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한 죽음은 인간의 권리인가, 아니면 생명과 신에 대한 불경인가.
드리스 판아흐트 네덜란드 전 총리가 지난 5일 93세로 안락사를 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유럽에서 다시금 이 문제가 조명을 받고 있다.
그는 1977년부터 1982년까지 네덜란드 총리를 지낸 유명인이다.
특히 평생을 가톨릭(천주교) 교인으로 산 그가 동갑 부인과 ‘동반 안락사’를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더 주목받고 있다.
한 해 8000여 명이 안락사를 선택하는 네덜란드에서도 이런 사례는 매우 드물다.
네덜란드 정부에 따르면 2022년 총 8720명의 안락사 사례 중 약 0.7%만이 동반 안락사였다.
주로 부부가 동시에 불치병에 시달리는 이들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지난 5일 93세로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 드리스 판아흐트(왼쪽) 전 네덜란드 총리와 동갑 부인 외헤니 여사의 모습.>
판아흐트 전 총리가 설립한 시민 단체 ‘권리 포럼’ 측은 가족을 대신해 “두 사람 모두 (건강 악화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상대를 남겨두고 (먼저)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네덜란드 언론에 밝혔다.
판아흐트는 2019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고, 이후 5년여간 부인인 외헤니 여사가 여러 병으로 고통받는 중에도 그와 함께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더텔레흐라프 등 현지 언론은 “삶의 질이 악화하는 가운데 이런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두 사람의 사망은 집에서 의사와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졌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네덜란드의 안락사는 대부분 이런 식”이라며 그다지 낯설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네덜란드는 2002년 세계 최초로 의사가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하는 방식의 안락사를 합법화한 나라로, 전체 사망의 약 5%가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 내에서도 현재 네덜란드와 비슷한 수준으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는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페인 정도에 불과하다.
이 경우에도 고통이 참을 수 없는 수준이고, 나아질 가능성이 없으며, 환자가 간절히 이를 희망해야 한다는 등 엄격한 기준이 있다.
안락사를 시행하는 다른 나라들은 대체로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하거나, 의사가 처방한 약물을 환자가 직접 투약하는 의사 조력 자살만 허용한다.
불치병을 겪는 외국인들이 ‘자살 관광’을 가는 것으로 유명해진 스위스의 경우도 조력 자살만 허용하고, 안락사는 연명 의료를 중단하는 수준만 허용한다.
그만큼 사회적 논란이 거세기 때문이다. 특히 가톨릭의 전통이 강한 국가일수록 안락사에 대한 반감이 크다.
국민 80%가 가톨릭 신자인 포르투갈은 의회가 통과시킨 안락사 합법화 법안을 대통령이 두 번이나 거부한 끝에 결국 지난해 5월 세 번째 시도 만에 통과시켰다.
유럽 내 노인 인구 사이에도 찬반 논란이 거세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 등은 “안락사가 마치 존엄한 삶을 위한 선택처럼 미화되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저항이 있다”고 보도했다.
고통스럽더라도 지속적인 삶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안락사와 조력 자살이 마치 ‘현대판 고려장’처럼 악용될 가능성을 경계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유럽에서 안락사를 선택하는 이들은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지난 2022년 프랑스의 국민 미남 배우 알랭 들롱(89)이 “나는 안락사로 죽고 싶다”고 밝히는 등 유명인의 사례가 대중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르피가로 등은 분석했다.
네덜란드의 경우 동반 안락사도 늘어나고 있다.
2020년 26명(13쌍)에서 2021년 32명(16쌍)으로, 2022년 58명(29쌍)으로 늘었다.
네덜란드의 한 안락사 전문 기관은 “동반 안락사는 배우자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닌, 남편과 아내가 각각 신청한 것이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심해 달라”고 강조했다.(240213)
☞드리스 판아흐트 前 총리
1977~1982년 네덜란드 총리직을 포함해 부총리, 법무장관, 외무장관 등을 지냈다.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가톨릭 계열 라드바우드대에서 형법학 교수로 재직하다 훗날 기독민주당으로 통합된 가톨릭국민당의 일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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