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난 예전에 쓰던 일기 대신 사진을 찍어서 기록하는 '사진 일기'를 쓴다.
하루의 끝자락에 따로 글을 쓰기 어려우니 하루 중 아무 때나 메모하듯 사진을 찍는다.

 


어린 시절 그림일기 이후 세상을 다시 시각적으로 기억하고 저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것과 찍혀서 기억되는 것은 조금 다른 입장인 것 같다.

 


며칠 전 일이다. 동네 안과에 갔다.
3층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땐 작고 허름한 의원을 상상했는데, 막상 문을 열고 들어서 보니

콘택트렌즈 안경점까지 들여앉힌 꽤 큰 병원이었다.
대기실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한 장 찍었더니, 간호사가 다가와 나직이 물었다.
"저, 사진 찍으셨어요?/ …네./ 왜요?/ …일기인데요./ 아, 네." 진료실에 들어가자 마르고

예민해 보이는 여의사가 깍듯이 묻는다.
"아까 사진 찍으셨지요?/ …네, …왜요?/ 이제껏 그런 경우가 없어서요."

 


'왜 그랬을까?' 병원 문을 나서면서 계속 궁금해졌다.
'왜 못 찍게 하지?'
하지만 상대편에서 보면 '왜 함부로 찍는 거야!'라고 여길 수도 있다.
나는 기억을 위해 찍지만, 상대방에게는 그것이 사실로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칫하면 악용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기록되고 남을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너도나도 찰칵찰칵 찍어대는 세상이다.
찍는 즐거움과 기록하는 열정에 몰두한 우리, '찍히는' 대상에 대한 존중은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130607)

-이성열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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