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결과가 어떻게 되든 제발 빨리 좀 끝내 주세요.”


서울북부지법 박형순 법원장이 직접 재판장을 맡아 법정에 들어가서 가장 자주 듣는 말이다. 
최단 4년, 길게는 6년까지 재판 기간이 늘어지자 사건 당사자들이 애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 법원장은 “재판 지연이 주는 당사자들의 고통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려운 사건이라고 미루지 말고, 재판장이 주도적으로 사건을 잘 관리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지난 3월 소가(訴價) 5억원이 넘는 ‘악성 미제 사건’을 24건 배당받았는데, 대부분 당사자가 수십 명이거나, 공사 내역서도 없이 수억원대 공사 대금을 청구하는 골치 아픈 사건이었다. 
박 법원장은 오는 22일 4건을 선고하면 총 17건을 해결한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재판 지연’ 문제 해결을 강조하면서 전국 37곳 법원장이 모두 직접 재판을 맡고 있다. 
이에 따라 법정마다 긍정적 변화도 나타나지만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고 한다. 
2023년 민사 1심 합의부 재판의 평균 처리 기간은 473.5일로, 2018년(297.1일)보다 59.4%나 늘어질 정도로 재판 지연은 심각하다. 
소장 접수 후 첫 기일 잡기까지 170.5일(2022년 기준), 소장을 접수하고 다섯 달 넘게 재판장 얼굴도 못 본다는 이야기다.


직접 재판장으로 법정에 들어간 법원장들은 “보이지 않던 문제점이 나타나기도 하고, 해결 방안이 떠오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전국 최대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은 김정중 법원장이 민사 단독 장기 미제 사건 30건가량을 배당받아 처리하고 있다. 
작년 한 해 민사 단독 사건만 5만5000여 건이 들어온 중앙지법에서 법원장 직접 재판이 현실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재판 지연의 원인과 방안을 법원장이 찾아 나선 것이다.

 

 




인사 평가를 하는 법원장이 미뤄둔 자기 사건을 맡게 될까 봐 뒤늦게 사건 처리를 서두르는 일도 이어진다고 한다. 수도권의 한 법원에서는 법원장이 접수 후 1년 넘게 재판이 안 잡힌 20여 건을 배당받아 절반을 처리했다. 
한 법원장은 “일부 재판장은 자기 사건을 법원장에게 넘기기 부끄러운지 부랴부랴 기일을 지정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고등법원장들은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한 사건을 맡아 처리 중이다. 
서울고법에서는 지난 2월 20일 이후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한 25건을 고등법원장이 맡고 있다. 
2심 판단이 대법원에서 왜 파기됐는지를 법원장이 고스란히 보게 되는 것이다. 
판례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거나 사실관계 인정이 잘못되는 등 오류도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2심 판사들이 먼저 사건 설명을 하거나, 머쓱하게 ‘죄송하다’고 인사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한 고법 관계자는 “법원장이 직접 재판을 맡으면서, 재판을 더 신속하고 충실하게 하려는 일종의 ‘긍정적 부담’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이른바 ‘법원장 재판’이 진행되자, 일부 판사의 무책임함이나 도덕적 해이도 드러나고 있다고 한다. 
수도권의 또 다른 법원은 법원장이 처음부터 사건을 배당받는 대신, 접수 후 2년 6개월을 넘긴 ‘장기 미제 사건’을 재판부가 자율적으로 법원장에게 넘길 수 있도록 했다. 
법원장이 ‘악성 미제 사건’ 처리를 돕기는 하겠지만, 가능하면 재판부 자체적으로 2년 6개월까지 끌지 말고 신속하게 처리하라는 조치였다.


그러나 한 재판부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재판을 열면서 질질 끌어오던 사건을 2년 6개월이 지나자 곧바로 법원장에게 넘겼다고 한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다른 재판부도 슬금슬금 사건을 법원장에게 맡겨 총 5건이 법원장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한 판사는 “더 신속하게 처리해야겠다는 마음보다는, 법원장이 일손을 돕게 됐다고 내심 반기는 판사도 적지 않다”고 했다.


법원장들은 재판 지연을 해소하려면 법으로 정한 판사 ‘3214명’부터 대폭 늘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 법원장은 “지금 우리나라 법원은 판사 1명당 사건 처리 건수가 독일의 4배, 일본의 2배가 넘는 실정”이라며 “판사 수부터 늘려 재판 지연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법원장은 “몇 년씩 걸리는 감정(鑑定) 절차를 개선하고, 어려운 사건을 미루지 않도록 근무 평정을 인사에 반영하는 등 현실적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24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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