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실린 사진은 많은 경우 잔혹하거나 에로틱하다.
스위스 큐레이터 다니엘 지라르댕과 변호사 크리스티앙 피르케르가 사진의 역사를 통틀어 관재(官災)와 구설이 그치지 않은
문제작 74점을 골랐다.
보고 있으면 불편한데 홀린 듯 눈을 뗄 수 없거나, 보지 않으려고 눈을 돌렸는데 강렬한 잔상(殘像)이 사라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사진 왼쪽)1993년 타임지가“우크라이나인들에게 욕을 본 유대인 처녀”라는 설명을 붙였다가
우크라이나인들로부터 거센 항 의를 받았던‘유대인 학대’(작자 미상·폴란드·1941년),
(사진 오른쪽)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군이 쿠르드반군을 총살하는 장면을 찍은‘쿠르드 반군의 처형’은
1980년 퓰리처상을 받았지만 생명의 위협 때문에 2006년에야 촬영자가 밝혀졌다.
1945년 4월 29일 연합군이 독일 뮌헨 다카우 수용소를 해방시켰다. 미국 사진가 리 밀러는 충격 속에 학살 현장을 촬영했다.
미군이 숙소를 내줬다. 아돌프 히틀러의 안가였다.
만 레이의 연인이자 모델이었던 밀러는 서슴없이 발가벗고 히틀러의 욕조에 들어갔다.
동료 종군기자 데이빗 셔먼이 목욕하는 그녀를 찍었다.
저자는 사진에서 '상징적인 복수'를 읽는다. 밀러와 셔먼은 악당의 은밀한 처소에 난입해 악행에 대한 역겨움을 씻어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1930년대 초반 혁명동지 3명과 모스크바 볼가 강변을 산책했다.
동행한 셋 중 한 명이 인민위원 니콜라이 레조프였다. 그는 1938~39년 스탈린의 명으로 대규모 숙청과 처형을 지휘했다.
권세는 짧았다. 레조프의 후임자가 역시 스탈린의 명을 받들어 레조프를 총살했다.
레조프가 혁명동지에서 반동분자로 몰락한 그 순간부터 소련의 모든 공식 사진에서 레조프는 사라졌다. 스탈린의 작품이었다.
(사진 왼쪽)‘스펜서 투니크의 사진 설치 작품’(이자벨 파브르·스위스·2007년),
(사진 오른쪽)영국 최초의 스트 리커(streaker·대중 앞에서 이유없이 발가벗고 달리는 사람)를 찍은‘더 트위커넘 스트리커’
(이언 브래드쇼·영국·1974년).
1975년 미국 사진가 개리 그로스가 11살 브룩 실즈의 누드를 찍었다.
미소녀가 발가벗은 몸에 오일을 바른 채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진이 플레이보이지(誌) 자매지와 뉴욕 옥외 광고판을 도배했다.
실즈는 6년 뒤 소송을 냈다.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촬영하긴 했지만 그로스가 끊임없이 복제판을 만드는 건 너무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녀는 졌다. 법원은 "도색사진이 아닐뿐더러 계약도 적법했다"고 판단했다.
실즈가 평소 성적인 매력을 강조해 인기를 누린 것도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그로스는 이 소송으로 평판을 잃고 빈털터리가 됐다. 그래도 어떤 의미에선 운이 좋았다.
14년 뒤 조크 스터지스는 사춘기 소녀 세 명의 누드를 찍었다가 파렴치범으로 경찰에 불려갔다.
광고 사진을 찍는 그로스와 달리 스터지스는 돈 벌려고 찍은 누드가 아니었다.
그는 소신에 따라 자연 속에서 나체 생활을 하는 가족을 만나 그들의 동의를 받고 일상을 촬영했다.
그런데 사진을 채 인화하기도 전에 현상소 직원의 신고로 연방검찰에 기소됐다. 연방 대배심은 1991년 스터지스를 무혐의 처리했다.
1993년 3월 26일 뉴욕타임스지에 뼈만 남은 수단 꼬마가 굶주림에 죽어가는 사진이 실렸다.
독수리가 몇 걸음 뒤에서 꼬마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33살 사진가 케빈 카터는 이 한 장으로 퓰리처상을 탔다.
그러나 영광은 거기까지였다.
카터는 사진을 찍은 뒤 독수리를 쫓아버리고 자신도 멀리 도망쳤다. 대중은 분노했다.
"죽어가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사진 한 장 찍어 상만 챙기다니, 독수리보다 더한 모리배 아니냐."
카터는 퓰리처상을 탄 지 두 달 만에 자살했다.
로버트 카파가 1936년 스페인내전 때 찍은 '공화파 병사의 죽음', 미항공우주국(NASA)이 1969년 배포한 달 착륙 사진은
서로 다른 맥락에서 조작설이 그치지 않았다.
조작은 언제나 '프로파간다'와 관련이 있고, 조작 사실이 들통날 때 프로파간다는 블랙코미디가 된다.
1989년 12월, 로버트 마스를 포함한 수많은 외신기자들이 루마니아의 조그만 마을 티미쇼아라에 달려갔다.
독재자 차우셰스쿠에 맞서 싸우는 민주화 세력이 "민간인 학살 증거를 잡았다"면서 이 마을로 기자들을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거대한 시체공시장으로 안내됐다. 부패한 시신 20여구가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마스는 중년 남자가 아내와 아기의 시신 앞에서 눈물 흘리는 장면을 찍었다. 국제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진실이 드러났다.
민주화 세력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공동묘지에서 멀쩡한 시신을 파내 학살 희생자라고 허풍을 떤 것이다.
사진 속 여성은 간경화, 아기는 식중독으로 사망했고, 울고 있는 남자는 이 둘과 아무 혈연관계가 없었다. (110430)
<논쟁이 있는 사진의 역사> 다니엘 지라르댕·크리스티앙 피르케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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