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경찰서는 서울대 의대 피부과학교실(서울대병원 피부과) 학과장 전직 회계담당자 A씨가 6억원 규모 연구비를 횡령한 혐의를 포착하고 수사 중이라고 3일 밝혔다. 
A씨는 지난해 6월 퇴직했는데, 학과 운영비 내역을 살펴보던 후임자가 횡령 정황을 발견해 학교 당국에 신고했다. 

서울대 측은 A씨가 2017~2023년 6년에 걸쳐 6억원 규모 연구비를 빼돌렸다고 보고 그의 거주지 관할 강남서에 A씨를 업무상 횡령 혐의로 고소했다.


본지가 복수의 서울대 관계자 증언을 들어보니, 서울대병원 피부과에선 이른바 ‘풀링’이라고 하는 연구비 공유제를 시행해왔다. 
교수 개개인이 따온 연구비를 공동 계좌에 한꺼번에 모아 여러 교수가 함께 쓰는 방식이다. 
한 교수가 탈모 연구 명목으로 타 온 연구비를 다른 교수가 피부 노화 연구에 사용하는 식이다. 
국가 지원 예산, 민간 지원 연구비 등도 구분 없이 마구 섞어 사용한다.

 

 




서울대병원 피부과에선 2016~2022년 피부과장을 지낸 B 교수가 ‘풀링’으로 한데 모인 연구비 관리를 도맡았다고 한다. 
회계 내역 또한 제때 공개하지 않는 등 연구비가 사실상 ‘깜깜이’로 운영되어 왔다고 복수의 관계자는 본지에 말했다. 
경찰은 주변인 조사 등을 통해 현재까지 A씨가 ‘풀링’ 계좌에서 약 5억원을 빼돌린 정황을 확보한 상태다. 나머지 1억원의 행방을 추적하는 데도 경찰은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풀링은 현행법상 불법이다. 
국가연구개발혁신법과 한국연구재단 연구비 관리 표준 매뉴얼을 보면, 연구비의 사용 용도는 특정돼 있다. 
연구 책임자는 연구비를 지급된 용도 외에 사용하면 안 된다. 
이런 원칙을 어기면 연구비 환수뿐 아니라 연구비의 수 배에 달하는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사기죄 및 업무상 횡령죄로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학계에선 ‘관행’이란 이유로 별개로 지급받은 각종 사업 연구비를 한꺼번에 모아 공동 관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학 관계자들은 이 같은 풀링 관행이 연구비 횡령으로 이어지기 쉽다고 지적한다. 
B 교수는 피부과장 재직 기간 연구비 관리를 총괄하며 휘하 교수들에게 연구비를 분배했다고 한다. 
한 관계자는 “회계 내역 또한 제때 공개하지 않는 등 연구비가 사실상 ‘깜깜이’로 운영돼 왔다”고 했다.


서울대에선 “6년 동안 6억원에 달하는 돈이 사라졌는데 연구비를 도대체 어떻게 관리했으면 여태껏 모를 수가 있느냐”는 반응이다. 
한 교수는 “방만한 연구비 관리의 폐해가 이제야 드러난 것”이라며 “터질 게 터졌다”고 했다. 
본지는 B 교수에게 반론을 듣고자 수차례 연락했으나 닿지 않았다. 
서울대 의대 측은 “A씨의 개인적인 일탈로 파악하고 있으며, 풀링 등이 있었다는 내용은 보고받지 못했다”고 했다. 
장기간 횡령을 왜 포착하지 못했냐는 지적에는 “학교 측이 개별 연구비 하나하나를 살펴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지난해 9월 수도권의 한 약대 교수의 풀링이 적발돼 2심에서 벌금 300만원(업무상 횡령)을 선고받았다. 
이 교수는 2011년부터 연구실을 운영하며 대학 산학협력단 등에서 받은 연구실 운영비 1억2900여 만원을 제3자 명의의 풀링 계좌에 넣었다. 
2013~2016년 23회에 걸쳐 544만원을 꺼내 개인 신용카드 결제 대금, 식사비 등 생활비로 사용한 혐의를 받았다.


2022년 11월엔 대학원생 연구원 인건비를 부풀려 청구, 연구재단 등에서 받은 7900여 만원을 빼돌린 울산과학기술원 교수가 사기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부풀린 인건비 차액을 자신이 따로 챙겨 일부를 개인 용도로 사용한 혐의를 받았다.


2021년 8월엔 포항공대 교수의 풀링이 적발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2011~2014년 연구실 학생에게 전달된 인건비를 다른 계좌로 송금하게 강요해 1530만원을 공동 관리하고 이 중 일부를 횡령했다. 
2020년 2월에는 전임 고려대 총장이 대학원생 인건비 6500만원을 ‘풀링’하다 적발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한 서울대 교수는 “서울대병원에도 감사실이 있지만 제보나 언론 보도 등에 의존한 특정 감사만 진행하고 선제적 감사는 거의 하지 않는다”며 “풀링 관행이 워낙 광범위한 탓에 수면에 드러나지 않은 횡령 사건은 더 많을 수 있다”고 했다.(240604)


☞풀링(Pooling)

대학·병원·연구 기관 교수들이 국가·민간에서 각자 따낸 개별 사업 연구비를 학과 단위 등으로 한데 섞어 공유하는 방식. 
국가연구개발사업 시행령, 한국연구재단 연구비 관리 표준 지침 등에선 각 사업에 지급한 연구비를 그 사업에만 써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학계에선 관행이란 이유로 국가·민간에서 지원하는 각종 연구비를 한꺼번에 섞어 쓰는 일이 버젓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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