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이 흐르는 보르도 와인 여행
“불행한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드는 건 와인뿐이다!”
<비트>, <태양은 없다> 등으로 1990년대를 풍미했던 시나리오 작가 심산은 최근 펴낸 <심산의 와인 예찬>에서 이렇게 썼다.
불행한 삶도 견디게 하는 강력한 와인의 매력은 무엇일까.
- ▲ 샤토 스미스 오 라피트 전경
와인은 흔히 오감으로 느끼는 술이라고 한다. 빛깔을 보면서 눈으로 즐기고 향을 만끽한 뒤 입속에서 음미하며 온몸으로 느낀다.
하지만 와인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선물은 우리로 하여금 ‘상상하게’ 한다는 점이다.
감성의 가장 연약한 부분까지 적셔주는 와인은 우리를 낭만적인 꽃밭으로, 사향과 흙냄새가 어우러진 숲으로, 상쾌한 해변으로 데려다준다.
와인을 통해 그레이스 켈리가 등장하는 한 편의 우아한 영화를 통째로 감상하기도 한다.
오죽하면 노동계급 혁명을 주장하며 세계공산당선언을 발표했던 엥겔스가 “행복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샤토 마고 1848년”이라고 답했을까.
그렇다고 모두가 그런 와인의 참맛을 느끼는 건 아니다.
와인 초보자들에겐 전 세계 수십만 종을 헤아리는 수많은 와인 중에서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부터 막막하다.
어느 정도 마신다 해도, 와인을 즐기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때 가는 곳이 ‘보르도’다.
와인을 알려면 프랑스 와인을 알아야 하고, 프랑스 와인을 알려면 보르도 와인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보르도는 와인의 대명사이자 와인의 왕이다.
유럽 대도시의 전형적인 여행에 지쳤다면, 보르도 샤토 여행으로 와인 스토리와 맛에 빠지는 것은 어떨까.
‘로맨틱 와이너리’라는 테마로 보르도 여행을 떠나보자.
- ▲ 대표적인 서식 동물 들토끼를 형상화한 동상, 샤토 내의 오크통 제작소, 샤토 내 레스토랑 ‘라 타블르 드 라 부와’
20세기 보르도 최고의 성공 신화
보르도 시내에서 30분쯤 차로 달리면 그림 같은 성곽이 한눈에 들어온다.
샤토 스미스 오 라피트(www.smith-haut-lafitte.com). ‘작은 언덕’이라는 뜻의 라피트와 18세기 이 와이너리의 주인이었던 스코틀랜드의
와인상 스미스의 이름을 합한 것이다.
단정하고 격조 있는 영국풍의 이 아름다운 성곽은 현재 다니엘과 플로랑스 카티아르 부부의 소유다.
이들은 낭만적인 모습만큼이나 흥미로운 스토리를 품고 있다. 부부는 프랑스 국가대표 스키 선수 출신이라는 이색적인 이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1970년 다니엘의 부친이 별세하자 다니엘은 가업인 슈퍼마켓 체인 사업을 잇기 위해 선수 생활을 정리한다.
그는 20년 만에 이 작은 가업을 15개 하이퍼마켓과 3백 개의 슈퍼마켓 체인을 가진 프랑스 10위의 슈퍼 체인의 자리에 올려놓는 경영 수완을 발휘했다.
1978년에는 ‘고 스포트(Go Sport)’를 설립해 매출 10억 달러의 대표적인 스포츠 체인으로 키웠다.
그 사이 아내 플로랑스는 유명 광고 회사인 매켄 에릭슨의 유럽 법인 부사장까지 올라가며 마케터로서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어느 날, 부부는 삶을 사업에 헌납한 채 가족과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에 빠진다.
1989년에 부부는 큰 결심을 한다. 화려한 성공과 눈부신 대도시의 불빛을 뒤로하고 내면의 삶을 찾겠다고 결심한 것.
그렇게 유통 체인을 매각한 돈 중 5백40억원을 투자해 1990년 보르도 페삭 레오냥 지역에 있는 샤토 스미스 오 라피트를 매입했다.
하지만 포도밭에서 기다린 건 한적한 전원의 삶이 아니었다.
1991년 몰아닥친 냉해와 이듬해 덮친 홍수는 이 샤토를 연속 적자의 늪에 빠뜨렸다.
그러나 부부는 이를 오히려 회생의 기반으로 뒤바꿔놓기로 했다.
기계 수확을 중단하고 1백% 손 수확, 화학비료 제로, 오크통 직접 생산 등 전통적 수확 방법을 도입하는 대신 생산량을 반으로 줄이는 ‘고급화’ 전략을 선택했다.
그리고 샤토 한쪽에 와인 껍질과 포도씨의 항노화 물질을 이용한 ‘비노테라피’라는 새 콘셉트로 고급 전원풍 스파를 만들어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을 끌어들였다.
행운도 따랐다. 호텔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온천수가 터진 것. ‘레 수르스 꼬달리(www.sourcescaudalie.com)’라는 이름의 이 스파는
세계 5대 스파에 이름을 올리면서 샤토 스미스 오라피트와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냈다.
페삭 레오냥 지역 최초로 외부 방문객들에게 와이너리를 개방하고 각종 테이스팅 행사도 벌였다.
결과는 대성공. 1990년대 중반이 되자 샤토 스미스 오 라피트는 몰락하던 샤토에서 ‘20세기 최고의 성공 스토리’로 떠올랐다.
와인을 담그고 난 포도씨와 껍질에서 추출한 폴리페놀 성분으로 화장품도 만들어 브랜드화했다. 지난 1995년 제품화된 ‘꼬달리(www.caudalie.com)’라는 이름의 화장품 라인은 현재 전세계에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매출 1천억원(5천6백만유로)을 올리는 브랜드로 성장했다.
- ▲ (왼쪽부터 시계방향)화려한 샤토 라라귄의 침실, 방문하는 샤토 마다 즐길 수 있는 와인 시음, 와인과의 맛 궁합이 환상적인 샤토 라라귄의 식당 내부, 오크통에서 숙성 중인 와인
메도크에 숨겨진 잠자는 숲 속의 공주
페삭 레오냥에서 북쪽으로 40분쯤 차를 몰고 가면 보르도 와인의 대명사 ‘메도크’ 지역에 이른다. 메도크는 원래 늪지대였다.
말 자체도 ‘물 한가운데’라는 뜻이다. 13세 당시 영국령이었던 이곳에는 프랑스 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용 성곽이 만들어졌다.
그러다 18세기부터 와인을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와인을 생산하는 샤토로 변모했다.
네덜란드 인이 이곳으로 이주해와 물 빼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하면서 이 일대가 지금의 최고 포도 산지로 변모한 것.
그래서 지금도 메도크에는 ‘플랑드르’라는 지명이 있다.
당시 배수 작업을 위해 네덜란드로부터 건너와 메도크에 정착한 플랑드르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지금도 후손들이 살고 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배경이 된 것으로 전해지는 아름다운 성 ‘샤토 다가삭(www.agassac.com) 역시 그런 수순을 밟아
지금의 로맨틱한 와이너리가 됐다.
한때 쇠락의 길을 걷기도 했으나 1996년 그루파나(Grouparna)라는 프랑스 보험 회사가 사들여 대대적인 투자를 한 끝에
메도크 톱 50에 포함되는 등 명성을 되찾았다.
동화 속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 예쁘게 솟아 있는 삐죽한 지붕의 성곽은 정말로 공주와 백마 탄 왕자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이 와이너리에서는 방문객들이 그런 느낌을 최대한 느끼면서 와인을 배울 수 있도록 아이팟을 이용한 체험 프로그램도 제공한다.
어린이 3유로, 어른 5유로를 내면 아이팟을 통해 와이너리의 역사에서 양조 과정까지 재미있는 이야기 형식으로 설명해주며
프로그램이 끝나면 수료증도 준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배경지라는 속설답게 로맨틱한 샤토인 덕에 결혼식도 많이 치러진다.
- ▲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스토리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진 샤토 다가삭, 보르도 시청, 와인의 노화 방지 성분을 이용한 스파 ‘레 수르스 꼬달리’
남성적인 취향 속에서 고고하게 자리 잡은 와인의 ‘그레이스 켈리’
샤토 다가삭에 이웃한 그랑크뤼 3등급의 샤토 라라귄(www.chateaulalagune.com)은 ‘메도크의 그레이스 켈리’라고 불린다.
그만큼 우아한 맛이 일품이다. 남성적 와인의 대명사인 메도크의 한가운데서‘여성적인 와인’으로 차별화를 이뤄냈다.
특히 31세의 젊은 여성 와인 메이커인 캐롤린 프레이(Caroline Frey)는 이곳 라라귄과 론 지방의 유명 와이너리 폴 자볼레(Paul Zabolet)를
오가며 와인의 열정을 불사르는 보르도 지역 최고의 미인이라는 명성까지 얻고 있다.
1999년에 캐롤린의 부친인 장자크 프레이(Jean-Jacques Frey)가 사들이면서 이 젊은 와인 메이커는 꺼져가던 그랑크뤼 명성에 불을 지폈다.
대대적인 투자를 통해 최신 와인 공정 시스템을 갖추고 포도 수확에서 샤토 데커레이션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을 직접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캐롤린이 만든 샤토 라라귄을 테이스팅한 뒤 과거 이 샤토의 와인들보다 훨씬 더 높아진 품질에 놀랐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양조장을 거쳐 샤토 안으로 들어가면 유난히 기품 있는 장식이 눈을 매혹한다.
인도풍으로 꾸민 방에서 정통 영국풍 분위기를 간직한 거실 등 소품 하나까지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우아한 라라귄의 와인과 궁합을 맞춰 내오는 이곳 셰프의 음식 솜씨도 일품이다.
바로 뒤 텃밭에서 유기농으로 직접 재배한 친환경 야채가 깊고 신선한 맛을 배가시킨다. 예약하면 점심, 저녁 식사가 가능하다.
식사는 메뉴에 따라 95·1백68·1백90 유로짜리 세 종류가 있으며 6백유로를 내면 2인용 침실 3개가 딸린 샤토 전체를 하룻동안 빌릴 수 있다.
- ▲ 보르도에서 강을 가장 가까이에 둔 샤토 루덴
샤토에서 체험하는 중세의 유럽
역시 메도크에 위치한 크뤼 부르주아급 샤토 루덴(www.lafragette.com/uk/chateau-loudenne/)은 보르도에서 강을 가장 가까이 둔 샤토다.
17세기에 지어진 영국풍 핑크빛 건물이 트레이드 마크. 방문을 열면 포도밭이 펼쳐지고, 그 끝에 지롱드 강이 넘실대면서 보드로의 정취로
흠뻑 빠져든다.
조용조용한 말씨의 안주인인 마리클로드 라프라제트(Marie-Claude Lafragette) 씨는 교사 출신으로 5대째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는 집안에서 자랐다.
“샤토는 늘 사람들로 북적대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어 외부 방문객들은 언제라도 대환영이다.
예약하면 우아한 식사와 더불어 17세기 영국풍 샤토에서 머물 수 있다. 2인실 하룻밤에 2백80유로.
핑크빛 샤토 주변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포도밭과 오래된 장미 정원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 메도크 지방 최고의 전망을 선사한다.
15개 룸은 전형적인 영국 빅토리아 스타일로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다.
30년 동안 안주인과 함께 주방을 지켜온 칠순 고령의 아주머니가 준비해주는 ‘프랑스 가정식 백반’은 맛집에 온 듯 입에 착착 감긴다.
이 밖에 그랑크뤼 5등급이면서도 2등급을 능가하는 맛을 자랑하는 샤토 린치 바주(www.lynchbages.com) 역시 인기 높은 샤토다.
가격은 5등급이면서 맛은 특급이라는 뜻에서 ‘가난한 자의 무통 로칠드’라는 별명을 얻었다.
Wine Tasting
◆ 샤토 스미스 오 라피트(Chateau Smith Haut Laitte)
레드는 타닌 맛이 묵직하게 잡아주면서 향긋한 연기 냄새, 자갈, 미네랄, 블루와 레드 베리 등의 과일 향이 조화를 이루는 매혹적인 와인이다.
하지만 이 샤토의 백미는 드라이하면서 복숭아, 살구, 자몽, 배 등 각종 과일 맛이 풍부한 화이트 와인. 쇼비뇽 블랑 90%에 세미용 5%,
쇼비뇽 그리 5%가 블렌딩됐으며 화이트임에도 오크통에서 1년간 숙성을 거친다.
다만 화이트 와인 치고는 비싼값이 부담. 레드 와인은 연간 12만 병 생산하는 반면 화이트는 3만6천 병만 생산, 희소성 때문에 더 비싸다.
현지 가격으로 레드는 병당 30~40유로, 화이트는 65유로. 국내 가격은 병당 20~30만원 선이다.
수령 15년 이하의 포도로는 오드 스미스라는 세컨드 와인, 더 어린 것은 오드 모장(Maujan)이라는 서드 와인을 만든다.
◆ 샤토 다가삭(Chateau D’Agassac)
카베르네 쇼비뇽 60~70%로 만들어지는 보통 메도크 지역 와인과 달리 메를로가 47%, 카베르네 쇼비뇽이 50%, 카베르네 프랑이 3%로,
메를로가 절반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만큼 비단결처럼 매끄럽게 넘어가는 부드러움이 장점이다.
크뤼 부르주아급. 지역적으로도 샤토 마고와 인접해 있어 균형감이 좋고 부드러운 와인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포도나무의 22%가 수령 50년 이상.
연간 25만 병을 생산하며 세컨드 와인으로는 포미에 아가삭(Pomies Agassac), 서드 와인으로는 라가상 다가삭(LaGassan D’Agassac) 이 있다.
◆ 샤토 라라귄(Chateau La Lagune)
프티 베르도(Petit Verdot) 품종을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이 쓴다는 점이 특징.
까베르네 소비뇽 50%, 메를로 20%, 카베르네 프랑 20% 그리고 프티 베르도가 10%. 기껏해야 2~3%의 프티 베르도를 쓰는
평균적인 보르도 와인보다 훨씬 많은 비중이다.
프티 베르도는 풍부한 타닌과 아로마 그리고 스파이시한 맛을 품고 있어 “프티 베르도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와인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와인에 개성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직접 손으로 수확하여 온도 조절이 된 발효 과정을 거친 후 1백% 오크통 숙성을 15개월간 하게 된다.
샤또 라라귄은 매년 3만3천 케이스로 적은 수량 생산되는 편이다.
세컨드 와인은 뮬린 라라귄(Moulin La Lagune)으로 매년 8천 케이스 정도 생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