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에 사는 박모(29)씨는 부모님과 한 번도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다.
대학 졸업 후 5년 넘게 취업 준비생으로 지내고 있어 돈이 필요할 땐 ‘아빠 카드’를 쓴다.
공무원 시험에 몇 년간 도전했다가 낙방한 그는 최근 제빵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다니고 있다.
박씨는 “아버지가 곧 퇴직을 앞두고 있어 언제까지 부모님 신세를 질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했다.
서른을 전후한 나이에도 부모 집에 얹혀사는 청년들은 취직·결혼·출산이 모두 늦어지는 ‘지각 사회’에서 흔한 풍경이 됐다.
2022년 기준으로 부모에게 얹혀사는 한국의 20대 비율은 81%로 자료가 집계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국 가운데 1위다. OECD 평균(50%)의 1.6배에 달한다.
20대의 지각 취업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16일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15~29세 취업자들이 대학 등 최종 학교를 졸업한 후 첫 직장을 얻기까지 걸린 기간은 평균 11.5개월로 작년에 비해 1개월가량 늘었다.
관련 통계가 집계된 2004년(9.5개월) 이후 역대 최장 기간이다.
늦깎이 취업에라도 성공한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다.
김모(29)씨는 3년 반 전 서울에 있는 한 사립대 경영학과를 나왔지만, 부모 집에 얹혀살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다.
김씨처럼 3년 넘게 취업을 알아보고 있는 15~29세 취업 장수생은 올해 5월 기준 23만8000명으로 전체 미취업자의 18.4%에 달했다.
이 비율은 전년(17.3%)보다 1.1%포인트 늘었고, 2013년 5월(18.8%) 이후 11년 만에 가장 높다.
전문가들은 지각 사회의 원인으로 일자리를 둘러싼 청년과 기업 간의 미스매치(불일치)를 꼽는다.
글로벌 경쟁과 저성장에 노출된 기업들이 검증된 경력 사원을 선호하면서 신입 사원을 뽑는 취업문은 바늘구멍처럼 좁아졌는데, 취업 준비생들은 임금이나 근로 조건이 좋은 대기업·전문직을 선호하기 때문에 취업 경쟁이 갈수록 심해진다는 것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 학업을 마치고도 직장을 얻지 못한 이들 가운데 31.7%는 취업 준비생이나 가정 주부도 아닌데 ‘그냥 시간을 보낸다’거나 ‘여가 생활을 한다’고 답했다.
관련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2008년 이후 역대 최고치다.
과도한 수도권 집중도 지각 사회를 가속화하는 요인이다.
황명진 고려대 공공사회학부 교수는 “서울 등 수도권에서 번듯한 대기업 정규직을 다니려는 수요만 늘다 보니 취직 준비도 길어지고 독립이나 결혼, 출산 등 다음 단계도 줄줄이 늦어지는 것”이라며 “한국의 수도권 밀집 현상이 심하다 보니 경쟁 심리도 강화돼서 결혼 등을 위한 ‘눈높이’도 따라 올라가는 것”이라고 했다.
서울의 한 IT(정보기술) 기업에 다니는 최모(34)씨는 “10평이 조금 넘는 빌라 전세금 대출을 갚느라 돈이 쌓이지 않는다”며 “결혼은 포기하기 직전”이라고 했다.
지각 사회는 한국이 심하긴 하지만, 다른 나라들도 겪고 있는 현상이다.
일본에서는 저성장이 장기화하면서 부모에게 얹혀살며 생활비를 받아 쓰는 20대를 뜻하는 ‘패러사이트 싱글’(기생충 독신)이 사회적 문제다.
일본은 법정 성년인 만 18세 이상을 ‘오토나(大人)’라고 하지만, 실제 부모에게서 독립해 가정을 꾸리는 ‘이치닌마에(一人前·1인분 몫을 한다는 뜻)’가 돼야 진정한 어른이라고 본다.
이지평 한국외대 특임교수는 “장기 불황으로 비정규직이 늘면서 일본 청년 가운데 ‘이치닌마에’를 하는 나이가 점점 늦춰지고 있다”고 했다.
부모에게 얹혀사는 20대 비율이 80%로, OECD 회원국 가운데 한국에 이어 둘째로 높은 이탈리아의 경우 30·40대 자녀가 부모 신세를 지는 ‘밤보치오니(bamboccioni·다 큰 아기)’ 현상으로 몸살을 겪고 있다.
지난해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주에 사는 70대 여성이 40대 두 아들이 계속 집에 얹혀살자 법원에 소송을 내는 일이 벌어졌다. 법원은 두 아들에게 연말까지 집을 나가라고 판결했다.
중국은 ‘컨라오족’(노부모를 뜯어먹는 자녀), 영국은 ‘키퍼스’(kippers·부모의 연금을 축내는 자녀) 같은 표현이 유행한다.(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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