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에서 남산으로 가느라 맞은편 남대문경찰서 뒷길을 오르면, 차 한 대가 지나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골목 사이로 낡은 저층 주택과 빌라가 빼곡히 들어찬 동네가 나온다. 서울 용산구 후암동 일대다. 
수도의 관문인 서울역을 나서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서울의 얼굴’이지만, 20년 가까이 재개발이 미뤄지면서 슬럼화했다. 
남산고도제한지구로 ‘5층, 20m 이하’라는 층고 제한에 묶여 재개발 사업성이 나오지 않은 탓이다. 
현재 층수 제한은 사라졌지만, 높이 규제는 여전해 재개발 추진이 지지부진했다. 
서울역 서쪽의 서계동과 청파동의 노후 건물 밀집 지역도 사정은 비슷하다.

 

 

<서울역과 도쿄역 일대 - 수도의 관문인 서울역 일대(위)는 2003년 민자 역사를 끝으로 다른 개발 사업이 추진되지 못하면서, 낡은 저층 건물과 다세대 주택이 밀집한 낙후 지역으로 전락했다. 
반면 일본 도쿄역 일대(아래)는 대대적인 규제 완화로 2000년대 초반부터 고층 빌딩이 들어서 도쿄를 대표하는 업무·상업 지구로 거듭났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서울역과 일본 도쿄역 모습은 확연히 다르다. 
서울역 일대는 고도 제한 등에 묶여 2003년 민자 역사 이후로 개발 사업을 전혀 하지 못해 낡은 건물과 주택에 둘러싸여 있다. 
반면 40층 이상 고층 빌딩들에 감싸인 도쿄역 주변은 대표적 업무·상업 지구로 거듭났다. 
일본은 2002년 ‘도시재생특별조치법’을 만들어 도쿄역 일대를 비롯한 곳곳을 특구로 정하고 개발을 추진했다.


두 도시의 건축 규제가 갈라 놓은 모습이다. 
서울역뿐 아니라 그동안 서울에서 무산되거나 추진되지 못한 대형 도심 재생 사업들을 뜯어보면, 그 배경에는 고밀 개발을 가로막는 ‘첩첩산중 규제’가 있다.

 

 




2006년 시작한 세운상가 재개발 프로젝트가 무산된 배경에는 박원순 전 시장의 도심 보존 정책뿐 아니라 ‘문화재 앙각(仰角·올려다본 각도) 규제’가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주변 100m 이내에서 건물을 지으려면, 문화재 담장에서 27도 위로 그은 사선 높이를 넘지 못하는 규정이다. 
문화재 경관을 보호한다는 취지지만, 여러 궁(宮)이 밀집한 서울 도심 개발을 막는 걸림돌이다. 
더구나 세운상가는 종묘에서 100m 이상 떨어져 있지만, 문화재청은 조선 왕들의 위폐를 모시는 종묘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며 ‘앙각 규제’를 확대 적용했다. 
지금대로라면 세운상가 재개발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하더라도, 랜드마크 건물을 짓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일본 도쿄 황궁 인근의 마루노우치 지역에 40층짜리 초고층 빌딩들이 들어서 있는 것과 대비된다.


서울 사대문 안의 규제는 더욱 촘촘하다. 
국토계획법상 상업 지역 용적률(건물 각 층의 면적 총합÷부지 면적)은 최고 1500%이지만, 서울은 1000%, 사대문 안은 800%로 낮아진다. 
특히 사대문 안은 도심 지역 내 신축 건물이 내사산(內四山·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 경관을 가로막지 않도록 건물 높이를 90m 이내로 하는 ‘역사 도심’ 규제까지 받고 있다.

 

 




이는 세계 주요 도시들이 기업과 관광객 유치 등 경제적 효과를 위해 파격적인 용적률 인센티브를 줘 고밀도로 개발하는 흐름과 배치된다. 
미국 뉴욕 맨해튼 철도 기지에 건설 중인 허드슨 야드는 용적률이 최고 3300%에 이른다. 
일본도 2000년대 들어 도쿄 도심 주요 지역의 고도 제한을 없애고, 용적률을 1000%에서 2000%로 올렸다.


깐깐한 용도 제한도 서울 도심 개발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높은 공실률에 시달리는 용산전자상가는 10년 전부터 복합 개발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지금껏 아무런 개발 시도도 하지 못했다. 
이 지역이 도시계획 시설 중 하나인 ‘전자기기 유통 업무 설비’로 지정돼, 개발 때 전체 면적의 50% 이상을 전기·전자 관련 유통 점포로 채워야 하고, 주거 시설은 넣을 수 없다는 업종 제한이 있었던 탓이다. 
만약 그 외 용도로 하려면 토지 면적의 약 20~30%를 도로나 공원 등으로 국가에 기부 채납해야 한다. 
서울시가 지난달 용도 제한 규제를 풀었지만, 결과적으로 10년 넘는 세월을 날린 셈이다.


서울 강남권 노른자 지역 중 하나인 서초동 남부터미널 역시 2009년부터 복합 개발 시도가 이어졌지만 사업이 장기 표류하고 있다. 
서울시가 터미널 본연 기능을 유지해야 한다며 상업 시설 입점을 제한하고, 용적률도 600%로 하고 있다. 
김호철 단국대 교수는 “교통·도로 등 기반 시설을 충분히 갖춘 지역에 한해서는 용적률 한도를 탄력적으로 높여야 효율적이고, 실제 초고층 복합 시설을 짓는 게 최근 세계 도심 재개발의 흐름”이라고 했다.(2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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