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대학가에선 ‘인문학 부흥’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전국 대학 도서관에서 최근 5년간 900만권 가까운 장서를 폐기한 것으로 1일 나타났다.
책이 가득한 어두침침한 서가보다는 카페나 독서실처럼 쾌적한 공간을 추구하는 트렌드에 맞춰 ‘불필요한’ 책을 폐기한다는 취지지만, 후세를 위한 지식 전수의 수단인 책을 마구잡이로 없애는 것은 문제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본지가 학술정보통계시스템에 등록된 전국 대학의 2019~2023년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23년 3월 기준 5년간 대학에서 폐기된 장서는 874만6540권이었다.
폐기 장서 2020년 110만여 권, 2021년 165만여 권, 2022년 205만여 권, 2023년 251만여 권으로 증가 추세다.
보유 장서가 줄어든 대학도 홍익대·울산대·인하대 등 전국 31곳, 학술정보통계시스템에 등록된 전국 대학 217곳 중 14%다.
대학 관계자들은 “최근 학생들은 도서관을 ‘서가에서 책을 찾아 읽는 공간’보다는 ‘취업·자격증 등 수험 준비를 하는 공간’으로 여긴다”며 “도서관 공간이 부족하다는 민원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경상국립대는 지난 5년간 책 37만여 권을 버려 ‘장서 폐기 1위’를 기록했다.
학생들이 수년 전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늘려달라’고 건의하자 3개 층이던 자료실을 2개 층으로 줄이고 열람실을 늘리면서 장서를 폐기했다.
홍익대도 2022년 세종캠퍼스 도서관 1층 공간에 휴식 공간과 라운지를 마련하며 지난해에만 10만권 가까운 책을 버렸다.
이런 과정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료나 희귀 고서(古書)가 폐기 위기를 겪기도 한다.
울산대는 지난해에 중앙도서관 본관 1~5층 서가를 없애고 디지털 열람실, 전시관, 노트북존 등을 만들겠다며 보유 장서 94만여 권 중 절반에 가까운 45만권 폐기를 추진해 논란이 일었다.
폐기 목록에는 1852년 런던에서 출판된 찰스 매케이의 ‘대중의 미망과 광기’ 초기 판본,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잡지 ‘조선’(朝鮮) 50여 권 등이 포함됐다.
“없애면 안 되는 책들”이라는 지적에 울산대는 도서를 재선별, 27만여 권을 폐기했다.
일부 대학에선 “자리만 차지하고 무겁기만 한 종이책을 계속 소장하느니, 디지털화한 뒤 폐기하는 것이 낫다”는 결정에 따라 장서를 폐기하고 있다.
인하대는 지난 5년간 12만여 권을 버렸다. 인하대 관계자는 “디지털로도 보급이 되는 단행본과 학술 잡지를 비롯, 이용이 적은 도서를 코로나 시기에 폐기했다”고 했다.
하지만 일선 교수와 연구자들은 “종이책을 마구잡이로 버리는 건 후세에 재앙이 될 수도 있다”며 “지식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건 종이이지 불안정한 디지털 매체가 아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탈리아 작가 움베르토 에코(1932~2016)는 2012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자신의 ‘장미의 이름’ 종이책과 전자책 ‘킨들’을 집어던지는 퍼포먼스를 했다. 킨들은 산산조각이 났지만 종이책은 멀쩡했다.
그는 당시 본지 인터뷰에서 “종이책이 사라진다고 하지만 전자책이 이렇게 취약할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고 했다.
1990~2000년대 각 대학은 ‘100만권 장서 확보’ 운동을 경쟁적으로 벌였다.
원로 학자나 유명 인사의 장서를 기증받으려 백방으로 뛰었고, 서울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서 ‘차떼기’로 책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장서 폐기 열풍’이 부는 대학가에서 은퇴를 앞둔 노교수들은 “대학 도서관에서 ‘자리가 없다’며 내 책을 받아주지 않으니 연구실에서 책을 버리고 있다”며 격세지감을 호소하고 있다.
장서 폐기로 인한 불편은 이미 학계 전반으로 퍼졌다.
김윤희 한남대 사학과 교수는 “과거 잡지는 소중한 사료인데 도서관에서 마구잡이로 없애 국립중앙도서관까지 찾아가는 상황”이라고 했다.
윤석호 부산대 사학과 교수는 “연구 필수 자료를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요즘 대학생들은 퀴퀴한 서가보다는 카페 같은 도서관을 원하는 추세여서 도서관을 증축하지 않는 한 장서를 줄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학들은 교육부에 국가가 운영하는 ‘공동보존서고’를 만들어달라고까지 요청하고 있다고 한다.
이혜은 숙명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도서관이라는 공간은 인류 문명의 발상지나 다름없는데 지나치게 시류에 따라 도서 폐기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며 “지식 보존·전수에 대한 자각 없이 마구잡이로 책을 버리는 건 문제”라고 했다.(2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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