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미국 버지니아주 의회에서는 데이터센터 신설을 제한하는 법이 잇따라 발의됐다.
세계 데이터센터 6686곳 중 5%에 육박하는 320개가 몰려 있어 ‘글로벌 데이터센터 허브’로 불리는 버지니아에서 데이터센터 개발에 제동을 건 것이다.
영국 런던시는 지난 2022년 ‘데이터센터 TF(태스크포스)’를 구성하고 데이터센터 신규 건설을 깐깐하게 보기 시작했다.
싱가포르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한시적으로 신규 데이터센터 건설을 막기도 했다.
데이터센터가 우후죽순 생기며 전기를 빨아들이자, 대책 마련에 나선 것이다.
전통 산업 선진국에서 때아닌 ‘구전난(求電難·electricity shortage)’이 벌어지고 있다.
후진국에서나 일어날 법한 ‘전기 구하기 전쟁’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전기 걱정이라고는 모르고 살던 선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6년 전 세계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전력량은 인구 1억2000만명인 일본이 한 해 동안 쓰는 전기량(939TWh)과 같아진다.
2040년이 되면 전 세계에서 한 해 판매되는 전기차가 소비하는 전력량만 1GW(기가와트)급 원자력발전소 40개를 돌려야 하는 수준으로 늘어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전기차, 데이터센터를 비롯해 인공지능(AI)과 AI 반도체, 이차전지 등 현재는 물론 미래 먹거리로 세계 각국과 빅테크 기업들이 사활을 건 경쟁을 펼치고 있는 최첨단 산업은 모두 ‘전기 먹는 하마’라는 공통점이 있다.
2차 산업혁명 시대에 본격적으로 사용된 전기가 100년이 지난 AI 혁명 시대에 또다시 산업의 주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최고경영자)는 지난 3월 “내년에는 AI용 반도체를 모두 구동할 만큼 충분한 전력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에너지 컨설팅 기업 그리드 스트래티지스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미국 내 여름철 피크 전력 수요가 2028년까지 추가로 38GW(기가와트)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2022년 추계할 때만 해도 전력 수요 예상 증가치는 20GW 정도였는데, 1년여 만에 예측치가 2배 가까이로 뛰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며 “20년 동안 정체돼 있던 전기 수요가 폭증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전 세계 전기차 판매량은 1400만대 정도였다.
국제에너지기구는 올해 전 세계에서 1700만대가 넘는 전기차가 판매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2040년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이 전체 차량의 61%에 달하는 7300만대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에선 전기차 1대가 일반 가정 전기 소비량의 절반 정도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신차 판매 5대 중 1대가 전기차”라며 “전기차가 소비하는 전력량이 2035년이 되면 전체의 10%에 달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본격적인 전기차 시대가 열리면 전기 수요가 폭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빅테크 기업은 물론 첨단 제조 산업이 집중된 미국은 다른 나라보다 구전난을 먼저 체감하고 있다.
미국에는 전 세계의 38%를 웃도는 2562개의 데이터센터가 있다. 2위 영국(347개), 3위 독일(313개)을 압도하는 1위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따르면, 미국 데이터센터가 소비하는 전력량은 2022년 130TWh(테라와트시·1TWh=1000GWh)에서 2030년에는 3배인 390TWh로 급증할 전망이다.
미국 가정의 3분의 1인 4000만가구가 쓰는 전기 수요와 비슷한 규모다.
IRA(인플레이션감축법), 칩스법 등 적극적인 리쇼어링 정책에 따라 급증하는 제조업도 전력 수급에는 부담으로 작용한다.
2021년 이래로 반도체·배터리·태양광 등 미국 내 투자 규모는 5250억달러(약 720조원)에 이른다.
SK·현대차·한화 등 국내 기업들의 공장도 몰리는 조지아주는 10년 뒤 전기 소비가 현재의 17배로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애리조나주에서는 이대로면 10년 내에 기존 전력망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며 문제가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미국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구전난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빅테크 기업들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하며 돌파구를 찾고 있다.
선진국에서 충분한 전기를 확보하기 어려워진 빅테크들은 상대적으로 전력 사정이 나은 중동·동남아시아 등으로 기지를 확대하고 있다.
AI 혁명이 확산하는 상황에서 과거 제조업 기반을 제대로 못 갖췄거나, 제때 IT 바람을 타지 못했던 국가들에서 구전난을 극복하겠다는 것이다.
사티아 나델라 MS CEO는 최근 동남아시아를 순방하며 각국에 ‘투자 보따리’를 풀고 첨단 산업 기지 구축에 나섰다.
지난달 30일 인도네시아에서는 조코 위도도 대통령을 만나 인도네시아 클라우드 서비스와 AI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4년 동안 17억달러(약 2조300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고, 지난 1일엔 태국을 찾아 10억달러(약 1조3600억원)를 투입하겠다고 했다.
AI 기술을 ‘2030 전략’의 핵심 산업으로 꼽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선 AWS(아마존 웹 서비스)가 2026년 완공을 목표로 7조2000억원을 투입해 디지털 인프라 구축을 진행하고 있다.
김창섭 가천대 교수는 “IT 경쟁력 강화에 나선 국가를 중심으로 투자가 이뤄지는 모습”이라며 “빅테크들은 기술 교육, 인프라 같은 다른 당근도 같이 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24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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