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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륵사 강월헌에서 내려다본 남한강 강 건너편 백사장이 햇볕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입니다. 대운하는 이 아름다운 풍광을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 서부원
대운하 공사가 시작되면 다시는 못 보게 될 것만 같아 미리 다녀왔습니다. 강바닥을 준설하고 가장자리를 콘크리트가 덮게 되면 물길도 자연히 바뀌게 될 테고, 그리 되면 강을 기대 살아온 많은 것들은 수몰되거나 제자리를 잃고 망가질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남한강은 경기도 여주에 이르러서야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우리나라 제1의 강이라는 이름값을 합니다. 태백 준령의 깊은 산골짝을 돌고 돌아, 물살이 너그러워지고 강폭도 호수만큼이나 넓어지며, 강을 따라 광활한 들녘이 펼쳐집니다.여주 땅에서 시작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개발이 몰고 올 광풍에 훼손되거나 끝내 사라질지도 모르는 가엾은 폐사지(廢寺址)들을 찾았습니다. 지금도 찾아가는 길에 변변한 안내판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을 뿐더러 찾는 이조차 거의 없어 사실상 '버려진' 곳들입니다.
▲ 신륵사 다층전탑의 모습 남한강에 인접한 탓에 대운하가 뚫리면 오가는 배를 묶어두는 말뚝이 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 서부원
이번 여행의 시작점은 발아래에 말바위(馬岩)를 딛고 남한강에 매달려 있는 천년 고찰 신륵사입니다. 누군가는 신륵사의 그윽한 범종 소리가 수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저녁 무렵의 정취를 남한강 기행의 압권이라 했습니다.
신륵사는 세종대왕이 영면해 있는 영릉과 함께 여주의 손꼽히는 랜드마크이지만, 대운하 공사가 시작되면 맨 먼저 직격탄을 맞게 될 곳입니다. 지금도 각종 행사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절 입구 광장에는 공사 현장 사무실이 입주할 테고, 강바람 맞으며 우뚝 솟아있는 다층 전탑은 아예 배를 묶어두는 선창가 말뚝 신세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법천사터의 석물들 완전하게 남은 지공국사부도비를 제외하면, 용도조차 알기 어려운 부서진 석물 조각이 절터 곳곳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터가 좁은 탓인지 더 어수선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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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나옹선사의 자취가 고스란히 서려있으며 영릉을 지키는 조선 왕실의 원찰로서의 어엿한 역사도 아스라한 전설이 돼 묻히거나, 터를 옮겨 박제화된 관광지로 남게 될 운명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신륵사는 사정이 좀 나은 편입니다. 교과서에도 실린 '유명한' 절이기 때문입니다. 이웃한 강원도 원주 땅의 법천사터와 거돈사터, 남한강의 지류인 섬강 가장자리의 흥법사터와 충청도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청룡사터 등의 폐사지들은 아예 사람들의 관심 밖입니다. 비록 지금은 스러졌지만 당대 내로라는 거찰이었고, 모두 남한강에 기대어있다 보니 찻길보다 뱃길이 훨씬 더 가깝습니다. 남아있는 석물들의 모양새도, 빈 절터의 정취도 서로 비슷해 이웃사촌 마냥 정겹습니다.
▲ 지공국사부도비에서 내려다본 법천사터 전경 저 멀리 파란지붕 집 앞에 당간지주가 서 있으니 그곳까지를 절터라고 보면 상당한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재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으며, 앞에 보이는 야트막한 산 너머가 남한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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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문경 새재 너머 낙동강과 더불어 남한강이 이른바 '영남대로'로 기능했을 시절, 길손들이 하루쯤 머무르며 예불을 드렸을 법한 길목에 하나 같이 터를 잡고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현재 발굴조사가 한창인 법천사터의 경우는 가람배치가 여느 곳과는 사뭇 달라 혹 숙박 시설인 원(院)터로 추정될 정도라고 합니다.
법천사터에서 채 1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 고려 말부터 조선 말까지 조창으로 기능한 흥원창이 있던 자리이고 보면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걸작인 까닭에 일제 강점기 갖은 수난을 당한 채 긴 세월을 돌고 돌아 서울 경복궁 한쪽에 덩그러니 놓이게 된 지공국사부도(국보 제101호)의 원래 자리에는 잡풀만 무성하고, 그가 있던 자리를 향해 앉은 부도비(국보 제59호)는 짝꿍을 잃은 탓인지 무척이나 외롭습니다. 온전한 것 하나 없이 석물 조각만 나뒹구는 절터라 생뚱맞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부도비 곁에 서서 발굴조사가 한창인 절터를 내려다보노라니 훼손을 막을 목적으로 덮어놓은 파란색 비닐 덮개가 햇볕과 바람을 받아 펄럭이고 있어 흡사 강물 소리 같습니다. 바로 앞 야트막한 언덕만 너머가 남한강이니 어쩌면 진짜 강물 흐르는 소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무명(無名)의 처지라도 면소재지가 코앞인 탓에 찾아가기 그다지 어렵지 않은 법천사터와는 달리, 산 하나를 사이에 둔 거돈사터는 그야말로 '숨은그림찾기'입니다. 길 안내판이라 해봐야 길가에 내걸린 식당 광고판만도 못하고, 아스팔트가 깔렸다지만 차 두 대가 교행하기 힘든 샛길을 '운 좋게' 찾아 따라가야 합니다. 가다 보면 넘게 되는 굽잇길에서는 휴대전화조차 터지지 않는 오지이고 보면, 애초에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는 게 상책입니다. 거돈사터는 남한강 쪽만 트여있고 사방이 야트막한 산으로 에워싸인 분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전체적으로 아늑하고 포근한 분위기이지만, 성벽처럼 거대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까닭에 튼실한 요새 같기도 합니다. 웬만한 축구 경기장보다 넓은 절터에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이라곤 석탑(보물 제750호) 한 기와 원공국사부도비(보물 제 78호), 그리고 원공국사부도의 복제품이 전부입니다. 무수한 주춧돌이 징검다리 마냥 바둑돌 마냥 깔려 있을 따름입니다. 이곳의 주인 격인 원공국사부도(보물 제190호) 또한 법천사터 지공국사부도와 같이 일제 강점기에 한 일본인의 손에 넘겨졌다가 해방 후 돌려받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습니다. 그나마 복제품이라도 세워졌으니 법천사터에 견줘 '행복한' 폐사지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거돈사터 전경 웬만한 축구장보다 넓은 터를 야트막한 산들이 에워싸고 있어서 아늑하고 평온합니다. 이곳에서는 여느 폐사지가 주는 황량함과 을씨년스러움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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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레 폐사지 하면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느낌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곳 거돈사터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두 가지의 (보물 아닌) 보물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 한 가지는 절터 입구 석축 위에 수문장처럼 서 있는 천 년 고목(古木)이고, 다른 하나는 폐사지의 심심한 풍경을 달래주려는 듯 남아있는 친근한 삼층 석탑입니다.
▲ 거돈사터의 수문장 격인 천 년 고목 절의 옛 영화를 보여주려는 듯 여전히 푸르고 웅장한 현재 거돈사터의 수문장이자 주인 격입니다. 성채와 같은 높은 석축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더욱 커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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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가릴 듯한 아름드리 고목은 차가운 돌멩이만 굴러다니는 을씨년스러운 곳에 짙푸른 초록의 신선함을 주고, 작고 소박한 석탑은 절터의 맨 가운데에 서서 시선을 둘 만한 곳이 없는 밋밋한 '지평선'에 변화를 주기에 충분합니다. 고목 곁에 놓인 벤치에서 하루 종일 앉아 상념에 빠져들거나, 고목이 만들어 준 그늘 아래에서 책 한 권 꺼내 읽는 여유를 부려봄직한 고즈넉한 절터입니다. 내리쬐는 햇볕마저 숨죽인, 비어 있기에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폐사지일지언정 소란스럽거나 번잡한 그 어떤 것도 상대하지 않겠다는 옛날 옛적 고집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 거돈사터 석축 오르는 계단길 가파른 석축 계단을 오르면 빼꼼히 얼굴 내밀어 반갑게 맞아주는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삼층 석탑입니다. 크지도 않고, 잘 생긴 것도 아니지만, 무척 정겨운 느낌을 주는 거돈사터의 보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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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지 주변, 인적마저 뜸했던 조그만 강변 마을에는 외지 차량들이 부쩍 늘었고, 변변한 초등학교 하나 없는 곳에 이따금씩 부동산 중개업소가 눈에 띕니다. 어울리지 않는 낯선 풍경입니다. 하긴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유장하게 흐르는 남한강 강물에서 최근 들어 돈 냄새가 진동한다'고.
다른 것은 다 파헤치고 뭉개고 없애고 또 새로 만든다 해도, 부디 폐사지가 주는 푸근하고 정겨운 정취만큼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거돈사터를 나오려니 인근 공사장에서 포클레인의 굉음이 들려왔습니다. 스러진 절터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리 같았습니다. 마치 환청처럼.
기사제공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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