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는 A(60)씨는 지난해 30년 가까이 다닌 회사를 퇴직하고 나서야 가족과 일상을 공유하게 됐다. 젊을 때 지방 발령을 자주 받았는데, 아내가 “아이들 교육 때문에 서울에 있겠다”고 해서 주말 부부로 살았다.
그런데 은퇴 후 가족과의 삶은 생각과 너무 달랐다.
취업도 안 하고 빈둥대는 아들이 한심해 훈계를 했는데 아들은 대꾸도 안 하고, 아내는 아들을 두둔했다.
얼마 전엔 아들이 잔소리하는 아버지를 손으로 밀쳤는데도 아내와 딸이 말리지 않고 보고만 있었던 것에 충격을 받았다.
A씨는 “평생 개미처럼 일해 집에 갖다 바쳤는데, 이젠 셋이 같은 편이고 나만 남 취급한다. 이러려고 열심히 살았나 후회된다”고 말했다.
“집에 있으면 ‘삼식이’(세끼 식사를 집에서 해결한다는 뜻) 소리 듣고, 나가면 ‘돈 쓴다’고 눈치 보인다”는 은퇴 남성들은 노년의 부부 갈등이 젊은 시절보다 심하다고 말한다.
2020년 통계청 사회 조사 결과 ‘배우자 만족도’는 남녀 모두 30대에 86.9%, 77.6%로 가장 높다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내려가 60세 이상에선 69.3%, 52.9%로 떨어졌다.
은퇴한 남성들의 가장 큰 상실감은 매달 들어오던 월급이 끊기는 것.
아내의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경제력 없는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껴 우울해지고 말싸움할 때도 많다.
식료품점을 운영하다 4년 전 그만둔 박모(73)씨는 “얼마 전부터 아내가 내가 유튜브로 트로트를 들으면 ‘시끄럽다. 귀가 안 들리느냐’고 소리 지르고, 무슨 말만 하면 무조건 짜증을 낸다”면서 “예전엔 큰소리 한번 안 낸 사람인데, 이제 내가 돈을 못 벌어서 무시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박탈감엔 지위고하가 없다.
최근 전직 장관 모임에선 ‘일회용 고무장갑’이 화제였다고 한다.
이 모임에 참석한 한 인사는 “남자들이 퇴직하면 설거지를 많이 하는데, 일반 고무장갑보다 손에 딱 달라붙는 일회용 고무장갑이 편하다고 누가 얘기하니 다들 큰 관심을 보였다”면서 “밖에서나 장관이지 퇴직 후엔 아내한테 꼼짝 못 하는 일개 남편”이라고 했다.
아내와 대화 소재가 없는 것도 문제다.
교육공무원으로 퇴직한 이모(67)씨는 “은퇴해 보니 아내는 나의 삶을 잘 모르고 나도 집안일에 관심이 없었으니 아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몰랐다.
그러니 서로 할 말이 없고 의견 충돌만 생기더라”고 했다.
아내가 수십 년 쌓아온 시댁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며 크게 다투기도 한다.
초등 동창과 결혼한 B(64)씨는 “아내가 결혼 초 있었던 고부 갈등 문제를 지금 꺼내서 나를 괴롭히는데 어떨 땐 통제가 안 될 정도”라고 했다.
자식들도 야속하다. 자기와는 말도 안 섞으면서 아내와는 친구처럼 이야기를 곧잘 한다.
아내는 손주 봐주고 음식 해주며 자식들 집에 드나들지만, 남성들은 그것도 쉽지 않다.
자식들에게 용기 내 말을 걸었다가 ‘꼰대다’ ‘시대에 뒤처진다’며 면박을 당하기도 한다.
공기업 퇴직을 3년 앞둔 김모(58)씨는 딸(28)과 TV를 보다 “저 여자 (연예인) 엄청 날씬하네”라고 했다가 딸에게 “밖에 나가 함부로 외모 평가하면 큰일 난다”며 혼이 났다.
김씨는 “옆에 있는 아내도 딸 편을 드는데 ‘평생 자기들 먹여 살린 나보다 연예인이 중요한가’ 싶어 너무 섭섭했다”고 했다.
은퇴 후 집에 있기 눈치 보여 일자리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지방 고등학교 교감을 지낸 박모(72)씨는 학교 시설 관리 직원으로 자원해 일하다 요즘은 장애인 콜택시 기사로 뛴다.
“체면이 중요해요? 돈을 벌어야 가장으로서 존재감을 줄 수 있으니 뭐든 열심히 해야지요.”(22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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