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기준 우유의 원재료인 원유(原乳) 값은 전년 평균보다 6.17% 올랐다.
그런데 시중에서 판매되는 우유의 소비자가격은 15.24%나 올랐다. 완제품 가격이 원재료 값보다 훨씬 큰 폭으로 오른 것이다.
대두유·카놀라유·옥수수 등 식용유의 원재료 값은 1년 전보다 12.93% 떨어진 반면, 식용유 제품값은 평균 12.67% 상승했다.
<14일 오전 서울 한 대형마트에서 고객들이 매대에 진열된 유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원재료나 인건비 상승을 틈타 제품 가격을 과도하게 올리는 식품업계의 ‘그리드플레이션(greed+inflation·기업 탐욕에 따른 물가 상승)’으로 서민들의 먹거리 지출 부담이 늘어나고 있다.
14일 본지가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의 ‘소비자물가정보서비스’에서 원재료와 제품 가격 상승률을 비교할 수 있는 가공식품 21개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1년 동안 케첩과 마요네즈, 분유, 식용유, 우유 등 16품목의 제품값 상승 폭이 원재료보다 높았다.
재료값에 비해 제품값이 적게 오른 품목은 햄과 맛김, 오렌지주스 등 5품목이었다.
식품업체들이 밀가루나 원유, 원당 등 원재료 가격 상승분을 소비자에게 떠넘기는 수준을 넘어 추가 이윤까지 거둬들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분유는 원재료 가격이 24.65% 떨어졌지만 소비자가격은 9.58% 올랐다. 인건비·포장비 등 재료 이외의 다른 비용이 올라서 제품 가격을 올렸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원재료 가격 상승을 핑계로 제품값을 인상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식품업체들이 고물가 분위기에 편승해 연이어 제품 가격을 올리고 있지만, 정부가 리더십 부재로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름달 빵, 스타벅스 커피, 포카리스웨트, 빼빼로 과자.’
모두 식품업체가 올해 들어 원재료 가격과 인건비 등 부담이 커졌다며 가격을 올린 품목들이다.
소비자단체협의회 관계자는 “식품업체들이 연말연초만 되면 제품 가격을 올리는 게 관행이 됐다”며 “원재료 가격이 오를 때만 제품 가격에 반영하고, 정작 원재료 가격이 안정화됐을 때 제품 가격을 내리는 일은 없다”고 했다.
실제 본지가 소비자물가정보서비스에서 원재료와 제품값 상승률을 비교한 가공식품 21개 중에서는 지난해 원재료 가격이 떨어졌는데도 제품값이 오른 품목이 10개나 됐다.
토마토가 원재료인 케첩 가격이 대표적이다. 지난 2023년에는 주요 토마토 생산지인 이탈리아와 인도 등에서 작황이 부진했기 때문에 토마토 값이 크게 올랐다.
하지만 작년에는 국제 토마토 수급이 상대적으로 안정화됐지만, 케첩 가격은 여전히 오름세다.
지난 2023년 평균 대비 작년 12월 케첩 원재료 가격은 14.76% 떨어졌지만, 케첩 소비자가격은 되레 25.23% 올랐다.
식품업체들이 지난해 말 집중적으로 가격 인상에 나선 것을 두고 12·3 비상계엄 사태와 연이은 탄핵에 따른 정치 혼란을 기회로 삼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식품 물가를 관할하는 농림축산식품부에서 매달 식품업체들을 만나 가격 인상 자제를 요청하고 있음에도, 좀처럼 약발이 들지 않는 모양새다.
최철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계엄 이후 기획재정부를 비롯해 물가 관리를 책임져야 할 부서들의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보니, 업체들이 정부 관리가 느슨해진 틈을 타 제품 가격을 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식품업체들이 요청한 주요 원재료에 대해 할당관세와 부가가치세 면제 등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이 같은 지원에도 식품업체들이 연초에 줄지어 가격을 인상한 것은 ‘그리드플레이션’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올 초부터 식품업체가 수입하는 코코아 생두와 설탕, 오렌지 농축액, 토마토 페이스트, 가공용 옥수수 등 13품목에 할당관세를 적용하고 있고, 다음 달 1일부터는 코코아 파우더와 기타조제 파인애플 등 6품목에 대해서도 할당관세를 적용해주기로 했다. 또 커피와 코코아를 수입할 때는 부가세 10%도 면세해준다.
정부는 식품업체의 그리드플레이션에 대해 조사에 착수할 방침이다.
농식품부는 최근 할당관세가 우리 농산물 시장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 용역에 나섰는데, 여기서 식품업체가 수입하는 할당관세에 관한 분석도 함께 수행하기로 했다.
식품업체들이 할당관세를 받아 원재료를 들여와, 시장에 제품을 내놓기까지의 가격 변동을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식품업체들이 할당관세로 원재료 가격 인상 부담을 덜었음에도 소비자 가격이 낮아지지 않으면 업체들이 이익을 거두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기업을 어르고 달래서 가격 인상을 자제시키는 것은 오늘 올릴 가격을 내일로 미루는 ‘조삼모사’에 가까운 조치”라며 “주요 원재료 가격 등을 면밀히 조사하고, 이를 소비자에게 공개해 소비자들이 자체적으로 기업의 ‘그리드플레이션’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식품업체들은 “원재료 가격 상승은 제품 가격 인상 요인의 하나일 뿐이고, 그 외에도 제품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는 요인이 많다”는 입장이다.
한 식품업체 관계자는 “원재료가 가격에 큰 영향을 미치는 건 맞지만 전부는 아니다”라며 “인건비도 오르고 각종 포장재 비용과 물류비도 물가 상승에 따라 지속적으로 상승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가격 인상을 단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부터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오른 영향 등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또 다른 식품업체 관계자는 “원재료는 대부분 수입해서 쓰는데 최근 환율이 크게 상승해 부담이 커졌다”며 “가격 인상에 따른 소비자들의 저항을 잘 알면서도 불가피하게 가격 인상을 할 수밖에 없는 건 기업들도 버틸 재간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250315)
☞그리드플레이션(greedflation)
탐욕(greed)과 물가 상승(inflation)의 합성어로 기업들이 원재료나 인건비 부담이 늘어난 것을 틈타 제품 가격을 더 많이 올리면서 전체 물가가 오르는 현상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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