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서울대 학부생이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빌린 책 10선에서 ‘전공책’이 7년 만에 순위 밖으로 밀려난 것으로 2일 나타났다. 1~8위가 모두 문학이었다. 
서울대 관계자는 “전공 서적이 대출 상위권을 차지하던 ‘전통’이 깨져버렸다”고 했다. 
작년부터 2030세대 사이에선 이른바 ‘텍스트힙(text-hip)’ 열풍이 불었다. 
“단순히 멋져 보이려고 책을 집어들었다가 문학의 참맛을 깨닫고 말았다”는 젊은이가 많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텍스트힙이 반짝 유행이 아니라 세대 전체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이 작년 1월 1일부터 12월 27일까지 학부생들의 도서 대출 현황을 분석한 결과,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2021)가 1위였다. 
2~4위는 소설, 5·6위는 각각 산문과 수필, 7·8위도 모두 소설이었다. 
전공 서적 등 학술 도서가 서울대 도서관 대출 순위 10위에서 사라진 건 2017년 이후 처음이다.

 

 




불황과 취업난으로 대학생들이 소설이나 시를 읽기보단 학점을 따기 위한 전공 공부에 열중한 지는 이미 오래다. 게다가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과방(학과 휴게실)에서 선·후배들이 전공 서적을 돌려보는 문화가 퇴조하고 도서관에서 빌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학술 서적이 대출 순위 상위권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2023년엔 ‘음악의 원리’ ‘일반통계학’ ‘선형대수학’이 각각 2위, 4위, 10위였다. 
2021년엔 ‘안과학’ ‘음악의 원리’ ‘일반통계학’ ‘진화와 인간행동’이 10위 내에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대출 톱10 차트를 문학 작품이 거의 ‘올킬’해버리자 서울대 관계자는 “좀 놀라운 결과”라고 했다. 
다른 대학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지난해 고려대 학부생이 가장 많이 빌린 책 상위 10권 중 8권이 소설이었다. 
이화여대 역시 상위 10권 중 9권이 소설이었다. 서강대도 ‘파친코’ ‘채식주의자’ 같은 소설이 상위권에 진입했다.

 

 




학계와 출판계에선 “입시 경쟁 끝에 대학에 입학한 20대들이 텍스트힙을 계기로 ‘독서의 참맛’을 깨닫고 있는 국면일 수 있다”고 했다. 
지난해 소셜미디어에서 유행한 텍스트힙은 유행에 밝음을 뜻하는 힙(hip)과 텍스트가 결합한 신조어다. 
소셜미디어에 마음에 드는 책의 표지를 자랑하거나 인상적인 구절을 공유하는 등 독서로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젊은 층이 많다. 
단순한 허영의 부산물이라는 지적도 있었지만, 이를 계기로 독서에 진지하게 입문하는 젊은이가 적지 않다고 한다.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시민들이 바닥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출판업계 관계자는 “태어나서부터 영상 자료에 노출됐던 20대들은 아날로그 감성의 대표 주자인 ‘활자’를 신기하고 멋진 것으로 여긴다”며 “숏츠 같은 단발성 자극에 지쳐 책을 찾게 된 것도 유행의 한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20대 대학생들은 “처음엔 허세도 있었지만 짧은 글 위주의 소셜미디어와 달리 깊이 있는 텍스트를 음미하며 독서의 즐거움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대학생 변수민(24)씨는 “처음엔 책을 읽으니 사람들이 나를 깊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 게 좋았는데, 읽다 보니 사유의 폭도 넓어지고 대화 주제도 다양해져 이젠 취미가 독서”라고 했다. 
대학생 김민우(24)씨도 “친구들이 소셜 미디어에 독서 인증샷을 올리는 걸 보고, 취업 준비 시기 숨을 돌리고자 독서를 시작했다”며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삶을 통해 내가 가진 고민을 정리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역시 지난해 MZ세대의 문학 작품 소비를 늘린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취업 준비생 이희원(25)씨는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타는 걸 보고 문학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며 “중학생 때 읽었던 ‘채식주의자’도 다시 읽고 오랜만에 서점에도 가며 문학에 빠져 살고 있다”고 했다.


젊은 층의 순수문학 작품 구매도 늘어나고 있다. 
예스24에 따르면, 지난해 ‘문학동네 시인선’ 시리즈 구매자 중 20대가 차지하는 비율이 31.8%였다. 
2023년 25.8%에서 6%p 증가한 값이다. 
또 지난해(1월~9월) 세계문학 시리즈를 구매한 20대는 전체 연령 중 14.3%로, 2019년에 비해 6.8%p 증가했다. 
전자책 구독 서비스 ‘밀리의 서재’ 관계자는 “20~30대가 주요 이용층”이라며 “텍스트힙 트렌드가 MZ세대의 독서 문화 유입을 견인한 것”이라고 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유튜브, 소셜 미디어에 더해 인공지능(AI)까지 온갖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를 살아가는 20대가 결국 책이라는 콘텐츠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매체로 여기게 됐다는 점은 종이책의 생명력을 보여준다”고 했다.(250103)


☞텍스트힙(text-hip)

’읽는 것은 멋지다’는 의미로, 개성 있고 유행에 밝은 것을 칭하는 ‘힙하다(hip)’와 ‘글(text)’을 의미하는 텍스트를 합친 신조어. 
독서 인증샷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행위가 지난해부터 2030세대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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