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A사에 다니는 이모(43) 차장은 다음 달 결혼을 앞두고 청첩장을 돌리고 있다. 
31세에 취직해 뒤늦게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연애도 결혼도 늦었다고 한다. 
그는 “아이를 갖고 싶은데 빨리 낳더라도 아이가 대학에 입학할 60대 중반까지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대기업 B사 이모(44) 부장은 작년 말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이미 육아휴직을 쓴 아내 대신 유치원생 아들을 돌보겠다는 ‘부장님의 육아휴직’ 소식에 회사는 술렁였다.


우리나라가 취업과 결혼, 출산이 점점 늦어지는 ‘지각 사회’에 접어들고 있다. 
30대 초반 신입 사원과 40세 전후 신랑·신부, 40대 초반의 아기 아빠·엄마를 쉽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취업·결혼·출산은 1980~1990년대까지 20대에 해결하지 않으면 “늦었다”는 소리를 들었던 ‘성인 인증 3종 세트’였는데, 지금은 30·40대로 밀리고 있다. 그만큼 인생 시계가 늦춰진 것이다.

 

 




지각 사회가 장기화할 경우 자녀 학자금을 대려고 환갑을 훌쩍 넘겨서도 일하는 60대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사회적 제도 개선으로 취업·결혼·출산 각 단계에 진입하는 시기를 앞당겨야 우리 경제의 성장 동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65세 이상 인구가 사상 처음으로 1000만명을 넘어서자 연금 개혁과 정년 연장 등 초고령화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1일 행정안전부는 지난 10일 기준 65세 이상 주민등록인구가 1000만62명으로, 전체 주민등록인구의 19.51%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를 넘으면 초고령 사회라고 부른다.


5년간 취업 준비생으로 지내다 올 1월 스타트업 회사에 취업한 이모(31)씨는 취직 전인 지난해 아버지 환갑을 맞았다. 
그는 “내 월급으로 아버지에게 ‘한 턱’을 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했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서른이 됐는데도 은퇴한 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아 쓰는 일이었다. 
그는 “가족에게 짐이 된 것 같아 불효자가 된 심정으로 죄송스러웠던 5년이었다”고 했다.



번듯한 월급쟁이의 등용문이었던 대기업 신입 사원 공채가 줄어드는 등 취업 시장이 좁아지면서 20대의 ‘취업 지각’ 현상은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 
취업 포털 인크루트가 작년 9월 취업 준비생과 직장인 등 897명에게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들은 신입 사원 나이의 마지노선으로 남자는 평균 33.5세, 여자는 평균 31.6세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년 전 같은 조사에서 남자는 31.8세, 여자는 30세였는데, 각각 1.7세, 1.6세 상승했다. 
그만큼 30대 초반 신입 사원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취준생과 직장인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20대의 취업이 늦어지는 반면, 환갑을 넘긴 60대 초반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20대 초반을 넘어선 지 오래다. 
경제활동 참가율은 인구 대비 ‘취업자+실업자’의 비율로, 직장 생활을 하거나 직장을 구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의 비율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작년 만 20~24세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48.5%로, 60대 초반(65.5%)보다 17%포인트나 낮았다. 2005년까지만 해도 20대 초반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60대 초반보다 높았는데, 2006년부터 역전됐다. 
만 18세에 대학에 입학해 4년제 대학을 졸업한다고 가정해도, 여성은 빠르면 22세, 군 복무를 마친 남자는 24세부터 사회에 진출할 수 있다. 
더 나은 취업을 위해 ‘대학교 5학년’ 생활을 이어가는 등 지각 인생을 선택한 20대가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늦깎이 취업에 성공해도 결혼은 또 다른 문제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홍모(32)씨는 여자 친구와 교제한 지 2년 다 돼 가는데, 결혼 얘기를 선뜻 못 꺼내고 있다. 생각은 굴뚝같지만, 신혼집 장만이 고민이기 때문이다. 
홍씨는 “서울 집값이 워낙 높아 직장 근처에 ‘원룸’ 얻는 것도 엄두가 안 나는 상황”이라며 “결국 빚을 잔뜩 내야 하는데, 얇은 지갑에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요즘엔 입사 직후 1~2년을 버티지 못해 퇴사하는 경우도 많아, 결혼 속도를 더 늦추기도 한다


‘결혼 지각’은 ‘출산 지각’으로 직결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성이 처음 결혼하는 평균 나이는 지난 1993년 약 25세에서 작년 31.5세로 30년 동안 약 6.5세 올랐다. 
같은 기간 여성이 첫아이를 낳는 평균 나이도 약 26.2세에서 33세로 약 6.8세 높아졌다. 
지각 결혼·출산이 늘면서 어린 자녀를 키우는 대기업 임원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유치원생 딸을 키우는 대기업 C사 김모(47) 이사는 “아이가 빠른 친구들은 대학 입학식에 간다는데, 나는 유치원 참관 수업을 다니고 있다”며 “상무를 천천히 다는 게 목표”라고 했다.


40·50대 직장인이 육아 때문에 휴직하는 것도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다. '세종 관가에서는 간부급인 과장이 육아휴직을 쓰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한 중앙 정부 부처에선 지난달 이후 과장급 2명이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다른 중앙 부처 과장도 40세인 2년 전 첫째를 낳아 육아휴직을 썼다. 
한 중앙 부처 과장은 “40대에 첫아이를 출산한 동기에게 ‘늦게까지 애를 키워야 하니 네가 장·차관 달아라’고 농반진반의 덕담을 건네기도 한다”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기준으로 40세 이상이 쓴 육아휴직은 4만858건으로 30세 미만 (1만6740건)의 2.4배다. 육아휴직 통계가 처음으로 집계된 2010년만 해도 30세 미만의 육아휴직이 40세 이상의 19배에 달할 정도로 40대 육아휴직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20대 출산이 줄고 40대 출산이 늘면서 격차가 점차 좁혀졌고, 2019년 들어 40세 이상의 육아휴직 건수가 30세 미만을 처음으로 앞섰다.(24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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