것뿐”이란다.
최근 런던의 새로운 문화 중심지로 떠오른 북동부 해크니에 자리 잡은 그의 스튜디오는 ‘주인’의 디자인을 닮아서인지 정갈하고 세련된데다 편안한 느낌이 묻어났다.
그야말로 ‘슈퍼 노멀’의 강력한 지지자답다고나 할까.
하나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그가 디자인한 작품들을 볼 때) 공간의 고아한 품격보다는 그 공간을 소유한 인물이 선사하는 즐거움이 훨씬 컸다.
조용하고 느릿한 말투지만 상당히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모리슨은 좋고 싫음이 분명해 약간은 당황스럽기까지 한(물론 인터뷰하는 입장에서는 기꺼운) 대상이었다.
영국인 특유의 자조적 유머가 가미된 그의 명쾌한 언변은 인터뷰 내내 적당한 긴장감과 함께 유쾌함을 자아내는 효과를 빚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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