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기업인 출신 중에는 장관감이 없습니까?”
민간의 활력을 대표하는 기업인 출신 장관이 더 늘어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9일 본지 집계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이후 임명된 239명의 국무위원 가운데 기업인 출신은 4명으로 1.7%에 불과하다.
20년간 기업인 출신이 임명된 것은 노무현 정부의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박근혜 정부 강은희 여성가족부 장관, 문재인 정부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현 정부의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등이다.
교수 출신이 58명으로 24.3%에 달하는 것과 비교하면 격차가 크다.
관료나 정치인 출신이 아닌 민간에서 임명되는 장관들은 대부분 교수 출신이기 때문이다.
고(故) 이건희 회장은 지난 1995년 “한국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했지만, 한국 기업들은 당당히 1류로 성장했다.
반면, 한국 행정과 정치는 3류, 4류에서 더 추락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2023년 국가 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은 2년 연속 순위가 하락해 64개 조사 대상 국가 중 28위에 그쳤다. 정부 효율성은 그보다 10계단 떨어진 38위다.
한 전직 장관은 “기업인 출신 장관이 드문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정부의 실력이 민간에 뒤지는데 왜 민간에 도움을 청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라고 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기업인 출신 중에 장관감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혹시 관료와 교수는 선비이고, 기업인과 금융인은 정부 지시를 따르는 장인이나 상인으로 보는 사농공상의 서열 시각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은 아니냐”고 했다.
노무현 정부 이후 국무위원 4명 중 1명은 교수 출신이다.
문재인 정부가 27.5%로 가장 높았다. 임기 중 51명의 국무위원을 임명했는데 14명이 교수 출신이다.
현 정부는 19명의 국무위원을 임명했는데 교수 출신이 5명(26.3%)이다.
한 전직 관료는 “문재인 정부에서 교수 출신 장관 비율이 가장 높았던 것은 탈원전 등 문제가 있는 목표 달성을 위해 관료들보다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교수 출신들을 기용하는 것이 낫다고 봤기 때문일 수 있다”고 했다.
교수 출신이 중용되는 것은 ‘폴리페서(polifessor·정치인+교수)’ 성향을 보이는 일부 교수들이 입각하는 경우가 많은 데다 장기 휴직이 가능해 부담이 적다는 점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경제 부처의 한 국장은 “연구와 강의와는 성격이 다른 정책 추진, 조직 운영 등의 업무에 강점을 보이기도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기업인 출신 장관이 극소수에 그치는 것은 정부 내에서 관료들의 영향력이 커서 기업인 출신을 선호하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인사청문회 등에 대한 부담도 작용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2013년 박근혜 정부 때 미래창조과학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초대 장관 후보자로 김종훈 전 벨연구소 사장이 내정됐으나 미국 국적 소지 논란 등으로 자진 사퇴했다.
경제 부처의 경우 과학기술, 중소기업 등 산업 분야에는 기용된 적이 있지만, 정부 경제팀의 핵심인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등에는 기업인 출신이 임명된 적이 없었다.
전직 고위 경제 관료들은 “기획재정부의 세제나 예산 등 업무는 전문성이 높기 때문에 민간 출신 장관은 일을 배우다 그만두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며 “진입 장벽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대한 반론도 크다.
한 금융권 인사는 “차관, 1급, 국장, 과장 모두 나랏돈으로 월급 주면서 키웠으니 민간 출신 장관이 그들의 보좌를 받으면 되지 않겠느냐”면서 “장관이 과장급, 국장급 업무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지 않으냐”고 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기업인의 실력이 관료보다 뒤떨어지던 경제개발 초기와는 상황이 다르다”면서 “글로벌 네트워크나 시장에 대한 이해도 등에서 기업인이 관료들을 앞서면 앞서지 뒤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유럽 등 주요 선진국들은 내각제여서 기본적으로 정치인 출신들이 장관에 임명되기 때문에 대통령제인 우리나라와 직접 비교가 어렵다.
같은 대통령제 국가로 범위를 좁히면 미국은 우리와 달리 기업인 출신 장관이 적지 않다.
<(왼쪽부터)로버트 루빈, 스티븐 므누신, 렉스 틸러슨, 윌버 로스>
클린턴 행정부의 로버트 루빈, 조지 W부시 행정부의 행크 폴슨, 트럼프 행정부의 스티븐 므누신 등은 모두 미국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 출신 재무장관이다.
루빈과 폴슨은 회장을 지냈고, 므누신은 최고정보책임자(CIO)를 지냈다.
장관들을 많이 배출했다는 뜻에서 골드만삭스에 ‘거버먼트(government·정부)삭스’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다.
이에 대해 한 전직 경제 부처 장관은 “골드만삭스는 세계 경제를 무대로 일하는 유대인 자본의 정점에 있는 회사”라며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도 증권사 임원을 장관에 기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단순 비교하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고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엑손모빌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렉스 틸러슨을 국무장관에 임명했고, 투자은행 윌버로스컴퍼니 회장을 지낸 윌버 로스 상무장관, 골드만삭스 사장을 지낸 게리 콘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 등을 기용했다.
국방장관에도 기업인 출신이 임명될 정도다.
케네디 행정부와 존슨 행정부에서 7년간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맥너마라는 2차 대전 당시 육군에서 복무하고 중령으로 예편한 뒤 포드에 입사해 포드 가문 이외의 인물로는 처음으로 사장에 올랐다.
당시 포드자동차 사장 연봉은 300만달러였고, 국방장관 연봉은 2만5000달러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공직을 위해 고액 연봉을 포기한 것이다.
그는 냉전 시대 소련과의 군비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의 무기 개발 비용 등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던 미국 국방 예산의 팽창주의 성향을 막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방 분야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고 “시스템 분석 접근이라는 이름으로 무기 개발 및 구매 예산을 줄여 베테랑 군인들을 분개하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국방 예산에 가격 대비 성능의 개념을 확대시켰다.
기업인 출신 장관이 드문 이유로는 인사 청문회 부담 외에도 주식 백지신탁이 꼽힌다.
2013년 코스닥 상장사 주성엔지니어링의 황철주 대표는 박근혜 정부의 첫 중소기업청장에 지명됐지만, 사흘 만에 “회사와 주주를 버리고 청장을 택할 수 없다”며 자진 사퇴했다.
고위 공직자가 배우자 등을 포함해 직무 연관성이 있는 주식을 3000만원 넘게 보유하고 있을 경우 임명 두 달 이내에 주식을 매각하거나, 수탁 기관(증권사)에 처분을 일임하는 백지신탁을 해야 한다.
신탁 후 수탁 기관은 60일 이내에 주식을 처분해야 한다. 신탁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강제 매각을 강요당한다.
기업 대주주나 주식을 많이 보유한 기업인들이 경제 관련 부처의 공직을 맡으려면 경영권이나 자산을 포기해야만 하는 처지에 몰리는 것이다.
인사혁신처 주식백지신탁심사위원회의 직무 관련성 심사에서 “관련이 없다”는 판정을 받아야만 매각이나 백지신탁을 면제받을 수 있다.
주식 백지신탁 제도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국회의원 등과 지방자치단체의 정무직 공무원,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의 일부 4급 이상 등에 적용된다.
직위나 직무로 인해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해 주식 거래를 하거나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막겠다는 취지로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 도입됐다.
도입 취지는 인정하지만, 기업인 출신의 입각에 장애물이 되는 만큼 강제 매각을 하지 않도록 개정하는 방안 등이 보완책으로 거론된다.
3000만원인 기준을 높이는 방안도 거론된다.
인사혁신처가 인사행정학회에 의뢰한 연구 용역 보고서 ‘이해 충돌 방지를 위한 백지신탁제도 운영 개선 방안’은 “주가 상승 등을 감안해 5000만원으로 높이는 것이 적합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2020년 기준 주식 투자자 1인당 투자 금액이 7000만원대인 것을 감안하면, 최고경영자(CEO) 출신 등의 입각을 위해서는 기준을 더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2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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