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오후 5시쯤 서울 종로구 ‘락희거리’. 이 거리 약 200m 구간은 노인 보호 구역(실버존)이다.
실버존은 교통 약자인 노인을 교통사고 위험에서 보호하고자 양로원, 경로당, 노인 복지 시설 등에 시장 등 지자체장이 지정하는 곳을 가리킨다.
운전자의 통행 속도를 구역에 따라 30~50㎞로 제한하고, 주정차 금지나 속도 위반 등에 대한 범칙금을 2배로 매기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이 거리엔 오토바이 10여 대와 차량 5대가 버젓이 주차돼 있었다.
10여 분 지켜본 동안 노인 110여 명이 앉아 있거나 걸어 다녔는데, 주정차된 오토바이와 행인 사이로 10분간 오토바이가 15대 지나갔다. 제한속도도 지키지 않았다.
‘노인 보호 구역’이라고 적힌 표지판도 3개에 불과했고, 불법 주정차 단속 카메라도 없었다.
반면 같은 날 오후 5시 20분쯤 락희거리와 약 150m 떨어진 서울 종로구 운현궁 앞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의 분위기는 달랐다.
약 200m 거리에 주정차된 차량은 한 대도 없고, ‘어린이 보호 구역’이라는 표지판도 6개나 달려 있었다. 또 자기 차량의 현재 속도를 보여주는 속도판도 설치돼 있었다.
작년 전국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약 857만명. 전체 인구의 17%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도로를 걷다 사망한 사람은 1018명이고, 이 중 노인은 601명으로 무려 59%였다.
교통 관련 규제가 강화되고 자동차 기술 발전 등의 여파로 전체 사망자 숫자는 줄고 있는데 노인 사망자 비율은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갈수록 안전 조치가 강화되는 스쿨존과 달리 실버존은 사실상 유명무실한 상황이다.
우선 지난해 말 기준 전국에 지정된 스쿨존은 1만6759곳인데 반해, 실버존은 2673곳에 그친다. 예산 지원도 모자란다.
2021년 행정안전부가 마련한 지역교통안전환경개선 계획에 따르면, 스쿨존 개선 예산은 약 1988억원이지만 실버존 예산은 단 70억원에 불과했다.
실버존은 각종 교통 규제 적용도 받지 않는다.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스쿨존에는 ‘시속 30㎞ 이내로 통행 속도를 제한’한다는 조항이 있지만, 실버존에는 ‘통행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한다는 내용뿐이다.
그런 까닭에 경찰·지자체 등은 실버존에서 시속 30~50㎞ 안팎으로 재량껏 속도제한을 하고 있다.
제한속도를 정하더라도 이를 지키게 할 방법도 없다. 단속 카메라 설치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달 31일 오후 2시쯤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청과물 시장 앞 한 횡단보도.
1시간쯤 지켜본 폭 20m짜리 이 보도에선 신호가 바뀔 때마다 장년층 40~50명이 길을 건넜다.
하지만 횡단보도를 미처 건너지 못한 노인들이 있어도 속도를 줄이는 차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 일대 1㎞ 구간은 실버존이지만 과속 단속 카메라나 과속방지턱은 하나도 없었다.
20년 넘게 매일같이 시장에 온다는 박모(86)씨는 “노인 보호 구역이란 게 있다는 것 자체를 처음 들었다”고 했다.
스쿨존은 지난 2020년 3월부터 이른바 ‘민식이법’이 시행되면서 아예 과속 단속 카메라와 신호등, 과속방지턱 설치가 의무화됐다.
그러나 실버존은 논의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외면받고 있는 것이다.
지자체가 실버존을 확대하려고 해도 지역 주민이나 상인들 반대에 부딪히는 경우도 많다.
서울시가 지난해 시 조례를 개정해 시내 4곳의 전통 시장 일대를 실버존으로 지정하려다 1곳만 설치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실버존은 주정차를 못 하게 하는데, 손님 불편이 커지면서 상권이 침체될 수 있다는 반대가 컸다고 한다.
경찰이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국내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노인 사망 비율이 급격하게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 일선 교통경찰은 “노인의 경우 신체 능력이 떨어져 길을 건널 때 오래 걸리고 순간 상황 판단 능력도 떨어져 위급한 순간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렵다”면서 “몸도 약해 작은 사고도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고 했다.
박무혁 도로교통공단 교수는 “스쿨존이라는 이슈에 묻혀서 실버존은 방치됐다고 느낄 정도로 질적·양적으로 미흡한 상황”이라고 했다.(22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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