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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더 리퍼는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연쇄살인마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가장 ‘현대적인’ 연쇄살인범의 범주에서는 최고 고참이다.
19세기 말 빅토리아 후기의 영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이 희대의 인물은 근대사회의 총아인 대중 매체를 통해
전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킨 최초의 ‘스타’ 살인마였다.
또한 지문 채취나 혈액/체액 채취 추적 같은 근대적 수사방식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당시의 법의학적 수사망은 해박한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자행된 리퍼의 예술(!) 살인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면서 범인 추적에 난항을 겪었다.
당시의 법의학, 제도, 수사망 등 국가 장치들을 훨씬 앞질러 가며 조롱을 던진 리퍼에 대한 연구는 미국 역사를 통틀어
대통령에 대한 저서를 더한 숫자보다 많을 정도로, 리퍼 케이스에 대한 관심은 아직까지도 만만치 않다.
학문적 연구에서 단순한 호기심까지, 리퍼 케이스가 이토록 매혹적이기까지 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리퍼 케이스는
끝내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사건으로,
즉, 21세기에 살고 있는 법의학자나, <프롬 헬>을 통해 호기심을 가지게 된 관객이나, 리퍼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셜록 홈즈나 에르큘 포와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리퍼 케이스가 가진 최고의 매력인 셈이다.
그러나 리퍼가 본격적으로 언론에 드러나기 이전 유사한 창녀 살인이 있었다는 점 때문에, 종종 이 첫 번째 희생자에 대해서는
엠마 스미스 등의 다른 피해자들이 거론되기도 한다.
사실 당시만 해도 극심한 하류층에 속한 창녀들이 살해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따라서 단지 창녀만을 살해했다는 이유만으로 리퍼 케이스를 규정할 수는 없다.
그보다 리퍼 케이스를 규정해 주는 것은 바로 리퍼의 살인방식 (Modus Operandi). 5명의 창녀들은 각자의 정도는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모두 대범하고 정교하게 사체를 유린당했다.
대개의 사인인 칼로 목을 따는 과정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자행되었으며, 그 이외에도 사체 유린 역시 정확한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신속하고 깨끗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은 당시 런던 경찰이 인체와 해부학에 능한 직업을 가진 인물들로 용의망을 좁히는데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