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는 여인들과 평균 10년 주기로 동거를 했지만, 정식 결혼은 일생에 두 번만 했다.
여러 여인들 중 7명은 피카소의 작품에 영감을 준 중요한 인물들이다.

 피카소의 첫 여인은 페르낭드 올리비에. (1881 - 1966)
 

   


 피카소가 처음 사랑한 여자는 유부녀였다.
1904년 파리로 영구 이주했을 때 만난 프랑스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피카소의 모델이었고, 둘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피카소와 동갑내기로 1904년(23세)에 만났다.
검붉은 머리에 키가 크고 균형잡힌 몸매를 가진 육감적인 여인 올리비에는
항상 쾌활한 성격으로 피카소를 기쁘게 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절박한 생활을 묘사하던 "청색 시대"에 올리비에를 만난 피카소는 그녀의
헌신적 도움으로 침울한 청색을 벗고 "장미색 시대"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 백미가 "아비뇽의 처녀들"로 이 작품으로 피카소는 큐비즘을 개척했다.
그러나,이 시기에 피카소는 올리비에에게 등을 돌렸고 덕분에 올리비에는 피카소와의 모든 것을 청산해야 했다.


 다음으로 만난 여인이 에바 구엘. (1885 - 1915)

  


가냘프게 생긴 이 여인은 피카소가 차갑고 날카로운 분석적 큐비즘을 버리고 격정과 선율에
가득 찬 종합적 큐비즘으로 들어설 때 인도자 역할을 맡았다.
청순 가련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으로 1911년(30세)에 만났다.
피카소는 9년에 걸친 페르낭드와 동거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그녀를 선택한다.
유달리 몸이 약했던 에바는1차세계대전 이듬해인 1915년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죽는다. 
피카소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오히려 피카소를 비난했다.
그 이유는 육체적으로 허약한 마르셀을 혹독하게 다루었으며 그녀가 병을 얻었을 때 피카소는 전염될까 봐 혼자 이사를 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만난 여인은 러시아 발레단의 일원인 올가 코글로바. (1891 - 1955)

 


세번째 연인 올가는 발레리나로 귀족적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이었다고 한다.
사티의 음악에 디아길레프가 안무를 맡은 장 콕도의 발레 "페레이드"에 무대미술을 맡은 피카소는 36살에 25살의 발레리나 올가와 처음으로 결혼을 한다.
올가는 서민적이고 편안한 것을 즐겼던 피카소와 달리 깔끔하고 상류사회적인 기질을 가졌다.
그녀는 피카소의 첫 아들 파울로를 낳았으나 버림을 받는다.


 피카소는 곧 바로 열일곱 살 난 처녀 마리 테레즈 발터 (1909 - 1977)에게 눈을 돌렸다.

 

그녀를 6개월 동안이나 쫓아다닌 끝에 마리를 작업실로 데려와 초현실주의 때의 걸작
<거울 앞에 선 처녀>의 모델로 세울 수 있었다.
마리 테레즈는 순정에 가득 찬 청순한 여인이었다.
피카소에게 가장 창조적인 영감을 준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피카소가 죽었을 때 저승에서도 피카소를 보살펴야 한다며 자살한 여인이 바로
마리 테레즈였다.
그러나 그녀가 스물두 살 때 딸 마리아를 낳자마자 피카소는 몰래 앙리에트 마르코비치를
만나고 다녔다.
앙리에트는 마리 테레즈와 달리 성격이 급하고 날카로운 여자로 프로급 사진가이기도 했다.
피카소는 이지적이고 날카로운 앙리에트와 함께 스페인 내전 시기를 보냈다.
생애 최대의 걸작 <게르니카>는 앙리에트와 살 무렵에 그린 것이다.


  다섯번째 도라 마르 (1907 - 1997)

 

그녀는 "지성미"가 돋보이는 여성으로 대표작 <게르니카>를 그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친구인 폴 엘뤼아르의 소개로 만난 화가이며 사진작가.
현대 미술에 열중했으며 특히,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피카소는 40살이나 아래인 법대 출신의 지적인 처녀
프랑수아즈 질로 (1921 - )에게 추파를 던진다.  

  

피카소가 62세 때 그녀 나이는 22세였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술학도였으며 피카소가 63세 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와  
피카소의 작업실에 살림을 차렸다.
완벽주의자이고 독점력이 강했던 프랑스와즈는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는다.
피카소는 이 때에 자신의 아이들을 소재로 해 생동감 넘치는 초상화들을 남겼다.
그녀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와  피카소의 작업실에 살림을 차렸다.
이 무렵 피카소는 공산당에 가입했다.
스페인 내전의 참혹상을 세계에 고발한 <게르니카>로 명성이 드높던 피카소는 "프랑코 독재를 반대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은 공산당에 입당하는 것뿐" 이라며 입당 원서를 제출했다.
이 극적인 사실을 취재하기 이해 열 일곱 살 난 여기자 주느비에브가 찾아왔고 그녀는 취재가 끝난 뒤에도 자주 찾아왔다.
친구 사이인 프랑수아즈와 주느비에브는 서로 이 사실을 모른 채 지냈다.

 결국 피카소의 애정 행각을 알게 된 프랑수아즈는 피카소의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먼저 그를
버리기로 결심한다.
늘 자신이 여자 관계를 결정짓던 피카소로서는 이러한 사실이 몹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 와중에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들 딸을 법정투쟁을 통해 피카소의 호적에 입적시키는 데 성공하고, 그녀의 자식들은 뒷날 어마어마한 피카소의 재산을 물려받게 됐다.

 프랑수아즈가 떠난 뒤 피카소는 더욱 열정적으로 수많은 여인들을 만났다.
이미 70살이 넘은 피카소였지만 젊은 여인에 대한 열망은 그칠 줄 몰랐다.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이 된 자클린 로크 (1927 - 1986)




그녀는 커다랗고 짙은 눈망울을 지닌 지중해 풍의 여인이다.
피카소 나이 72세에 만났다.
이 시기는 피카소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시기로 그녀는
피카소가 말년에 오직 작품에만 전념하도록 도와 줬다고 한다.
이혼 경험이 있는 자클린은 1961년 피카소와 비밀 결혼식을 올린다.

 훗날, "서른 살의 젊은 여인이 어떻게 곧 여든이 되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냐"는
말에 그녀는,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과 결혼했어요. 오히려 늙은 사람은 나였지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피카소에게 언제나 "나의 주인님"이라 부르며 헌신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바쳤다. 
또한, 그녀는 피카소의 사후  유산을 둘러싼 법정투쟁과 다른 여자들이 낳은 피카소 후손들과의 핏줄 싸움까지도 책임졌다.

 20세기 현대 미술의 거장 피카소는 197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그가 만났던 수많은 여인들과 후손들은 한결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피카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 테레즈는 목을 매달았으며 자클린은 1986년 마드리드 전시회를 앞두고 권총 자살을 했다.
올가와 피카소 사이에 난 아들 파울로는 약물 중독으로 죽었고, 피카소의 손자 파블리토는 피카소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왔다가 자클린이 완강하게 거절하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피카소가 남긴 작품은 무려 4만 5000점에 달한다.
회화 1885점, 조각 1228점, 도자기 2280점, 스케치 4659점,  3만 점에 달하는 판화 작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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