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 다 가지고도 아무것도 없으신 가난한 목자, 아무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 다 가지신 사랑의 목자."
광복 후 한국개신교계를 대표한 거목(巨木) 한경직(1902~2000) 목사가 별세한 지 오는 19일로 꼭 10년이 된
한 목사의 10주기를 맞아 그가 설립한 영락교회(이철신 목사)와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는 한 목사의 유지를 기리는
다양한 추모행사를 마련했다.
◆생애
1902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해 오산학교와 평양 숭실대를 졸업하고 미국 엠포리아대, 프린스턴신학대를 졸업한 한 목사는
1933년 신의주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1942년까지 신의주 제2교회 목사로 일한 그는 광복 직후 월남해 1945년 12월 영락교회의 전신인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했다.
이듬해 영락교회로 이름을 바꿔 1972년까지 담임목사로 활동했고 별세 전까지 원로목사를 맡았다.
한경직 목사의 활동 영역은 어려웠던 당시 한국의 현실을 반영하듯 교회 목회자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사업, 교육사업, 선교사업 등에 두루 걸쳐 있었다.
사회사업은 신의주 시절인 1939년 고아원인 보린원을 시작으로 모자원과 경로원을 설립했고 미국인 밥 피어스 목사와 함께 세계적 구호기구인
월드비전을 사실상 이끌었다.
또 대광중고교, 보성여중고, 숭실대, 서울여대 등의 설립과 재건을 주도했으며,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총재,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 등을
맡아 개신교계를 지도했다.
"신앙은 보수적이었지만 신학은 열려 있었던"(김은섭 영락교회 연구목사) 한 목사는 교계 내외를 향해 열린 행보를 했다.
각 교단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큰 틀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앞장섰고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불교 청담 스님과도 어울리며
종교 간 화합에도 적극적이었다.
한경직 목사의 삶은 철저한 청빈으로 일관했다.
담임목사에서 물러난 후 남한산성 영락교회 수양관에 있는 18평짜리 단층집에서 말년을 보냈다.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는데 상금 102만 달러를 받자마자 북한선교 헌금으로 전하면서 "1분 동안 백만장자가 돼 봤다"며
웃었다고 한다.
2000년 4월 19일 별세한 그는 휠체어, 지팡이, 털모자, 옷가지 몇점 등만 남겼을 뿐 예금통장 하나 없었다.(1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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