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팝 아트의 대부 Peter Blake
미국에 앤디 워홀이 있다면 영국엔 피터 블레이크가 있다.
1967년 그 유명한 비틀스의 8집 앨범 재킷으로 센세이셔널한 명성을 얻은 그는 어느새 77세의 노화백이 되었지만 여전히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스윙잉 런던(Swinging London)’이라 불리는 영국 문화의 전성기 중심에 있었던 피터 블레이크는 ‘영국 팝 아트의 대부’라 불릴 만큼 뚜렷한
업적을 남겼으며 2002년엔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1967년 그 유명한 비틀스의 8집 앨범 재킷으로 센세이셔널한 명성을 얻은 그는 어느새 77세의 노화백이 되었지만 여전히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앨범은 수많은 평론가들이 ‘대중음악 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꼽을 만큼 빼어난 명반이기도 하지만 독특한 재킷 커버 디자인으로도 꽤나
명성이 자자하다.
비틀스 멤버 4명을 포함해 칼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포크 가수 밥 딜런, 배우 메릴린 먼로, 오스카 와일드, 에드거 앨런 포와 같은 작가들,
심리학자 칼 융 등 문학•예술•철학계의 유명 인사 60여 명을 가상 로큰롤 밴드의 ‘관객’으로 등장시킨 커버 디자인은 신선한 시도와
대담한 소재로 숱한 화제를 뿌렸다.
전 세계적으로 3천2백만 장이 넘는 경이적인 누적 판매고를 자랑하는 비틀스 8집 앨범의 커버 디자인을 맡은 인물은
영국 출신의 팝 아티스트이자 화가인 피터 블레이크(Peter Blake).
당시 35세의 젊은 작가였던 그는 세인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이후 오아시스, 로비 윌리엄스 등 쟁쟁한 음악인들의 앨범 재킷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비틀스 8집 하나만 놓고 봐도 인세를 받았다면 금세 돈방석에 앉지 않았을까 싶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2백파운드에 판권을 넘기는
안타까운(?) 계약을 해버렸다.
인세로는 단 한 푼도 챙기지 못한 것이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나 그는 어느새 77세의 노화백이 됐지만 여전히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채롭고 영양가 높은 이야기보따리를 가지고 있는 연륜 깊은 노화백과 담소를 나누는 건 드물게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런던 해머 스미스에 자리한 그의 2층짜리 스튜디오는 다닥다닥 붙은 작은 방마다 책, 포스터, 마네킹, 가면 등 온갖 소장품과 흥미로운 작품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 고즈넉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났다.
뜰이 내다보이는 부엌이 딸린 아담한 방에서 손수 홍차를 타면서 ‘2백파운드 에피소드’부터 차근히 들려주는 백발의 피터 블레이크는
마치 은퇴한 뒤 조용히 갤러리를 운영하는 산타클로스 같았다.
- ▲ 장난기와 위트가 넘치는 소품들이 이뤄낸 콜라주와 오브제들이 피터 블레이크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간을 초월한 팝 아트 갤러리라 해도 손색이 없을 듯. 오른쪽 아래의 사진은 하드보드 위에 구성한 작품으로 그의 1959년 작 <계집애들이 있는 문>. 121.9X59.1cm.
“음, 당시 2백파운드면 현재 가치로는 6천파운드(한화 약 1천백만원)쯤 될 텐데….
아마도 인세 계약을 체결했다거나 저작권에 대한 고려가 어떤 식으로든 반영됐다면 지금쯤 난 억만장자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하하.
그런데 당시 비틀스의 기획사는 그래픽 디자인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도 결코 쉽진 않았죠. 지금으로부터 2년 전까지만 해도 8집 앨범 커버의 도안을 따로 찍어내는 일도 절대 허용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일은 딱 한 번뿐이었고 요즘에는 그렇지 않아요.”
그가 또다시 푸대접을 받았을 리는 만무하다.
60년대 초부터 이미 제법 유명세를 탔던 그는 비틀스의 앨범을 계기로 ‘스타’가 된 뒤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쳐 ‘영국 팝 아트의 대부’로 불릴 만큼
뚜렷한 업적을 남겼으며 2002년엔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스스로를 빗대 ‘나무’라고 표현한 적이 있듯이 그의 작품 세계엔 회화, 조각, 판화, 콜라주 등 실로 다양한 분야가 반영되었고
음악인들과의 작업은 수많은 시도 중 하나일 뿐이다.
“물론 비틀스 앨범 작업도 흥미로웠어요. 원래 사이키델릭한 느낌의 커버 디자인을 제작했지만 새로운 걸 추구하자는 의견이 나오는 바람에
내가 다시 맡았죠.
우린 앨범 커버를 장식할 인물을 선택하고 실물 크기 모형도 만들었습니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적극적이었고, 힌두교에 관심이 많았던 조지 해리슨은 인도 인사들을 골랐는데, 링고 스타는 그의 성격답게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죠. 잘 알려진 얘기지만 히틀러와 간디, 예수는 원래 목록에 있었지만 논란의 여지가 많아 뺐습니다.”
- ▲ 온갖 소장품들로 장식된 그의 스튜디오. 피터 블레이크의 <발코니에서> (1955~1957). 제일모직의 빈폴과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선보인 자전거를 주제로 한 판화 작품. 2009년.
“난 사실 비틀스보다 비치 보이스 브라이언 윌슨의 열렬한 팬입니다. 예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내 맘에 꼭 드는 음악을 들려주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최근 그의 음악은 조지 거슈윈처럼 고전적인 느낌이 묻어나는데 그것도 멋지죠.”
공공연히 ‘열성 팬’임을 자처한 덕에 실제로 그는 브라이언 윌슨의 <게팅 인 오버 마이 헤드(Getting’ in over My Head, 2004년)>앨범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
비치 보이스를 차치하더라도 그는 1950~60년대 미국 대중문화를 자신의 예술 세계로 적극 끌어들인 대표적인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에 접어들자 영국에선 미국의 소비 문화가 젊은 세대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영화, 광고, 자동차, SF 등을 소재로
한 팝 아트가 태동했다.
‘스윙잉 런던(Swinging London)’이라 불리는 영국 문화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 중심에 있던 피터 블레이크는 엘비스 프레슬리, 메릴린 먼로, 제임스 딘 등 당대를 주름잡은 미국 대중문화 아이콘, 그리고 성냥갑, 레슬링 등
일상적 소재를 ‘팝’적인 느낌으로 담아낸 작품을 쏟아냈다.
“미국에 앤디 워홀이 있다면 영국엔 피터 블레이크가 있다” 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피터 블레이크가 처음으로 팝 아티스트로서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영국의 공영방송 BBC 덕분이었다.
1961년 그가 동료 작가들과 함께 등장한 다큐멘터리 영화 <팝 고우즈 더 이즐(Pop Goes the Easel)>이 BBC에서 방송된 덕에 팝 아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증폭된 것이다.
그에게 1961년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해였다.
미국 팝 아트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재스퍼 존스의 작품을 모방해 ‘예술계의 독창성에 대한 강박’을 빗댄 화제작 <퍼스트 리얼 타깃(The First Real Target)>이 바로 이 해에 선보였다.
그는 또 엘비스 프레슬리의 모습이 담긴 잡지를 든 채 서 있는 젊은 날의 자화상으로 <존 무어스 컨템포러리 아트> 전시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 ▲ 캔버스에 유채 작업을 한 작품. 121.3X90.8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대중문화에 대한 폭넓은 관심사와 다양한 기법들이 그의 일상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안타까운 향수의 미학
“괴짜지만 순수하고 정직한 단순함이 돋보이며, 약간 수줍음을 타고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며 거의 어린아이와도 같은….”
2003년 피터 블레이크에 대한 책 <PB>를 펴낸 나탈리 러드는 그의 됨됨이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런 면모를 반영하듯 그의 작품은 꾸밈이 없는 게 특징이다. ‘냉소’나 ‘충돌’ 같은 요소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자신의 취향을 숨기거나 비틀지 않고 솔직하게 경의를 표했다.
블레이크를 비롯한 영국의 1세대 팝 아티스트들이 소재의 선택에 있어서 미국 작가들에 비해 보다 사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을 강하게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블레이크는 어린 나이에 전쟁을 겪은 아픈 기억의 파편과 그 때문에 잃어버린 시절에 대한 아쉬움 섞인 그리움을 다수의 작품에 진지하게
담아냈다.
과거의 자아에 대한 추억인 동시에 직접 겪지도 못했고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에 대한 다소 역설적인 향수(nostalgia)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이 등장하지만 건조한 시선, 무표정한 얼굴이 인상적인 <만화를 읽는 어린이들(Children Reading Comics, 1954)>,
<에이비시 마이너(ABC Minors, 1955)> 등의 작품이 좋은 예다.
평론가들은 승전국인 미국과 달리 급변하는 현실에 대한 불안, 대중문화에 대한 동경 등으로 혼란했던 영국 사회에서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성향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자면 이렇다. “전쟁은 잔인하게도 어린 시절을 앗아갔습니다. 난 겨우 예닐곱 살에 부모와 떨어져서 성장했어요.
어찌 보면 난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작품을 통해 재창조한 것이죠.”
언뜻 보면 콜라주 같지만 알고 보면 정교한 채색 작품인 그의 유명한 대표작 <발코니에서(On the Balcony, 1955~1957)> 역시 유년기의
자아에 대한 아릿한 마음이 느껴진다.
어린이 4명이 에두아르 마네의 ‘발코니’, 미국 대중 잡지 <라이프> 표지 등 제각기 다른 이미지와 어우러져 있고 배경엔 청량음료, 통조림,
신문 등 시사적인 흐름을 반영하는 일상적 소비재들이 깔려 있다.
그림 한 장으로 전공을 바꾼 그래픽디자인학도 블레이크의 대중문화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영역을 넘나드는 다양한 기법을 시도하려는 실험정신은 아마도 그의 배경과 관련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평범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영화를 몹시도 사랑했던 간호사 출신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대중문화에 적극 노출됐다.
전쟁을 계기로 지인의 집에 맡겨져 부모와 떨어져 지냈던 그는 우연히 런던의 한 예술 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어릴 땐 예술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며 “어떤 것을 전공하고 싶느냐고 묻기에 ‘회화’라고 말했지만 웬걸,
그래픽디자인을 하라고 권유하더라”고 웃음을 띠며 회상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도안과 서체 등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했지만 정작 왕립예술대학(RCA)에 들어갈 땐 ‘회화 전공’으로 입학했다.
“의외였어요. 사실 그래픽을 공부했기 때문에 회화는 단 1장만 제출했거든요.”
게다가 그는 바로 2년 동안 공군에서 근무(전후 당시의 의무) 하기 위해 떠나야 했기 때문에 정작 회화 공부를 시작했을 땐 ‘백지 상태’였다고 회고한다.
1956년 우등으로 RCA를 졸업한 그는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을 돌며 수학할 수 있는 기회까지 잡았다.
“내가 다양성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아마도 우연찮게 디자인과 회화를 다 접하게 된 배경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예술계에 입문한 전후 세대라는 요소도 크게 작용한 것 같아요.
혼돈의 시기에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졌거든요. 문화의 충격이 신선하게 다가왔고 가치관의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지요. 나는 그런 문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을 회화적으로 소화한 것인 셈이죠.
그게 바로 팝 아트가 되었지요.” 이러한 배경 때문에 그는 화가이자 디자이너로 왕립미술원(Royal Academy)과 산업디자이너들의 단체인 RDI에 각각 이름을 올리는 독특한 이력까지 갖게 됐다.
만년을 즐기는 거장 미소
1969년 런던을 떠나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한 바스로 이동한 블레이크는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다.
영국 시골의 경치를 비롯해 문학, 민속 등 영국의 전통을 기반으로 전원주의적 작품을 선보인 것.
1975년에는 ‘브러더후드 오브 루럴리스트(Brotherhood of Ruralists)’라는 전원주의 화가들의 단체를 창설하기도 한다.
1980년대부터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본연의 대중문화적 관심을 유쾌한 유머로 버무린 작품을 많이 선보였다.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명화를 패러디한 작품 <만남 – 안녕하시오, 호크니 선생(1981~1983)>이나 <마돈나 온 베니스 비치(1996)> 등은 이런 면모를 잘 드러낸다.
1997년, 65세가 된 그는 ‘깜짝 은퇴’를 선언한다.
하지만 진심으로 예술계를 떠나겠다는 게 아니라 ‘개념적’이고 ‘형식적’인 은퇴 선언으로 다분히 그다운 장난기가 어린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당시 런던과 맨체스터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던 그는 영국 근로자들이 정년퇴직할 나이인 65세를 맞이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
그는 “그건 예술의 추잡한 속성, 다시 말해 질투, 욕망, 허욕 등과 결별하고 순수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활동을 펼쳐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2년 전부터 작가로서 ‘만년(late period)’에 돌입했다고 스스로 선을 그은 블레이크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스튜디오에서 작품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얼마 전 20주년을 맞이한 제일모직의 빈폴(Bean Pole) 브랜드를 위한 판화 작업도 맡았다.
그는 ‘자전거를 탄 신사’로 응축되는 빈폴 로고를 기념하기 위해 영국적인 느낌이 짙은 자전거를 응용한 판화 10점을 선보였고,
이는 실제 상품에도 반영됐다. 사실 그에게 자전거는 즐거운 추억인 동시에 악몽과도 같은 대상이다.
10대 시절, 그는 동 세대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전거에 몰두했는데, 아직도 얼굴에 상처가 남아 있을 만큼 끔찍한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패션 디자이너 폴 스미스도 그 나이에 사고를 당해 진로를 바꿨다지만 내게도 이혼, 부모님의 죽음과 더불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사건 중 하나였다”고 설명하며 “하지만 인생은 흘러가는 법”이라고 읊조렸다.
만년에 예술 활동을 유유히 만끽하는 동시에 자신이 다녔던 RCA에서 수학하고 있는 미술학도인 어린 딸을 지켜보는 기쁨으로 충만하다는
블레이크.
딸의 실크 스크린 작품을 꺼내 보여주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는 노화백의 천진한 미소가 부디 오래도록 지속됐으면 하는 건 비단 그를 사랑하는 영국인들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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