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희 블로그 www.kimjihee.com>
마네(Manet)의 그림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년)는 당시 많은 비웃음과 비난을 받았지만, 햇볕을 온몸에 받아내며 환한 몸매를 드러낸 저 여인의 모습은 오늘날 인상주의의 시작을 알리게 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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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유명한 이 그림의 미술사적 의의는 제쳐두고, 이 그림을 어린 시절 처음 봤을 때부터 궁금한 게 있었다. 왜 저 여인만 혼자 옷을 홀딱 벗고 있는 것일까?
(최근 이 궁금증에 대한 재미있는 해답을 발견했다. 자기네 제품을 쓰면 생활이 예술이 된다고 주장하는 한 뚱딴지같은 기업이 이 그림 속 여인 옆에 빨간 드럼 세탁기를 배치해 놓았다. 저 여인이 옷을 벗고 있는 이유는 옷을 빨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_-;;)
이 그림이 당시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은 것은 저 남자들의 옷차림이 보여주듯, '신화'가 아닌 당시 '현실'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매춘부와 한가롭게 놀고 있는 화가 자신의 모습이자 상류층 남성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던 것이다.
서양 그림엔 르네상스부터 현대까지 워낙 누드가 많긴 하지만, 마네의 이 그림 속 여인은 슈트를 단정히 차려입은 신사들 틈에서 ' 나 홀로' 벗었다. 나에게 있어 이 그림이 이상하고 공평(?)하게 보이지 않은 이유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여자가 혼자 옷을 벗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당시엔 비난을 받았을지언정 오늘날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의 중요 소장품이 된 이 그림을 보면, 게릴라걸즈(Guerrila Girls)의 도발적인 문구가 생각날 수밖에 없다.
'여성들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옷을 벗어야 하나? Do women have to be naked to get into the Me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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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서의 남녀차별을 반대하는 예술 단체인 게릴라걸즈는 1985년 미국에서 생겼다. 이들은 주로 고릴라 탈을 쓴 이미지로 포스터를 통해 성차별, 인종차별 등을 반대한다. 게릴라걸즈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이 포스터는 앵그르의 아름다운 여성 누드 작품 <오달리스크>를 패러디했다.
1989년에 만들어진 이 포스터는 '여성이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벗어야 하나?'라는 질문에 이어 이같이 말한다. '미술관의 현대미술 섹션에 여성 미술가는 5%도 안되지만, 누드화의 85%는 여성이다.'라며 작게는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크게는 전체 미술계를 비판하고 있다. 여성이 그림의 대상이 되었을지언정, 그림 그리는 주체로서 미술관에 진입하기 어렵다는 것을 단번에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서양 그림 속엔 유독 여성 누드가 많다. 왜 그렇게 '명작'이라고 불리는 작품엔 여성 누드가 많은 것일까? 남자 누드도 있기는 하지만 그 수는 여성 누드와는 비교가 안 된다.
여성 누드가 대부분인 것은, 그림을 그린 화가가 대부분 남자였고, 또 그림을 주문하고 구입하고 감상하는 사람들 역시 남자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남성들은 '작품',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공개적으로 여성의 누드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림 속 여체는 아름다운 조형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남성 관람객의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관능적이고 에로틱한 대상이기도 하다.
바다 거품에서 태어난 미의 여신 비너스를 그린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보티첼리의 것이지만, 19세기 카바넬과 부게로 두 화가의 <비너스의 탄생>을 보자.
두 그림 다 여성의 누드를 부드럽고 우아하게 그렸다. 여체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 동시에 이 그림들은 (작품에 대한 아카데미적 비평을 떠나 솔직하게 말해서) 참 야하다. 특히,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있는 벌거벗은 여체는 은밀한 상상을 품게 만든다. 미술관에서나 도록을 통해서 이 작품들을 볼 때, '예술'이라며 제법 진지한 시선으로 감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야하다는 생각을 숨길 수 없을 것이다.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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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게로 <비너스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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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그림의 전통적 여성 누드는 공통적 특징이 있다. 두 팔을 들어올리고 고개는 살짝 옆으로 기울인다. 또 한쪽 다리를 살짝 꼰다. 이 같은 자세는 고대 그리스조각이 인체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표현하기 위한 기법인 '콘트라포스트'를 연상시킨다. 뻣뻣이 있는 이집트식 조형 대신 그리스인들은 조각을 할 때 몸을 살짝 비튼 S자 라인을 창조해내며 자연스런 인체의 모습을 표현했다. S자 라인의 굴곡있는 인체는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사실 이러한 포즈는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인위적으로 에로틱함을 강조하게 된다.
미술사학자 캐롤 던컨은 그림 속 여성이 관람객에게 교태를 부리며 눈맞춤을 하거나, 자는 척, 혹은 기절한 척 연출하는 데는 남성 감상자가 눈치 보지 말고 실컷 여체를 즐기며 쾌락을 맛보라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
신고전주의의 대가인 앵그르의 <샘>이나 <오달리스크와 노예> 속 여성들도 이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 있든 누워 있든 여성들의 누드 포즈는 한결같이 팔을 위로 들고, 허리를 비틀고, 다리를 살짝 꼰, 말 그대로 최대한 몸 배배꼬기이다. 그래서 앵그르, 카바넬, 부게로 모두 다른 작가의 그림임에도 누드 포즈는 닮아도 너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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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점심>을 그린 마네는 <올랭피아>로도 온갖 비난과 비웃음을 들었다. 이 그림 역시 풀밭 위의 여인과 마찬가지로 신화나 이국적 여성이 아닌 현실 속에 있는 고급 매춘부를 그렸기 때문이다. (두 그림의 누드 여성은 동일 여성이다.) <올랭피아>가 실존 인물을 표현했다는 점 외에 기존 누드와 다른 또 한가지 특징은 포즈다. 올랭피아는 일부러 몸을 비틀거나 해서 관능적인 포즈를 취하지 않고 있다. 또는 잠을 자거나 시선을 은근히 피하지도 않고 똑바로 관람객을 응시하고 있다. 내용면이나 형식면에서 참 솔직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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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느와르의 <잠자는 나부> 역시 전형적인 누드 화법을 따르고 있다. 두 팔을 들어올려 섹시하게 가슴을 강조하고 있으며 허리를 비틀고 잠자는 듯 눈을 감고 있다. 도대체 저렇게 자는 여자, 아니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실제로 취한다면 불편할 것 같아 보이는 이 자세는 역시 완전 무방비 상태로 남성 관람객의 시선에 온몸을 내맡기는 관능적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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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 시즌6의 한 에피소드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위의 르느와르 그림의 남성 버전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주인공 중 한명인 사만다는 모델 출신의 영계 남자(스미스)를 사귀게 된다. 사만다는 스미스를 부추겨 노출 수위가 높은 보드카 광고를 찍게 한다. 광고가 온 뉴욕 시내에 걸리자 자신의 광고를 민망해하는 남자에게 사만다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엔 게이가 반응을 보이고 그 다음엔 10대 소녀들이 열광하고 넌 뜰거야.' 정말 그랬다. 여성들이 보기에 참 '착한' 이 광고는 여성팬들을 사로잡아 스미스를 새로운 스타로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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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드라마상이기는 하지만 현대에 와서 남성들도 여성의 시선에 의해 바라보는 대상, 욕망의 대상이 된 시대가 된 것이다. 여기서 '착한 몸매'의 스미스는 여성 소비자를 사로잡기 위해 최대한 섹시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는 드라마 상의 이 광고 'Absolut Hunk'를 르느와르 <잠자는 나부>의 현대 버전 또는 남성 버전이라고 내 맘대로 이름 붙였다.
1960~70년대 페미니즘이 일면서, 남성 시선의 대상이 됐던 여성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남녀의 관계를 전복시키거나 여성 관점의 새로운 여성 누드를 선보였다.
미국의 여성화가 앨리스 닐은 임신한 여성 누드를 많이 그렸다. <임신한 마리아>(1964년)는 섹시하게 몸을 꼬거나 하지 않는, 남성 관람객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는 실제 존재하는 임신한 여성의 모습이다. 이 그림이 20세기 이전 수백년간의 여성 누드와 얼마나 많이 다른가는 누구나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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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자신의 자화상과 여성 모델의 그림은 화가들이 많이 그린 주제였다. 그 가운데 20세기 초 표현주의 작가인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의 <모델과 있는 자화상>을 보자.
많은 경우 화가와 모델은 연인 관계인 경우가 많지만, 이 그림은 화가와 모델의 '부적절한 관계'를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맨몸에 가운을 걸치고 있는 남자와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앉아 있는 여성의 모습은 성관계 직후로 추정된다. 키르히너 자신을 표현한 왼쪽의 화가는 파이프를 입에 물고 팔레트와 붓을 들고는 당당히 서 있다. 성관계 후 당당한 남성의 모습이자 화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이 드러낸 모습이다. 반면, 뒤편 구석의 여성 모델은 왠지 성적으로 타락한 모습이자 침울하고 초라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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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미술화가인 실비아 슬레이는 과거 남녀 관계를 전복시킨 그림을 많이 그렸다. 남성 시선의 대상으로서 여성이 들어갈 자리에 남자를 그려 넣었다.
<누워 있는 남자>(1971년)는 누워있는 남자의 누드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거울을 통해 여성 화가인 자신의 모습까지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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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다시 19세기로 돌아가 앵그르의 <터키탕>을 보자. 흔히 말하는 남성들이 꿈꾸는 여탕의 이미지, 또는 서양 남성의 판타지가 담긴 일부다처제 터키의 할렘 이미지가 이 그림에서 나타난다. 역시 이 그림에서도 부자연스럽게 몸을 배배꼰 여성들이 있다. (특히, 저 왼쪽에 서 있는 여자! 도대체 뭐하고 있는 것인지...-_-;) 당연한 얘기지만, 이 그림은 앵그르가 직접 보고 그린 게 아니라 터키에 공중목욕탕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상상으로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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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슬레이는 앵그르의 이 <터키탕>을 패러디해 남성 누드 버전의 <터키탕>(1973)을 그렸다. 실비아 슬레이는 여성 대신 남성을 그렸으며, 또 앵그르와 달리 누드를 아름답게 이상화시켜 그리지 않았다. 머리 스타일을 보면 당시 남자들인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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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무명 작가의 사진 작품 <사과 사세요>를 보면, 옷을 벗고 있는 여성이 가슴 위치에 사과를 들고 있다. 여성의 젖가슴과 탐스러운 과일을 연결시키며 사과를 팔듯 여성의 성을 파는 듯한 묘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
1970년대 남성 중심적인 미술을 예리하게 파헤친 여성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은 이 사진을 오스꽝스럽게 패러디한 작품을 찍었다. 바로 오른쪽 <바나나 사세요>(1972)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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