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수십리 단풍 계곡 ‘불꽃같은 산세’

해인사를 품고 있는 가야산은 해인사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예부터 ‘조선 8경’ 중 하나로 손꼽힌 명산이다.

소백산맥 가운데 경남 합천군과 경북 성주군 경계에 있다.

경남 합천군과 경북 성주군 경계에 있는 가야산은 해인사와 13곳의 암자를 품고 있다.


가야산은 반경 1㎞ 안에 13개 암자를 거느린 해인사를 둥글게 안고 있다.

북쪽의 상왕봉과 두리봉, 서쪽의 깃대봉과 마령 그리고 남쪽의 단지봉과 남산 제일봉 등 해발 1000m 이상의 높은 산봉우리들이

병풍을 친 듯 이어져 있다.

이 때문에 예부터 병란을 피할 수 있고 먹고살기에 적합한 복지로 여겨졌다. 지금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가야산의 최고봉은 해발 1430m인 상왕봉이다.

맑은 날 상왕봉에 오르면 사방 100㎞가량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가야산에 대해 “뾰족한 돌이 불꽃같으며 공중에 솟아서 극히 높고 빼어나다….

샘물과 반석이 수 십리에 걸쳐 있다”고 표현했다.

불꽃 같은 지형은 이 일대를 구성하는 회장암과 화강암, 편마암 등이 강도에 따라 차별침식되면서 생겨났다.

반석이 수십리에 있다는 표현도 실제 기울기 5도가량으로 4500m나 뻗어 있는 홍류동 계곡을 보면 실감이 난다.

나뭇가지 모양으로 펼쳐진 수많은 계곡은 해인사 바로 아래 치인리에 모여 홍류동 계곡을 통해 흘러간다.

가을 단풍이 계곡물까지 붉게 물들인다고 해서 홍류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홍류동 계곡 주변에는 소나무와 활엽수가 우거져 있어 해인사와 함께 가야산의 절경으로 손꼽힌다.

가야산이 이름난 것은 아름다운 산세와 유명 사찰, 그리고 최치원 선생을 비롯한 역사상 유명한 인물들이 머물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암봉을 구성하는 회장암이란 특이 지질도 한 몫을 했다.

회장암은 달의 표면을 이루는 암석으로 아폴로 15호가 채집해 온 뒤 월석으로 유명해진 돌과 성분이 거의 같다.

조선시대 최고의 탐광자이자 지질학자인 구충당 이의립 선생이 유황이나 비소와 같은 특이 광맥을 찾기 위해 맨처음 찾았던 산이기도 하다.

가야산은 4계절 관광과 휴식이 보장된다.

봄·가을에는 신록과 단풍을 찾는 인파가 줄을 잇고, 여름이면 백운동과 홍류동 계곡이 더위를 식히는 인파들로 붐빈다.

가야산의 설경 또한 빼어나다.

등산 루트는 여러 방향에서 10개가 넘는다.

가야산국립공원 측은 제한된 수의 등반로를 교대로 개방해 산림 훼손을 막고 있다.

요즘은 마애불상을 볼 수 있는 길은 출입이 금지돼 있다.

가야산은 해발 800m를 경계로 위쪽에는 참나무류가 많고 그 아래에는

소나무·잣나무 등 침엽수가 우세하다.

계곡에는 잘 뻗은 적송이 가지런하다.

해인사 대적광전 서쪽 학사대에는 최치원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전나무 한 그루가 천년의 푸름을 전하고 있다.

가야산 등산 루트는 한 바퀴를 돌아 원점에 돌아오는 형태,

일직선으로 올라갔다가 되돌아오는 형태, 말발굽 모양으로 한 지점에서 출발해 목적지에 도달한 뒤 다른 지점에 이르는 형태 등 세 가지 방식이다.

한 바퀴 도는 형태는 해인사 입구에서 약수암~지족암~해인사~홍제암~원당암~삼선암을 돌아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크게 힘들지 않지만 트인 전망은 없다.

일직선 루트로는 해인사 왼편 용탑선원을 스쳐 지나 상왕봉에 오른 뒤

되돌아온다.

말굽형은 치인리~해인사~상왕봉~서성재~백운대로 이어진다.

모두 5시간가량 걸리는 긴 코스답게 다양한 경관을 즐길 수 있다.


번뇌의 풍랑이 멎어 ‘고요한 바다’ 해인사

가야산은 해인사를 품고 해인사는 걸출한 인물과 각종 문물을 품고 있다.

산속에서 바다 이미지가 떠오르는 곳이 해인사다.

가야산이 뿜어내는 물을 실은 두 갈래의 큰 골짜기 가운데 놓인 절의 모습이 떠가는 배(행주형)처럼 보이는 데다

해인이란 이름이 풍기는 의미 때문이다.

바다 해(海)자와 도장 인(印)자를 쓰는 해인은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따왔다고 한다.

해인은 풍랑처럼 일던 번뇌가 사라진 마음처럼 고요한 바다에 만상이 비친 듯한 경지를 일컫는다고 한다.

해인사는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됐다. 애장왕은 귀족들이 사찰에 재산을 빼돌려 놓는 것을 막기 위해 새로 사찰을 짓지 못하고

수리만 하도록 했다.

그런 왕이 스스로 해인사를 창건했는데 그 이유는 왕비의 병을 고친 보답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 태조 7년(1398)에는 강화도에 있던 팔만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겼다.

불법의 정수가 새겨진 대장경이 옮겨짐에 따라 법보사찰이란 명성을 얻었다.

임진왜란, 한국전쟁과 같은 병화도 피했다.

17세기 이후 7차례 화재가 있었으나 요사채 일부만 태우고 장경각 등은 피해가 없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해인사는 균여대사와 같은 학승도 배출했으나 현대에 와서는 성철스님의 흔적이 크다.

일주문 입구에 있는 성철스님의 사리탑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스님의 법어처럼 간결하다.

이 사리탑 불사를 지휘한 원택스님(백련암 감원)은 “원로들은 기품 있는 사리탑이 신라·고려 때 이후 드물어졌다며 모방에 불과한 탑을

만들지 않도록 당부했다”면서 “이에 따라 문화재계 원로인 황수영·김동현·정영호 박사 등의 조언에 따라 높지 않고, 조각 문양이 없으며,

현대적 조형미를 갖춘 사리탑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사리탑은 공모전을 거쳐 재일 여류설치작가 최재은씨가 제작했으며 연좌대를 맞붙인 모양에 진리를 상징하는 구가 얹혀 있다.

<합천 | 김한태기자 kh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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