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늘도 재밌게 놀다 와!” “어머님,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고 오세요.”


지난 21일 오전 8시 서울 송파구의 한 빌라촌. 12인승 회색 스타렉스 차량이 구석구석 누비면서 원생들을 태웠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들이 차에 올라탈 때마다 40~50대로 보이는 중년 여성들이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원생들은 차 안에서 도란도란 수다를 떨었다. 
80대 한모씨는 동승한 기자에게 누구냐 묻지도 않고 “손이 차네” 하면서 손을 꼭 잡았다.


원생 7명을 태운 스타렉스는 1시간 후 강동구의 6층 빌딩 앞에 도착했다. 
이들이 이날 하루를 지낼 곳은 빌딩 5층에 위치한 90평짜리 어르신 주야간보호센터다. 
경증 치매나 노인성 질환이 있는 고령자들을 돌봐주는 민간 시설이다. 
그림 그리고 노래 부르고 낮잠도 자고 급식까지 주는 일과가 유치원과 닮았다고 해서 ‘노치원(노인들이 다니는 유치원)’이라고 불린다. 
부슬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였지만, 원생 30명 중 26명이 출석했다.


노치원에선 요양보호사들이 선생님이다. 
1교시는 아침 체조. “어르신, 팔을 들어서 쭉쭉 피세요.” 수업 시간에 율동을 따라 하지 않는 ‘불량 학생’을 요양보호사 권혜정씨가 조용히 달랬다. 
권씨는 “문 바로 앞에 있는 화장실까지 어르신을 안전히 모시고 가는 것도 중요한 업무”라고 했다.


점심 시간엔 선생님이 음식을 담은 식판을 나눠줬다. 
잡곡밥과 호박 새우젓국, 돈육 두루치기, 비름나물 무침 등이 나왔는데, 모두 식판을 싹 비웠다. 
치약을 묻힌 칫솔과 양치컵도 선생님이 준비해 줬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강동구의 노인 주야간보호센터 ‘엄마를 부탁해’에서 어르신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공을 던지며 실내체육 활동을 하고 있다.>

 



오후 1시 30분 실내 체육 시간. 원생들이 팀 대항 공놀이를 했다. 
점수판 위로 각자 공을 3번씩 굴리고, 합산 점수가 높은 팀이 이기는 방식이다. 
최고점이 나오면 물개 박수를 쳤고, 0점이 나오면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공놀이가 끝나자 미술 시간이 시작됐다. 
“튤립은 무슨 색으로 칠해볼까요” “어르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뭐예요?” 
가벼운 치매를 앓고 있는 이모(86)씨는 12색 색연필 세트에서 검정, 초록, 갈색을 제외하고 알록달록한 색만 꺼내들었다.


이씨는 이날 새벽 6시에 일어나 하늘색 꽃무늬 셔츠를 골라 입고, 같이 사는 딸의 화장품도 얼굴에 톡톡 발랐다. 

이씨는 “전에는 인생이 단조로웠는데 이곳은 내게 오아시스 같다”며 “초등학교를 다시 다니는 기분이 들어 즐겁다”고 했다. 보호자 만족도도 높다. 
윤모(60)씨는 “시어머니가 노치원에서 균형 잡힌 식사를 하셔서인지 살도 찌시고 며느리 입장에선 감사할 따름”이라며 “효자도 이런 효자가 없다”고 했다.


이곳 노치원 학생들의 평균 연령은 85세. 왕언니는 95세이고, 막내는 75세다. 
‘예쁜이’라는 별명을 가진 막내 김모(75)씨는 “언니들 만나서 농담도 하고 웃다 보면 아픈 것도 싹 낫는 기분”이라며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출석했다”고 했다.


6년째 노치원을 운영하고 있는 손근영 대표는 “노치원에서 어르신들이 규칙적으로 일상을 보낼 수 있어서 보호자들은 걱정을 덜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면서 “일본엔 어르신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다양한 돌봄 시설과 프로그램이 많은데 우리나라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치원은 지난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가 시행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모든 국민은 매달 건강보험료에 추가로 장기요양보험료(건보료의 12.81%)를 내고 있는데, 이를 재원으로 건보공단이 노인장기요양 등급을 받은 고령자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용료는 이용 시간, 노인의 장기요양 등급, 비급여로 시설에서 책정하는 식비와 간식비 등에 따라 달라진다. 
보통 하루 8시간 이용 기준으로 하루 식비와 간식비 5000원을 포함한 노치원 한 달 이용료는 120만원대다. 
하지만 이용자는 하루 1만원대의 본인 부담금만 내면 된다. 장기요양보험에서 최대 85%까지 지원하기 때문이다. 
시설마다 프로그램은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체조·율동 같은 신체 활동과 음악·미술 같은 인지 활동이 많은 편이다.


허준수 숭실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주야간보호센터는 어르신들이 집 밖으로 나와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해주기에 과중한 가족 부양 부담을 줄여준다”면서 “다만 국가가 운영하는 비율은 1% 미만이고 대부분 민간이 운영 중인데, 이들이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잘 감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2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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